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정대협의 구체적인 요구는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 규명, 국회결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이다. 위안부 문제를 ‘범죄’로 인정하라는 것은 ‘법적 책임’을 묻고 그에 대한 ‘배상’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여성을 돈으로 산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인 간을 상품으로 다루는 행위인 이상, 위안소에서의 성행위는 설사 폭행이없 었다 해도 비인륜적이다. 그렇지만 시스템이 비인륜적이라고 해서 곧바로 그것을 ‘범죄’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법 을 만들고 시스템 자체를 바꾸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해진 규칙에 반하 는 행위를 ‘범죄’라고 말한다. 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강간이나 폭력이 공식 적으로는 금지되고 있었으니(『강제 5』, 36쪽), ‘국가’가 그 범죄를 저질렀다 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시 말해 국가로서의 ‘발상’과 기획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위안부의 고통이 물리적으로는 업주나 군인에 의한 것인 이상 군인들의 이용을 ‘국가범죄’로 규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군인들의 강간이나 폭행은 국가가 묵인한 부분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처 벌되었던 것이 사실인 이상,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범죄로 다루어야 할 사 안이다.
무엇보다 일본은 ‘군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식으로 ‘범죄’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도의적 책임’을 졌고 그건 ‘죄’로 인정했다는 것이 된다.
진상 규명에 관해서라면, 이미 일본 정부와 기금이 조사를 통해 적지 않 은 자료를 발굴/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이 펴낸 자료집이나 홈페이지는 ‘진상’에 대해 일본 국가와 군이 기획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위안부들도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은 현재,이문제에 관여한 관계자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엇보다,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면, 업 자와 가담자를 ‘책임자’에 포함시켜야 하고, 그 경우 그 화살은 우리 자신을 향한 화살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조선인 위안부’들이 ‘네덜란드인 성노예’ 나 ‘중국인 강간 피해자’와 상황이 똑같지만은 않다는 사실, 조선인의 경우 같은 조선인 업자들이 인신매매의 주체라는 것이 알려지면, 유럽이나 미국 이이제까지처럼 한국 편으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위안부를 필요로한군이 위안부 모집을 조선이나 대만 총독부등 에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일본군은 해외에서의 전쟁터나 오지 까지 와주는 ‘해외원정 종군위안부’를 필요로 했지만, 사기나 속임수를 써 가며 모집하는 일까지를 일본군의 의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군의 수요를 알게된업자들이 사기나 속임수를 써서까지 모집했던 것이대 부분이었고, 일본군은 그런 상황을 묵인하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단속 했다. 그리고 단속한 이상 ‘단속’ 쪽이 일본군의 인신매매에 대한 자세를 나 타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위안부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게 된 것은 분명 일 본군이 그런 시스템을 허용하고 묵인하고 이용했기 때문이지만, 그에 따른 처벌을 일본군에게만 돌릴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한 위안 소이용이 ‘국가범죄’가될수는 없다.
‘강제연행’이라는 단정에 반발한 이들로 인해 사라지는 중인 위안부 문 제를 다시 교과서에 싣도록 요구한다면, 이런 모든 사실이 다 실릴 것도 상 정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지배의 책임을 가르치는의 미가 희석되지는 않는다. 위안부의 ‘피해’만 부각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일본의 식민지배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수있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필요로 한 것은 군인들에게서 일상을 뺏은 대신 ‘성 욕 처리’를 포함한 인간의 기본 욕구가 채워지는 대체일상을 제공하기 위 해서였다. 군인들의 폭력적이고도 방만한 성욕처리와 그로 인한 성병을 관 리하기 위해 군대 주변에 생겨난 위안소와 도회지의 기존 시설 중 ‘관리 가 능한 위안소’를 지정하고 실제로 관리했던 것이 일반적인 ‘위안소’의 실상 이다. 그중에는 점령지의 위안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타지의 위 안부로서 필리핀이나 중국 등 현지의 위안소가 있었다. 그들 중에도 ‘점령 국의 여자’로서 ‘납치, 연행’당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존 시설에서 일하 던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위안부’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일본인’ 이 되어 군인들의 욕구를 받아주는 형태로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군을 ‘위 안’하기 위해 동원된 이들이었다. 우리 앞에 있는 피해자들은 그런 일반적 ‘위안’의 시스템적인 가해에 더해 개인적인 폭력과 강간 등의 가해를더만 났던 경우다. 그리고 그 폭력과 강간과 중절의 주체는 때로는 업자이기도 했다.
‘조선인 위안부’가 ‘군수품’이었다면, 강간당한 네덜란드 여성이나 중국 여성은 ‘전리품’이었다. 물론, 전리품이든 군수품이든, ‘일본군’ ‘남성’에게 물건처럼 착취를 당했다는 점에서는 ‘남성 중심 국가’로서의 일본의 사죄 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 경우 일본의 패전 후에 일본이 만들어준 위안소를 이용했고 한국전쟁 때 한국 정부가 만들어준 위안소를 이용했던 미국 역시 그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그동안 미국이 이 문제에서 한국 편을 들어온 것 은, 그들의 ‘위안소’ 문제를 지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일본군’으로 존재하던 ‘조선인’ 병사들이 자국의 위안소를 이용했을 뿐아니라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폭행자였을 가능성도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가라유키상』의 주인공은 조선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당한 집단괴롭힘이 한평생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건 식민지화된 분노를 ‘적의 여성’에 게 표출한 것이었겠지만, 피해자의 것이었다고 해서 폭력적인 행동이 용서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위안소를 이용한 조선인 군인들 중에 위안 소는 물론 일본군과 함께 중국인을 강간한 강간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다. 심지어 ‘위안부’들조차도 때로는 조선인 감시원과 함께 연합 군포로를 조롱하기도한존재였다(박유하, 2009).
‘식민지화’란 그런 모순을 안게된사태였다. 일본에 ‘기록’을 요구하려면 그런 모순도 기록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일본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모순을 외면할 수 는없는 일이다.
남는 문제는 법적 배상, 국회결의를 통한 사죄와 보상이다. 그것이 정대협 의 가장 중요한 요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요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실 현 가능성이 없는 요구일 뿐 아니라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근거도 충분치 않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012년 3월, 정대협은 성명을 내고 이명박 대통령 의‘인도적인 조치’ 제안을 이렇게 비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인도적 해결’에 동조하지 말고 공식적 으로 일본 정부에게 법적 책임 이행을 촉구하라!」 지난 3월 21일,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에서 개최될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앞 두고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법보다 인도적 으로 풀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우리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무시하고 본질에서 동떨어진 이러한 발언에 강력히 항의한다.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정대협은 일본 정부에게 일본군 ‘위안부’ 범 죄를 밝히고 그 범죄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 기 위해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해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당시 일본 국가가 관리해 자행한 제도적인 범죄이며 일본 정부가 국가책임 인정하에서 법 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여전히 자랑스럽게 홍보하 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 결국 실패한 것으로 알수 있듯이 국가 가 아니라 민간에 책임을 돌려버린 ‘인도적 지원’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 이다. (하략)
정대협은 변함없이 위안부 문제를 “제도적인 범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금을 “민간에 책임을 돌려버린”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기금을 받은 위안 부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일본의 기금을 받아들인 이들이 여전히 우리 앞에 나타날 수가 없는 구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금’을 받은 61명이라는 숫자는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냈던 이 들중 생존해 있는 60여 명과 비견되는 숫자다. 그중에서도 현재 시위에 등 장하는 위안부는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시위에 나오지 않는 이들 이어떤 생각인지를 확인할 필요도 있다.
미군기지에서 일했던한여성은, 위안부와 함께 자신의 경험을 말했던자 리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기지촌 여성의 상황을 개선하고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미국 강연여행을 했을 때,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소비되는 현장에 맞닥뜨렸 다는 것이다.
희망 없는 삶. 단한 번도 제 욕심껏 시도해본다거나 이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그게 바로 우리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현실을 이기고 버텨온 그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천막을 치며 새롭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며 그 속에서 느낀 희망과 자부심, 내가 변하게 된 계기를 말하고 싶었다. 또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신앙의 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최 측은 내가 미군을 상대로 매 춘을 하며 고통스러웠던 까닭, 자살하고 싶었던 경험 같은 것을 위주로 이야기해 주기를 바랐고 군사정책을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되기를 원했다.(김연자, 273쪽)
그녀는 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관계자들이 “미군 철수와 쌀 수입 반 대라는 구호를 내걸고한기지촌 여성의 죽음을 확대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253쪽), “나는 여성운동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주연은 여성운동가 이고 현장 여성은 조연, 엑스트라일 뿐이었다”(255쪽)며 자신들의 이야기 가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위화감을 감추지 않는다.
여기서도 ‘국가’의 운동에 개인이 이용되고 있었던 셈이다. 국가주의를 비판해온 운동의 아이러니가 아닐수없다.
이제까지 우리는 ‘당사자’ 자신보다도 ‘당사자’를 통해 독립적이고 자존 심이 강한 국가, 그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식민지배’를 당한 나라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감정을 유지하는 구조는 우리 자신의 트라우마를 언제까지고 치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해와 화해가 아니라 분노와 적대가 이어지도 록만드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정대협은 처음에는 ‘위안부’ 자신과 지원활동을 위한 모금을 했다. 위안 부들이 전부 한국 정부의 보상을 받고 생활이 나아진 이후로는 박물관 건립 을 위한 모금을 해왔다(이런 모금에도 일본의 선량한 시민들이 다수 참여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기림비를 위한 모금을 해오다가 2013년 3월부터는 세계인을 대상으로 ‘1억명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주장만을 이어가는 운동이라면 그 운동은 결코 해결 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대협의 운동은 과연 무엇을 위한 운동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