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가 인용했던 ‘맥두걸 보고서’는 1998년에 나왔는데, 추가보고인 2000년의‘업데이트된 최종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성노예제가 기록된 사례에서도 가장 심한 사건 중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군이 관여한 강간수용소 제도였다. 특별보고자가 임무를 맡게 된 주요한 계 기가 된 것도, 아시아 전역에서 이른바 ‘위안부’로 노예가 된 여성과 소녀 20만 명이 겪은 피해의 실태와 성격에 대해 국제적인 인식이 높아진 일이었다.(액티 브뮤지엄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281~282쪽에서재인용)
이 보고서 역시 ‘20만 명’이나 되는 ‘여성과 소녀’가 전부 ‘강간수용소’ 같 은 시설에 ‘수용’되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98년의 보고서에서는 대부분이 11~20세였고, 유괴와 사기의 주체가 일본군이었으며, 일본군이 여성의 매 매 금지 조약을 위반했다고 말한다. 또 살아남은 이들은 25퍼센트에 불과 해‘14만5000명’이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자 민당의 어느 의원이 말한 숫자를 사실 확인 없이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면 서도 국가가 위법자를 ‘방치’한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으니, 맥두걸은 일 본군이 개인적으로 사기와 유괴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지원자들은 ‘위안’을 일본군의 하나의 체계적인 시스템이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국가범죄’로 생각했다. 물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일본 군이 위안소 운영에 따르는 문제들을 알면서도 묵인한 것은 분명 문제가있 다. 그러나 당시의 ‘위법’사항이 인신매매뿐이었던 이상, 위안소 설치와 이 용을 ‘일본국의 범죄’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군’이 한 일을 범죄 시하려면 오히려 개인적인 강간이나 폭행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맥두걸 보고서 역시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문제가 없지 않다. 독자적인 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그저 유엔 보고서라는 것만으로 한국의 지원단체와 언론은 우리의 생각이 옳은 증거로 내세워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