2011년 말부터 위안부 문제가 다시 주목받게 된 계기는 2011년 8월 30일에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이다. 정대협과 위안부 64명이 ‘한국 정부 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제기한 소 송(2006헌마788)에서 헌재가 5년 만에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취 임이후에도이문제의 해결에 무관심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12월에 열린 일본 수상과의 회담에서 갑자기 문제 해결을 강하게 요청한 것도 이 결정이 배경에 있다. 그리고 요청대로 일이 안 풀리자 결국 대통령이 갑작 스럽게 독도를 찾으며 한일관계가 전면적인 경색 국면에 빠졌으니,이결정 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을 움직이도록 만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한일 관계를 위기에 빠뜨린 원인이기도 했다.
헌재 결정문의 주문은 이렇게 말한다.
청구인들이 일본국에 대하여 가지는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배상청구권이 ‘대한 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하여 소멸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한•일 양국 간 해석상 분쟁 을 이 사건 협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는 피청구인의 부작위가 위헌임을 확인한다.(헌법재판소『판례집』23-2상, 370쪽)
재판 내용은 개인의 청구권이 한일협정에 의해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해 석을 둘러싼 것이었고, 헌재는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에 근거해서 소멸되지 않은 개인의 청구권을 되찾기 위해 정부가 노력하지 않는 것은위 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례는, 정대협에 대해서도 비교적 냉철한 태 도를 유지했던 외교부가 2012년 이후 왜 갑자기 정대협의 주장을 전면적으 로 받아들인 것처럼 행동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외교부는 위안부와 정대협 의 요구에 맞춰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일이라는 판정 을받고더이상은 독자적인 판단을할수없는 상황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지의 근거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의 부속협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 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조약 제172호, 1965. 6. 22. 체 결, 1965. 12. 18. 발효)이란 어떤 내용이었을까.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 간의 청구 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 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 제1조
(a)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108,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 불($3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매년의 생산물 및 용역의 제공은 현재에 있어서 1백8억 일본 원 (10,8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천만 아메리카합중국 불($30,000,000)과 동 등한 일본 원의 액수를 한도로 하고, 매년의 제공이 본 액수에 미달되었을 때에 는그 잔액은 차년 이후의 제공액에 가산된다. 단, 매년의 제공 한도액은 양 체약 국정부의 합의에 의하여 증액될수있다.
(b) 현재에 있어서 7백20억 일본 원(72,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2억 아메 리카합중국 불($2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액수에 달하기까지의 장기 저 리의 차관으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하고, 또한 3의 규정에 근거하여 체결될 약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업의 실시에 필요한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 역을 대한민국이 조달하는 데 있어 충당될 차관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행한다. 본 차관은 일본국의 해외경제협력기금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하고, 일본국 정부는 동 기금이 본 차관을 매년 균등하게 이행할 수 있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전기 제공 및 차 관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2. 양 체약국 정부는 본 조의 규정의 실시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권고를 행할 권 한을 가지는 양 정부 간의 협의기관으로서 양 정부의 대표자로 구성될 합동위원 회를 설치한다. 3.양체약국 정부는본조의 규정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한 약정을 체결한다.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 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 치의 대상이된것을 제외한다)에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본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 에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및이익 (b)일방체약국및그국민의 재산, 권리및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된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 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3조 1.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2. 1의 규정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분쟁은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타방 체약국의 정부로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 날로부터 30일의 기간 내에각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 내에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당 해 기간 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 단, 제3의 중재위원은양체약국 중의 어느 편의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3.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당해 기간 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아니하였을 때, 또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제3국에 대하여 당해 기간 내에 합의하지 못하였 을때에는 중재위원회는양체약국 정부가 각각 30일의 기간 내에 선정하는 국가 의 정부가 지명하는 각 1인의 중재위원과 이들 정부가 협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으로 구성한다. 4. 양 체약국 정부는 본 조의 규정에 의거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복한다.(371~ 373쪽) ```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보상이 ‘돈’뿐 아니라 ‘사람〓노동 력’으로도 지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상금은 기본적으로 ‘경제발 전’에 쓰이도록 사용처가 지정되어 있었고, 그 사용처를 구체적으로 감 시하는 기관-인물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들어가 있다. 말하자면, 1965년의 보상금의 사용은 결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 나 일본이 중심이 되어 사용처를 지도하고 감시하는(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조언하는) 체제로 한일협정은 성립된 것이었다. 보상금이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이 아니라 ‘경제협력금’이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2006년에 시작된 소송은 이 협정이 청구권 문제를 분명히 ‘완전 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하고 있는 제2조의 (3)에 대한 이의제 기였다.
(1) 일본국이 청구인들을 성노예로 만들어 가한 인권유린 행위는 ‘추업을 행하 기 위한 부녀자 매매 금지에 관한 조약’, ‘강제노동금지협약{국제노동기구(ILO) 제29호 조약}’ 등의 국제조약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이 사건 협정의 대상에는 포함된 바 없다. 이 사건 협정에 의하여 타결된 것은 우리 정부의 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만이고, 우리 국민의 일본국에 대한 개인적 손해배상청구권은 포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일본국은 이 사건 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하여 일본국에 대한 손해배 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주장하며 청구인들에 대한 법적인 손해배상 책임을 부인하고 있고, 이에 반하여, 우리 정부는 2005. 8. 26.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하여 일본국의 법적 책임이 이 사건 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하여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한•일 양국 간에 이에 관한 해석상의 분쟁 이존재한다.(중략)
(4)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실효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외 교적 보호조치나 분쟁해결 수단의 선택 등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고 있 는바, 이러한 행정권력의 부작위는 위의 헌법 규정들에 위배되는 것이다.(374쪽)
그런데 이 청구는, 인신매매의 주체를 일본국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리고 1965년의 협정에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이 청구되지 않았다고 말한 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신매매의 주체는 업자였고, 후에 말하 겠지만 개인적인 청구권을 소멸시킨 것은 한국 정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피청구인(정부)이었던 외교부는 “이 사건 협정에 따른 분쟁해결을 위한 국가의 구체적 작위 의무는 인정될 수 없다”는 등, 피해자 들이 보상을 받도록 움직이는 것이 정부의 의무는 아니며, 그런 한 정부가 국민의 기본 권리를 침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5년이나걸 린재판 끝에, 헌법재판소는 결국 청구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사실 정부는 1965년의 한일협정 때 개인보상을 국가가 도맡아 하기로 했다 는 회담 내용이 2005년에 공개된 이후,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 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추가보상을 한바 있다. 유족 의 경우 2000만원의 보상액이 정해졌고, 1970년대에 지급된 30만원을 받 은 이들은 그 금액을 뺀 1970만원을 받았다(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의 증언, 2012. 10. 6.). 물론 ‘위안부’들에게도 1997년에 한국 정부에게돈 을 받은 이들을 제외한 신청자 중 ‘위안부’로 인정받은 이들에게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이때 인정받은 이들은 300명을 넘는 신청자 중에서 불 과22명이었다.
1965년의 한일조약으로 귀결된 한일회담은 무려 14년에 걸쳐 이루어진 길고도 긴 회담이었다. 그런데 그 협정은,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일본에 대 한 ‘승전국’들이 일본과 맺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한국이 참여 하지 못했기 때문에 별도로 시작한 회담이었다. 연합국들은 조선은 일본과 ‘싸워 승리’한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해 조선의 참가를 인정하지 않았고, 샌 프란시스코 회담에서는 그런 나라들은 당사국들 간의 교섭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도록 결정했다. 식민지 시대에 한국에 와서 살던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은 미국이 접수해서 한국에 불하하는 형식으로 처리되었는 데, 그 방식을 인정한 것도 샌프란시스코 회담이었다(아사노 도요미, 607쪽).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길고 긴 회담을 시작했고 14년이나 지난 1965년에‘한일기본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1952년에 제시한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 항’ 중 사람에 관한 사항은 ‘5. 한국 법인 또는 자연인의 일본 및 일본 국민 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그외 한국인의 청구권을 변제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측이 개인피해에 관한 보상을 요구하자 일본은 ‘구체적인 징용, 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했는데, 한국은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 양국이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로1961년에이르러 ‘정치적측면에서의 접근이 모색’되었다.
그런데 이때 일본은 ‘청구권에 대한 순변제로 하면 법률관계와 사실관계 를 엄격히 따져야 될뿐 아니라 38선 이남에 국한되어야 하며 그 금액도 적 어져서 한국 측이 수락할 수 없게 될 터이니, 유상과 무상의 경제협력의 형 식을 취하여 금액을 상당한 정도로 올리고그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하 자’고 제안했다(『판례집』, 377쪽). 말하자면 ‘개개인의 피해’를 명확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상방식이 ‘경제협력의 형태’가 된 셈이다. 한일협정은 그 런 논의가 오간 끝에 합의된 결과였다. 그리고 양국은 그것을 바탕으로 양 국 간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에 합 의했다. 일본이, ‘청구권’은 1965년의 조약으로 보상 문제가 끝났다고 말하 는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1966년에 ‘청구권 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제정해 보상을 했는데,그대상은 ‘징용•징병된 사람중사망자와재일 민간 청구권자로서 논의되어 알려져 있던 민사채권 혹은 은행예금채권 등을 갖 고 있는 민사청구권 보유자’였다. 그리고 1974년에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 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1975년 7월부터 1977년 6월 말에 걸쳐 약 92억 원 을지급했다.
그런데, 회담이 진행될 때 한국 정부는 ‘징용•징병 피해자’에 대해서는 개인보상을 청구했지만, 일본의 ‘식민지배’ 전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한일회담이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연동된 회담 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어디까지나 ‘전쟁’ 종료에 따른 ‘전후처리’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에 동원된 이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국가범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원 래부터 지불되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징병’에 대한 미수금 등을 요구한 것 이다.
그러나 결국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은 요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다른 피식민국가들도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고, 여타 식민지배 국가들도 ‘식민지배’를 ‘사죄와 보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때 의 ‘보상’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전쟁’에 따른 전후처리와 갑작스러운 ‘내 지•반도의 분단과 원상 복귀’에따른 금전적 사후처리였다. 피해자단체는 ‘청구권관계 해설자료’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 사건 협정 체결을 위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이 진행 되는 동안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8개 항목 청구권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사 건협정 체결후입법조치에 의한 보상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다.(378쪽)
문제는 한일협정에 ‘보상’의 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일본인’들 에게는, 징병이나 징용은 ‘일본 국민’의 이름으로 간 것이었고 사후에 ‘무덤 (비용)’이나 은급(연금)이지급되었다. 징병 자체는 국민으로서 ‘국가총동원 법’에 따라 동원한 것이니, 일본 측에서 보자면 한때 ‘일본 국민’이었던 조 선인에게 당시에 국민으로서 부과된 일은 공식적으로는 ‘보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또한 우리가 일본에게 강요당한 한일합방이, 조선인이 ‘일본 국민’이 되겠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처럼, 합법처럼 되어버린데에 있다.
한일합방조약의 제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 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이다. 제2조는 그에 대해 일본 천황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식의 문면이다. 그리고 황족을 포함해 일본국에 거스르지 않는 자라면 보호하겠다는 것이 제3조 와 제4조의 내용이다. 서글픈 사실이지만, 그 조약이 ‘양국 합의’ 의 형태를 띠고 있는 한 그 조약에 의거해 이루어진, ‘법적으로’ ‘일본인’이 되어야 했 던 조선인으로서의 피해는 보상의 근거가 없다는 말이 된다. ‘위안부’들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보상을 위한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식민지배라는 불 법행위에 의한 타국 국민 동원에 관한 배상’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의 합방 이 양국의 조약 체결을 거친 것이었으니 ‘법적으로’는 유효했다는 치명적 인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 조약은 국민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조약이었다. 그러니 그런 사 태를 문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저 ‘합방조약 자체가 무효’라는 주장을 일본이나 당시에 식민지를 소유한 제국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1990년대의 일본의 사죄에 대해 생각하려면 1965년의 조약으로, 1965년 의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생각하려면 1910년의 합방조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당시에 ‘식민지배’가 법적으로 금 지되어 있지 않았던 이상(역으로 강대국끼리의 양해가 ‘그들만의 법’의 세계였 다), 식민지배하에서 식민지 사람들에게 가한 정신적•신체적•경제적 피해 는‘배상’받을수없다는 현실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정부의 당시의 요청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었 다. 일본은 한일회담에서 피징용자에 관한 논의가 있었을 때, “보상금이란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라고 물었고, 그에 대해 한국은 “미수금은 그 당시 규정에 의하여 받을 것을 받지 못한 것을 말하며 보상금은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를 포함하여 피징용자에 대한 보상, 즉 정식(원문대로)적 고통에 대 한 보상을 말하는 것”(김창록, 248쪽에서 재인용)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식 민지배 전체에 대한 보상 요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에 대해 “이 항목은 사적인 청구가 대부분이라고 생각 하며 종래 이러한 청구는 국교가 정상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을 보지못 한 것으로 국교가 회복되고 정상화되면 일본의 일반 법률에 따라 개별적으 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 었다.즉개인보상은 개별적으로 청구하는 방식을 일본 쪽에서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은 여전히 “우리는 나라가 대신하여 해결하고자 하 는 것이며 또 여기에 제시한 청구는 국교 회복에 선행해서 해결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248쪽)고 고집했다. 또, ‘피징용자 보상금’을 둘러싸고 일본 은 “보상이란 국민징용령 제19조에 의하여 유족부조료, 매장료 등은 지불 하기로 되어 있고 공장에 관해서는 공장법에, 군인군속에 있어서도 그러한 원호규정이 있었는데 당시의 그러한 베이스에 의한 보상을 의미하는가”라 고 물었는데, 한국은 “새로운 기초하에 상당한 보상을 요구한다”, “다른 국 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 한 보상”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일본은 “징용될 때에는 일단 일본인으로서 징용된 것이므로 당시의 원호 같은 것, 즉 일본인에게 지급한(원문은 ‘지금 한’)것과 같은 원호를 요구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는데, 한국은 그에 대해서 도 “새로운 입장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거듭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은 “우리 입장은 미불금이 본인 손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원호법 을 원용하여 개인 베이스로 지불하면 확실해진다”면서 “개인에 대한 직접 보상을 주장”(249쪽)했다. 개인들이 어떤 피해사실을 새롭게 들고 나올지 모르니 추후에 일본 국가가 한국의 개인에게 직접 보상하겠다고 했는데도, 한국 정부 쪽이그방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미 지적된 것처럼, 당시엔 “일본 측은 징용이 강제동원이라는 의식 이 전혀 없었으며 그 때문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의식도 전혀 없었” (250쪽)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이 1910년의 합방과 국민동원을 ‘합 법’으로 인식하는한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 측은 “징용자 보상 금에 관하여는 한국 측은 생존자에 대하여 정신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청구 하고 있으나,그당시의 한국인의 법적 지위가 일본인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일본인에 지불된 바 없는 보상금은 지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 망및 상병자에 대하여는 당시의 국내법에 의하여 급여금이 지불되었을 것 인바 미지불된 것이 있으면 피징용자 미수금으로 정리될 것이니 그 항목에 서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252쪽)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일본은 ‘전前 일본인’으로서의 조선인, 즉 한때 ‘일본 국민’이 었던 틀을 사용하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가능하다고 말한 셈이다. 이는 “청구권에 관한 양측의 인식의 차이”(252쪽)에서 빚어진 일이었고, “한국 측은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까지를 포함하는 것으 로 청구권을 폭넓게 인식하고 있었던 데 비해, 일본 측은 일본의 국내법에 의해 이미 성립되어 있는 권리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253쪽)다.
그런 ‘인식의 차이’는 문제지만, 이때 이런 일본의 권유를 받아들여 개인 보상 부분을 남겨놓았다면 위안부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들도 후에 적법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안부들과 피해자들이 그동안 대부분의 재판에서진것은 바로그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관련 재판이 줄곧 패소한 것을 우리는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어서라고 생각해왔지만, 일본의 재판 소들이 위안부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건 책임 자체가 없다고 생각해서만 은 아니다. 이미 1965년 협정에 근거한 보상을 통해 책임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것이 패소의 원인이었다. 개인이 청구할 몫을 이미 한국 정부에게 주었던 건 사실이니,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에 대한 ‘개인청구’를 할수 없도 록만들어버린건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였다.
이때 한국이 개인의 청구권을 남겨놓지 않은 것은 “경제건설을 위한 희 생이라기보다 오히려 이북 지역의 청구권 문제를 봉쇄하기 위한”(장박진, 2009, 456쪽) 것이었다. 그 이유는 “통일 후 일본이 이북 지역의 일본인 재산 청구권을 요구할 것을 차단하는 것이며또하나는 통일 이전에 북한과 일본 이 청구권 교섭을 할 것을 막는”(455쪽) 데에 있었다. “한일협정에 의한 각 종 개인청구권의 소멸은 본시 같이 일본에 대해서 그 과거청산을 도모해야 했던 동족과의 대립 탓으로 생긴 것”(456쪽)이었다.
물론 한국이 주장한 ‘새로운 틀’은 논리적으로는 정당한 요구였다. 그러 나 식민지 시대엔 조선은 ‘일본’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고 ‘일본 국민’이 되 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엔 국민이 국가에 의해 피해를 입을 경우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물론 식민지배에 관 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피해국(‘다른 나라’)으로서 받기를 원했던 한 국의 주장은 윤리적으로는 옳지만 ‘법적’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법’이 없 었다는 점이 문제로 남는다.
즉, 일본 측에서 보자면, 받는 사람이 이미 ‘다른 나라 국민’이라면 왜 보상을 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식민지배가 이 시기에 ‘불법’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실제로 미국과 영국이 당시 한국 병합을 승인한 것은 그것이 당시에 통용되는 법으로서의 ‘조약’이라 는 형식을 갖춘 것이었기 때문이다(장박진, 2010, 192쪽). 그런 한 일본으로 서는 그것이 ‘불법’이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가 이런 과정, 즉 협정 당시 일본이 ‘개인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한국 측이 주장해서 개인에 대한 보상을 국가가 대신 받았다는 점, 그리고 일부는 보상을 받았고 그로부터 40여 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위안부 및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번 국가가 추가보 상을 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사실 1990년대에, 한국 정부는 위안부로 인정된 이들에게 4000만 원가 량의 지원금을 지불했다(그 과정에 대해서는 『화해를 위해서』 참조). 그리고 2005년에 한일회담 문서가 공개되면서 90년대에 받지 못한 위안부들과 70년대에 보상받은 유족회에 추가로 보상금을 지급했다. 일본으로부터 받 을 보상금 대신 지급한 1990년대의 보상금은 일본 정부의 기금을 받지 않 을것을 전제로 한, 일본에 대한 ‘대항적 성격’의 보상금이었지만, 2000년대 의 보상금은 한일회담 내용이 밝혀지면서 국가가 받았다는 것이 알려진 후 지급된, 70년대의 실책을 보완한 보상금이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라는 명확한 의식은 없었지만, 일본이 ‘개인의 피 해’에 대한 보상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한국 정부가 전달 주체가 되었 을 뿐이다. 그리고 ‘위안부’라는 존재는 일본이 말한 “추후에 나올 수도 있 는 개인”이었다(물론 국가의 책임으로 인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식민지배 문 제는 한일협정 때 논의되지 않았거나 최종적으로 빠진 것으로 보이지만, 한일협정 때의 보상금이 그런 경우까지 상정하고 전달된 금액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최종적으로 그 책임은 완수했다.
앞서의 정부의 변에서 나름대로 지원을 해왔다는 말은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한일협정 당시 일본에게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었던 것은 분 명하다. 그러나 당시의 개인청구권 소멸 책임이 한국 정부에게 있었다면일 본에게 ‘법적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1990년대에 행해 진 일본의 ‘도의적 보상’은 분명 ‘식민지배’로 인해 생긴 피해에 대한 보상 이었으니 그 의미를 인정할 필요도 있다. 국가에 의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 하는 법, 제국의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을 할수 있도록 하는 법이 당시 존재 하지 않았던 이상 ‘법적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의 모순은, 타국을 지배하는 것을 나쁜 일로 생각하 지는 않았던 제국 시대와,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충분히 못한 채로 일본 과국교를 맺어야 했던 냉전체제 안에 우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2006년 이후에 한국 정부가 위안부들을 비롯한 일제 시대 피해 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이름은 ‘도의적 보상’이었지만 1965년의 조약 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뒤늦게 전달한 것이니 실질적으로는 ‘법적책임’을완수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소송자들이 소송을 낸 근거는 위안부들이 ‘강제노동’과 ‘인 신매매’를 당한 것이었다. 그것이 당시의 국제법을 어긴 것이었다는 것이 ‘배상’ 요구의 근거였는데, 당시의 법을 실제로 어긴 직접적 주체는 일본국 이 아닌 업자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소송자들의 ‘법적 책임’과 ‘배상 요구’ 자체에 이미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헌재는 ‘위안부’에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헌재가 결정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숫자를 ‘8만에서 10만 혹은 20만’으로 추정된다고 하고 있는 것은 소송자들이 제출한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 숫자를 대부분 ‘강제연행’당한 조선인으로 생각했 을지도 모른다.
또 결정문은 또한 1998년의 유엔 인권소위원회 ‘맥두걸 보고서’를 언급 하며,이보고서가
①위안부 제도가 성노예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위안소를 강간센터(rape center, rape camp)로규정하여 강제성을 부각하였고,
②일본의 책임자 처벌 문제를 강조하면서 생존 전범의 색출을주장하였으며,
③유엔 사무총장은 일본 정부로부터 최소한 연 2회 이상 진행사항을 보고받고, 유엔 인권위원회 고등판무관은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책임자의 처벌 및 적절 한배상을 위한 패널을 구성하는등유엔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였고,
④생존자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긴급하고 신속하게 일본 정부의 배상이 이 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381쪽)
라고 말한다. 헌재의 결정에는 이러한 자료들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하지만,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 맥두걸 보고서 역시 정대협의 주장을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글자 그대로의 강간과 ‘위안’(매춘적강간혹은강간적매춘)을구별하지않은보고서였다. 그들은네 덜란드인 여성들의 경우인 ‘강간센터’와 조선인들의 위안소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결정문은 ‘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제기와 진행’의 (10)에서, 2007년에 미국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일본 정부는 일본군들이 위안부를 성의 노예로 삼고 인신매매를한사실이 없다는어떠한 주장 에 대해서도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반박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도 다시 인 용(381쪽)하고 있다. 그러니 헌법재판소도 인신매매를 일본군이 주체가 되 어행해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헌재는 같은 글 (11)에서 2008년에 유엔 인권이사회가 “일본 인권상황 정기검토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각국의 권고와 질의를 담은실 무그룹 보고서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으며, 유엔 B규약 인권위원회는 2008. 10. 30. 제네바에서 일본의 인권과 관련된 심사보고서를 발표하고, 일본 정 부에 대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다 수가 수용할수있는 형태로 사죄할 것을 권고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헌재가 판결에 인용한 이러한 참고자료들은, 뒤에서 살펴보겠지 만 일본이 조선인도 ‘강제로 연행’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한국의 국회 본회의에서 2008년 10월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공식 사죄 및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는 것도 그중 하나인 데, 이 결의안은 한국의 국회의원들 역시 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놓은 결의안이었을 뿐이다.
물론 조선인 위안부들의 일부가 가혹한 인권유린을 당한 것이 분명한 이 상, 그 피해에 대해 사죄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 는 일이다. 그러나 헌재 결정은 개인의 피해를 보상받을 기회를 박탈한 주 체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 정부였다는 사실, 그리고 1990년대에 또 한 번의 보상이 이루어졌고 상당수의 위안부가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된 채 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인 위 안부’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했는데, 피해자가 제시한 자료 이외의 자료를 헌재가 사용한 흔적은 없다. 말하자면 이 판결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이해와 자료를 단지 소송자가 제기한 것에만 의존하여 내려진 것으로보 인다.
소송자들은 위안부가, 당시의 국제법이 매춘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국제법을 위반했으니 위안소 운영이 ‘불법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제 법전문가인 아이타니 구니오藍谷邦雄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 1)국제법에 의한 주장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국제법 에서 금지하는 법규를 위반했다는 것만으로는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민법의 부작위 혹은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해 왜 배상이 필요한 지를 말해야 한다.
2)배상의 근거로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헤이그 제3조약의 제3조에 근거한 내 용, ILO[국제노동기구]의 강제노동금지조약에 근거한 것, 이 두 가지다. (중 략) ILO 강제노동금지조약은 금지 위반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법한 강제노동에 대해서도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제 14조). ‘위안부’에 대한 성적 강요가 강제노동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지불을 보수라고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남지만, 그러나 조약의 취지에 근거해 판단한다면 어느 정도 현금이 지불되어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국제법의 주장은,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 1947년에 국가배상법 이 제정되기 이전의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 관리는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고, 공권력의 행사에 해당하는 행위에 의해 시민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국가는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법리-인용자)이 없는 것은 물론 (조약은 국 가의 의무를 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효, 제척기간도 적용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근거 법규로 주장되었다.
3)다른 한편으로 위안부 제도의 위법성을 주장하는 근거로서의 국제법에는 ‘부인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이 있어서, 그 제1조, 제2조에서는 본 인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도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타인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추업을 시켜서는 안 되고, 이를 위반한 자는 처벌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국제법상으로도 위안부 제도를 위법행위로 인정해야 하는 근거라는 데에는 싸울 여지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손해배상을 해야 된 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아이타니 구 니오, 36쪽) ```
결론적으로 위안부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손해배상 청구의 근거가 되지는 않으며, 미지불 ‘(강제)노동’이 있었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인신매매를 일본 국가가 했다 해도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해자단체들은 그동안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보상’은 끝났다 는 현실에 입각해 한일 간의 법이 아닌 국제법상의 법규를 적용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법규도 ‘법적’으로는 일본을 추궁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965년에 ‘개인배상’의 대상으로 언급이 되지 않 았으니 일본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피해자들의 청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이 보상하도록 한국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는 판결을 내놓았 다. 그것이 5년이나 끈 끝에 2011년 8월 30일에 나온 헌재의 ‘위헌’ 결정이 었다.
그런데 당시이판결에 찬성하지 않은 재판관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의 반대의견의 근거몇가지 가운데 일본에 관한 항목은 이렇다.
이 사건 협정은 한•일 양국이 당사자가 되어 상대방에 대하여 부담할 것을 전제 로 체결된 조약이기에 위 협정 제3조로부터 ‘우리 정부가 청구인들에 대하여 부 담하는 작위 의무’는 도출될 수 없으며, 더구나 이 사건 협정 제3조에 ‘의무적’ 내 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위 협정 제3조에 기재된 외교적 해결, 중재회 부 요청은 우리 정부의 ‘외교적 재량사항’에 해당한다는 선례(헌재 2000. 3. 30. 98헌마206 결정)도 있는데, 다수의견은 결론적으로 위 선례와 배치되는 판단을 하고 있다.(368쪽)
여기에 더해 “‘외교적 해결을 할 의무’란 그 이행의 주체나 방식, 이행정 도, 이행의 완결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판단기준을 마련하기도 힘 들고, 그 의무를 불이행하였는지 여부의 사실확정이 곤란한 고도의 정치행 위 영역에 해당하므로, 헌법재판소의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권 력분립 원칙상 사법자제가 요구되는 분야이다”(400쪽)라고 말한다.
아무튼 헌재의 결정은 무엇보다 위안부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부정확 한 정보를 근거로 판단하고 내려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국회나 언론, 국민 들의 부정확한 인식을 헌재 또한 공유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헌재의 결정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외교적 해결’에 나서게 했지만, 문제의 본질이 이해되 지 않은 채로 시도된 행동이 해결을 가져올 리는 없었다. 이후에 대통령까 지 나서면서도 이 문제의 ‘외교적 해결’이 더한층 심화된 한일 대립을 가져 온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국회도 사법부도, 그리고 그에 따라 행정부-정부도 정대협의 인식을 넘어서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