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도 참고한 2007년의 미 하원 결의나 유엔 보고서들은 정대협은 물론, 2012년 여름 한일관계가 경색된 이후로는 한국의 언론까지 위안부에 관한 일본의 범죄성과 책임을 ‘세계가 인정했다’고 보도하는 근거로 쓰인 자료들이다(「위안부문제 물은 유엔 보고서 주목」, 『노컷뉴스』2012. 8. 29.). 세계는이문제를 어떻게 보았던 것일까.
1996년의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여성에 대한 폭력-전시에 있어서의 군의 성노예 제도 문제에 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및 일본에 대한 방문조사에 기초한 보고서」)는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 수락, 배상 지불, 문서 공개, 공식 사죄, 관계자 처벌’ 등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2년 뒤인 1998년의보고서(「여성에대한 폭력-그원인과 결과」)는이렇게 말한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과거의 폭력 문제를 다루는 환영할 만한 노력을 했 다. 일본 정부와 역대 수상이 자책의 염念을 표했고, 전 ‘위안부’에게 사죄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민간기금이 피해자 개개인에게 200만 엔을 지급했다. 100명 이상의 피해자가 기금을 받아들였고, 약 50명이 실제로 속죄금[償い金]을 수령했다. 기금은 전 ‘위안부’가 있어도 문화적 이유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나라 (한국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인용자)에서는 고령자 여성들을 지원하는 시도 를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의 의료복지사업에 정부 예산에서 7억 엔을 제공했다.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는 노력을 했고, 학교 교과서에 이 비 극을 실어 미래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국내 재판소에서 계류 중인 재판 6건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 터이다.(액티브 뮤지엄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279~80쪽,부록의 자료. 일본어 번역에서 재번역)
이 보고서는 이렇게 국민기금의 사죄와 보상을 ‘환영할 만한 노력’이라 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건 96년의 보고서 이후에 일본의 기금사업이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 보고서는 일본이 위 안부 문제를 교과서에 실었다는 것도 명확히 기록해두고 있다. 위안부 문제 는 고노 담화가 나온 이후 교과서에 실렸다가 ‘강제동원’이 문제가 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 위안부 문제 자체를 전全부정했다기보다는 ‘강 제로 끌고 간’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주장이 힘을 받으면서 사 라지거나 내용이 수정된 것이다.
정대협이 기금의 사죄와 보상을 인정한 유엔 보고서의 변화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한국에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2006년 이후 추가보상 조치를한이후 정대협의 입장과는 거리를 두어온 정부 역시 정대 협과 비슷한 발언을 하게 된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30일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 지금까지 유엔에서만 여러 개의 보고서가 나왔는데도 일본이 그 권고사항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 없다”며 “유엔에서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결의안”이라고 말했다. 외교 소식통도 “외 교부 내 여러 회의에서 유엔 결의안을 추진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 다.(『동아일보』, 2012. 8. 31.)
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정대협의 위안부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온 보고서였다. 쿠마라스와미는 정신대가 위안부가 되었다면서 강제 연행을 했다고 말한 요시다 세이지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 또 위안부의 대 부분은 ‘14~18세’였고, 윤정옥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위안부 모집에 학교 제도를 이용했다고 말한다. 또 위안부들이 상대한 군인의 숫자는 하루에 60~70명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13세 때 끌려갔던 북한 위안부의 이야기로 서, 하루에 40명이나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항의한 다른 위안부 소녀가 못 철판에 고문을 당했으며, 성병에 걸린 소녀를 ‘살균소독’한다며 달군 쇠꼬 챙이로 음부를 찔렀다는 이야기를 기록해두고 있다. 그에 더해 “20만의 조 선 여성 대부분을 죽였다”면서, 1965년의 한일협정은 개인의 청구권은 포 함되지 않은 경제협약에 지나지 않았으니이조약은이문제와 상관이 없다 는결론을 내린다(‘디지털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홈페이지의 ‘쿠 마라스와미 보고서’ 일본어 번역 참조).
쿠마라스와미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정대협의 인식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증언 가운데서도 믿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북한 여성들의 증언이라는 것은 우연일까. 아무튼 문제는 이후에나 오는 의견서들이 대부분이보고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쿠마라스와미조차 ‘위안부’의 상황을 ‘강요된 매춘’으로 인 식하고 있다. 위안부들을 세 가지—자발적인 매춘업, 음식점이나 세탁부 로 갔다가 ‘위안’을 하게 된 경우, 강제연행—로 분류하는 등 ‘위안부’의 모 습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996년 시점에 ○○○○ ○○○○○ ○○○○○○ ○○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제외하면, 쿠마라스와미의 보고서가 ‘조선인 위안부’를 둘 러싼 정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단지 유엔의 보고서라는 점만으로 위안부 문제에서 오래도록 권위 있는 자료가 되어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인정했다는 부분은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