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를 대표하는 것은 ‘강제성’ 여부입니다. 강제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법적 책임’을 주장하고, 강제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오히려 과거보다 후퇴하여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조차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 고 그에 연계되는 형태로 한일 양국은 위안부에 관해 ‘매춘부’와‘소녀’의 이미 지를 각각 공적 기억화하며(자세히는 졸저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참조)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5년에 만들어진 한 한국영화는 그러한 공적 기억이 어디까지나 1990년대의 시대와 사회가 필요로 했던 기억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정창화 감독의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참조). 태평양전쟁 시대의 버마 전선이 무대인이영화는 영화 속의 조선인 학도병들이 아직 40대였을때만들 어져 공개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어떤 의미로건 학도병들의 기억과 동떨어진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위안부가 등장하는데, 조선인 장교는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인식의 진위 여부를 떠나 위안부를 둘러싼 1960년 대 한국의 기억이 1990년대의 기억과는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위안부 여성은 “간호부가 되는 줄 알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 렇게 속인 주체는 대체적으로는 일본군이기보다는 업자였겠지만, 여성은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고, 일본군이 강제할 리가 없다고 말하는 ‘친 일파’ 학도병 장교를 향해 말합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속아본 일이 없으시군요?”
이장면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우선 은 일본군이 직접 강제연행이나 인신매매를 지시하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럼에도 그녀를 그곳에 데려온 주체는 다름 아닌 ‘일본제국주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꽤 정확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화된 땅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익숙한 고향을 떠나 멀리 버마까지 가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도록 한 것은 분명 ‘일본제국주의’였기 때문입니 다. 이여성은 장교에게 배속된 것을 다행스러워하지만 그건 ‘병사에게 갔으면 지옥’이었을 것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문제에서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이 여성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영화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 니다. 전쟁터에서 죽었거나 보이지 않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귀국했거나 남았 겠지요. 말하자면 모두가 전쟁터에 배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위안부들의 운명 은 기본적으로는 전쟁 수행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던 ‘군인’과 다를 바 없었 습니다. 혹 살아 돌아왔다 해도 그들은 신체의 일부를 훼손당한,이를테면 상이 군인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동원당한 군인들에 대한 보상에서 죽은자 중심이긴 했어도 남성들을 위해서는 그 보상의 틀—법이 존재했음에도, 위안부들에게는 그러 한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체일본인’이 되어 일본의 전쟁에 생명 을 던졌던 조선인 병사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고, 약속되었던 보상은 훗 날 한일기본조약 때 충분하지는 않아도 논의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하지는 않았어도 한국 정부를 통해 보상금이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똑같이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위안부 여성을 위한 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 다. (제국)국가는 남성들을 전쟁에 동원하면서 남성들을 위한 ‘법’은 준비했지 만 여성들을 위한 법은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 문제 에 관한 일본의 보상과 사죄는 필요하지만, 그를 묻기 위한 법 자체가 존재하 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는 근대 국가의 시스템 자 체가 남성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고 싶어도 그 근거가 되는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으로 돌아가 논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한국이 요구할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주체적으로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동시에, ‘법’이라는 개념이 원래 국가 시스템을 떠받치는 것인 만큼, 그러한 국가를 대표하는 ‘법’에 얽매이는 발상이 과연 윤리적인 해결에 어느 정도 기 여할 수 있는지도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법’은 때로 마음을 담기도 하지만, 이 문제를 둘러싼 ‘법논쟁’이 대체적으로 사죄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90년대 의 일본 국민들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과 사죄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어야 합니다. 그건 1965년에 보상은 끝났다고 말하는 일본 정부나, 개인의 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한국 정 부가 함께 되새겨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국이 주장해온 ‘법적 책임’ 요구의 문제 중 하나는, 90년대 초에 위안부 문 제의 본질을 ‘소녀의 강제연행’으로 생각했을 때 제기된 주장이라는 점입니 다. 이후 20여 년 동안 위안부에 관해 새로운 지식이 많이 생겼음에도 처음의 요구가 전혀 변하지 않은 데에 대한 설명도 필요합니다.
새롭게 알려진 사실이란, 문제를 제기한 한국의 지원단체가 정신대와 위안 부를 착각했다는 점, 업자가 군대와 위안부를 매개했다는 점, 무라야마 담화가 실은 자민당의 전후처리에 관한 사고와 이어져 있었다는 점(아사노 도요미), 한 국에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로만 이해되었던 ‘아시아 여성기금’이 실은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는 점, 그 기금을 받 은 할머니가 60명이나 된다는 점, 한일수교 때 일본이 개인배상을 남겨놓자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대표해 받아버린 점 등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감안한다 해도 여성들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한 책임이 일본제국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식의 사죄와 보상이 이러한 모든 사항을 염두에 두면서두나라 국민들의 이해와 합의를 얻을수있는가 하는 부분입니 다. 이제까지의 주장과 거부는 양쪽 다 이런부분에 주의를 깊이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더중요한 것은 한국이 집착하는 ‘강제연행당한 소녀’의 인식은, ‘매춘’에대 한 차별의식을 만드는 것이어서 일본의 부정파들이 주장하는 ‘자발적 매춘부’ 관을 실은 지탱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오늘 위안부 할머니들을 결국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런 인식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데에 있어 물리적 강제연행인지 아닌지, 순 진무구한 소녀인지 매춘부인지 하는 논의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 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경험을 보면 그 경험의 참혹성은 그러한 ‘원점’과는 아 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영화에 나오는 이른 바 ‘매춘부’처럼 보이는 위안부에게도 ‘지옥’은 존재했다는 것도 그것을 말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