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지금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군, 일본 남성들에게 식민지의 여성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본인의 글이 여실히 보여줍니다.
나는 지금 눈앞에 한 여자를 떠올린다. 그 여자를 성행위 대상이라고 상상한다. 그녀가 조선 여성이라면, 우리는 손쉽게 새디스트가 될수 있다. 만약에 그녀가 미국이나 유럽 여성이라면 우리는 손쉽게 발기불능자로 변할 수 있다. 우리의 에로스는 이양 극 사이에서 흔들린다. 성행위에 의한 주체의 말살과 소거가 쾌락의 극한인 것과 마 찬가지로 우리의 로고스도 주체의 말살을 통해 손쉽게 파시즘에 가까워질 수 있는 성질을 갖는다. 우리의 에로스도 로고스도 똑같이 자신 혹은 타자의 권력의 영토 안 에서 발휘되고 있었다.(무라마쓰 다케시村松武司, 「성과 전제」, 『머나먼 고향』, 고세이샤晧星社,1976, 210쪽)
여기서의 관계가 ‘폭력’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주체의 말살’이라 는상상을 가능케한정복욕—식민지화함으로써 가능했던—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란 그들이 언제고 그런 ‘정복자’의 기분을 맛볼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성폭력’ 문제라면, 꼭 강제적이거나 물 리적인 폭력이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정신적인 폭력이 존재했기 때문 입니다.
또한 이하의 글은 왜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는지에 관한 배경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소화19년(1944)에 들어 쇼케이湘桂 작전에 따른 병력의 움직임은 급박해졌지만 위안소에는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 없이 사람이 많았다. 빚을 다 청산한 여자들은 항해가 위험했기 때문에 내지로의 이동이 어려워졌고 자비로 위안소에 남거나 민간 요정에서 일했다. (중략) 쇼케이 작전 전단계 작전에서 징한京漢 철로가 개통하자 조선인 위안부는 화 북지방을 경유해서 육로로 보충되었는데 내지 위안부 보충은 동지나해, 양쯔 강 의 항행이 어려워짐에 따라 점점 적어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나가사와 겐이치長澤健一,『한커우漢口위안소』, 도쇼図書 출판사, 1983, 221쪽)
전쟁 말기에 조선인 위안부가 많이 동원되었던 것은 지리적인 배경이 있었 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식민지적 가난과 함께 이러한 배경도 다수의 ‘조선인 위안부’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하의 글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위안부가 매춘부인지 무구한 소녀 인지의 구별이 위안부의 체험의 참혹성을 생각하는 일에 더이상 의미가 없다 는것을 보여줍니다.
그 무렵(주: 민다나오 섬의 타바오에 있을 때)에는 젊은 현역 군인들뿐이었고, 하루 에 7, 8명 정도였어요. 편하진 않아도 몸을 상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반년 정도 일 하고 나서 작년 10월 말에 이 라바울로 왔어요. 여기서는 큰 부대(38사단, 나고야) 의 전속이 되어 아주 바빴지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두세 사람을 상대하 느라 돈은 벌었지만 힘들었어요. 그래서 힘들다고 하면 “최전방에 있는 여자들 은 하루에 30명이나 상대를 하는데 너희들은 뭐냐”고 야단을 맞았지요. 하지만 30명이라니, 기껏해야 20명이 고작이죠. 일주일만 그렇게 받으면 몸이 상해요. 그러다가 전속 부대가 과달카날로 이동한 후로는 거의 손님이 없었고, 그래서 그 런 위안부들만 모아서 통과하는 부대 전용으로 일하게 되었지요.(다니카와 미쓰에谷川美津枝,『청년장교와 위안부』, 미야마쇼보みやま書房, 1986, 66쪽)
이글은 일본인 위안부의 글입니다. 그녀들 역시 하루에 다수의 병사들을상 대해야 했지만, 한국에는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 자체가 의식되고 있지 않습니 다. 위안부 문제는 실은 일본 국가가 자국의 여성들에게도 강제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는 부정자들이 ‘강제성’ 혹은 ‘매춘’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통을 당한 자국 여성들을 먼저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식민지 여성들은 그녀 들을 ‘대체’하기 위해 투입된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