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 한국 지원운동의 모순

1.서울 정대협 운동의 공과

‘위안부’가 없는 ‘위안부 소녀상’

2011년 12월에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서게 된 소녀상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인정하지 않는 정대협이 생각하는 ‘위안부’상의 결정판이다.

소녀상은 분명 성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대사관 앞에 서 있는 것은 위안부가 된 이후의 실제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되기 이 전의 모습이다. 혹은 앞에서 살펴본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는 자 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 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녀상은 마치 ‘위안부’ 의 대부분이 소녀였던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소녀 위안부’의 기억을 강화시켜 나간다.

소녀의 단발머리는 그녀를 단정한 학생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 들은 대부분 학교교육을 아예 혹은 조금밖에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녀상은 실제 조선인 위안부와는 거리가 있다.

소녀가 맨발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끌려 갔다는 것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주먹을 쥐고 쏘아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은 ‘강제로 끌려간’ 데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다. 말하자면 소 녀상은 ‘저항하는 위안부’일 뿐 일본군과의 또 다른 관계는 드러내지 않는 다. 혹은 그 분노가 ‘일본군’ 이외의 존재를 향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도 드 러내지 않는다.

소녀상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저항하고 싸우는 소녀’의 모습이 야말로 한국인이 자신과 오버랩시키고 싶어하는 아이덴티티로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바람직한 ‘민족의 딸’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서 동원되었고 ○○○○ ○○○○○ ○○○○ ○○○ ○○○○ ○○○ ○○○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 관앞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

그러다 보니 소녀상은, 그녀가 때로 가족을 위해 나섰던 희생정신도, 아 들이 아닌 딸이 팔려가기 쉬웠던 가부장제하의 피해자성도, 그녀들을 ‘강 제로 끌고 간’ 우리 안의 가해자들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소녀상은 일 본에 저항해 목숨을 잃은 유관순을 아주 많이 닮아있다.

소녀상이 저항하는 모습만 표현하는 이상, 일본 옷을 입었던 일본 이름의 ‘조선인 위안부’의 기억이 등장할 여지는 없다.그들의 또 다른 생활과 기억, 일본 군인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놀며 웃었던 기억을 가진 ‘위안부’는 그곳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군인을 자신과 같은 운명에 떨 어진 가엾은 존재로 간주하고 동정했던 위안부도 물론 없다.

소녀상에는 ‘평화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러나 용서의 기억을 소거 한 눈은 원한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는 이들에게 일본에 대한 ‘적대’에 동참 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일본보다 조선이 더 밉다’는 위안부들 역시 그곳 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곳에는 ‘조선인위안부는 없다’.

그녀들이 해방후돌아오지 못했던 것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이 기도 했다. 즉 ‘더럽혀진’ 여성을 배척하는 순결주의와 가부장적 인식도 오 랫동안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한원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있 는 것은 단지 성적으로 더럽혀진 기억만이 아니다. ○○○○ ○○○ ○○, ○○ ○○ ○○○○ ○○○○ ○○○○ ○○ ○○ ○○○○○. 말하자면 ‘더럽혀진’ 식민지의 기억은 ‘해방된 한국’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대 사관앞소녀상은 협력과 오욕의 기억을 당사자도 보는 이도 함께 소거해버 린‘민족의피해자’로서의 상일 뿐이다.

소녀가 ‘성처녀’로서의 ‘순결’과 ‘저항’의 이미지만 담고 있는 것은 그래 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부끄러운 기억을 망각하거나 규 탄하여 ‘우리’ 밖으로 내몰아온 해방 후 60여 년의 세월을 상징하는 것이기 도 하다. 말하자면 해방 후 60년 동안 단 한 번도 총체적인 우리 자신을 끌 어안고 넘어서려 하지는 않았던 세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한, ‘피해자’ 소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양말을 신겨주고 우산을 받쳐주던 사람들이, 그녀들이 ○○○○ ○○ ○○○○○ ○○ ○○○○○○ ○○○○ ○○○○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똑같은 손으로 그녀들을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위안부가 되기 전에 그렇게 어린 ‘소녀’를 내몬 ‘손’ 또한 우리 안의 또 다른 손이기도 했다는 것은 잊은 채로.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 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 몸에 경험한 존재다. ‘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다녀야 했던 ‘노예’임 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 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복’을 입은 댕기머리 조선인이기도 했지만, 일본옷을 입고 일본머리를 한 청초한 ‘야 마토 나데시코’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의 모순’을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였다.

○○○ ○○○ ○○하고 하나의 이미지, 저항하고 투쟁하는 이미지만을 표현하는 ‘소녀’상은 협력해야 했던 ‘위안부’의 슬픔은 표현하지 못한다. ‘위안부’가 되기 전의 순수한 모습만을 기억하는 것은 ‘더럽혀지’기 전의우 리 자신을 상상하고 간직하는 일로 우리 자신을 위안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식민지가 무엇이었는지를 보는 것을 여전히 외면하는 일이다. 따라서 대사 관앞의 소녀상은 ‘조선인위안부’도 아니고 우리 자신일 수도 없다.

위안부가 대표하는 ‘식민지’ 체험은 ‘기념’되고 현창되기에는 너무나 많 은 모순을 안고 있는 체험이다. ‘위안부’가 ‘유관순’일 수 없는 것은 그 점에 있다. 물론 일제가 만든 시스템과 인프라를 향유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모순을 내포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식민지화란 구성원 누구나가 분열증을 앓게될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참혹한 존재이긴 했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그저 유태 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배척과 말살의 대상이 되었던 홀로코스트와 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정대협은 최근 들어 위안부 문제를 ‘홀로코스트’에 비 견하지만(「홀로코스트•위안부 다음달 역사적 만남」, 『연합뉴스』, 2011. 11. 21.),

○○○○○○○ ○○○ ○○○○ ○○ ○○, ○ ○○○○○ ○○○○○ ○○○○ ○○○ ○○(물론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극소수이니 위안부와는 구조가 다르다). 그런 차이를 무시한 일은 우리 자신을 ‘완벽한 피해자’로 상상하려 는왜곡된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위안부’에게 종용한 것은 실제로는 우리 자신은 일상 속에서는 잊어버리고 무관심하게 지내는 일, 즉 ‘민족의 딸’로 존재해 주는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지 못하고 있는 역할을 그녀 들에게 맡기고 있는 셈이다.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하는 2011년 12월 14일에 위안부 소녀상이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이유는 거기에 있다. 위안부가 모두 세상을 떠난다 해 도, 소녀는 계속 그곳에서 일본을 규탄할 것이다. 설사 운동가가 운동을 접 는다 해도.

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위안부 자신이라기보다는 정대협의 이상을 대변하는 상이다. 다시 말해 소녀상은 ‘그때의 조선인 위안부’라기보다는 ‘20여년의 데모’ 와 운동가가된 위안부이다.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효순/미선의 부모는 “억울한 내 딸 두 번 죽이지 마라”(『주간 동아』, 2003. 6. 26.), “이제 가족들만 단출하게 모여 그애 들을 생각하고 싶다”(『조선닷컴』, 2012. 6. 4.)고 말했다고 한다. 그건 그들이 바로 소녀들의 부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딸들이 언제 까지고 ‘미국에 의한 피해자’로 기억되면서 ‘민족의 소녀’가 되어 ‘반미’의 상징이되는것을더이상보고싶지않았던것이다.‘피해자소녀’의이미지 는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을 ‘나의 딸’의 모습을 상상 할수없게 만들 테니까. 그것은 소녀들은 물론이지만 부모들에게서도 안식 과평화를 뺏는 일이 된다.

일본에게 입은 피해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대사관 앞 소녀상은 절반의 진실을 나타낼 뿐이다.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던 식민지인이었기에, 하나의 기억만을 가질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소녀상은 이제 한국 안의 다른 장소(통영, 공주 등)로, 그리고 미국 에까지 확산되는 중이다. 미국에 설립된 위안부 기림비는 ‘강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라는 문구를 담고 있다. 그런 한그 비는 ‘위안부’에 관한 대 한민국의 ‘공식 기억’을 표현한 것일 뿐 위안부 자체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운 것은 일본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선택된 것이 지만, 우리가 하나의 기억만을 내세울수록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또 다른 기억만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각자의 기억만 고수하는 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오지 않는다.

‘위안부’들이 당한 고통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세워져야 하는 장소는 위안소가 있었던 장소이거나 그녀들이 전쟁으로 목 숨을 잃은 장소가 더 적절하다. 또 원한보다는 슬픔을, 분노보다는 절망을, 그리고 일제에 의해 이중인격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의 모순 을 표현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지금의 소녀상은 ‘평화’를 말한다고 하 지만 그 상이 일본의 굴복만을 요구하는 한 저항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과 적으로 소녀상은 언제까지고 평화 아닌 불화만을 만들어낼 것이다. 실제로 2011년 겨울 소녀상이 세워진 이후의 한일관계가 극단적으로 불화로 치달 았던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소녀상은 우익뿐 아니라 한국에 호의적 이었던 양심적인 일본인까지도 한국에 등을 돌리거나 무관심해지도록 만 들었다. 소녀상은 문제 해결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대협의 힘과 민족권력

앞에서 언급한 심미자 할머니는 유언장에서 정대협을 격하게 비난하고 있 다(http://www.ctnews.co.kr/sub_read.html?uid=15117&section=sc21&sect ion2=%BB%E7%C8%B8 등의 사이트. 『e시티뉴스』, 2012. 8. 2.). 그에 따르면, 그 녀는 일본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일본군 위안부였고, 1992년에 결성된 ‘무 궁화자매회’라는 이름의 일본군 ‘위안부’ 단체의 회장이었다. 그런데 이후 자신들의 단체를 “북한공작원 정대협이 발길로 차 쫓아”냈다고 말한다. 그 는 정대협이 위안부를 해외에서 ‘수입’해서 수요시위에 동원해 ‘앵벌이’시 킨다면서 2004년에는 ‘정대협 나눔의 집 모금행위 및 시위 동원 금지 가처 분 신청’까지 했다. 그리고 정대협이 자신들을 이용해 출세했으며 정대협 출신 국회의원이 하지도 않은 위안부 관련 활동을 했다는 ‘거짓 의정보고’ 를 했다고 주장한다. 피를 토하는 듯한 이 절규가 어디까지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일찍부터 정대협과 갈등을 겪었고 세상을 향해 호소하기 도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공론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본인에겐 엄 청난 시련이었을 과정이 우리 사회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녀—당사자와 정대협—지원단체 간의 힘의 차이를 말해준다. 실제로 위 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커다란 관심과 함께 그에 따른 힘을 얻으면서 정대협은 권력화되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이제까지 지원단체와 그들과 함께하는 위안부를 이긴 이는 없다. 위안부를 ‘공창’이라고 말했다는 식의 곡해가 원인이 되어 정대협의 비난을 받았던 한 교수는 결국 나눔의 집에 가서 사죄했고, 위안 부 사진집을 만들려 했다고 비난받은 여배우도 역시 나눔의 집에 가서 필 름을 불태우고 무릎 꿇고 사죄했다. 그렇게, ‘정대협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이들은 단순히 비판받는 정도를 넘어 위안부와 지원단체가 대표하는 ‘민족에 대한 사죄’를 해야 할 만큼 정대협은 어느새 ‘민족’을 대표하고 있 었고,그힘은 절대적이었다.

정대협의 운동 결과로 한국에서는 ‘사죄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이미지만 정착되었지만, 사실 일본은 2012년에 다시 한번 추가조치를 하려고 한 바 있다. 2011년 12월 교토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 한 요청을 받은 이후의 대응에서다. 2012년 봄, 일본은 수상의 사죄와 추가 보상과 대사의 위안부 방문으로 구성된 안을 제안했다.

「수상 사죄와 보상 타진, 한국 난색 표하며 합의하지 않아」

사이토 쓰요시佐藤勁 관방장관이 4월에 방한했을 때, 한국 대통령부에 대해 종 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수상에 의한 사죄와 보상 등을 타진했다는 사실이 11일에 밝혀졌다. 한국 측은 일본 측에 위안부 지원단체 의 의향을 물을 것을 요청하는 등 난색을 표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홋카이도 신문』, 2012. 5. 12.)

이 제안은 5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한일정상회담에서 공식 제안 하기 위한 물밑교섭이었지만,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일본 측은 아무 런제안도 하지 않았다.

실은 이보다 며칠 전에도 이미 『아사히 신문』이 “일본 정부는 13일에 베 이징에서 여는 일한수뇌회담에서 전 종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 는 것을 유보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한국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번 수뇌 회담에서 (일본 측이 생각한 방안을) 제시할 것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사전조 정에서 조율이 되지 않았다”, “작년 12월 방일한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인도적 입장에서 지혜를 짜보겠다’고 했고, 양국 정부는 이번 수뇌회담을 겨냥해 조정을 개시, 일본은 외무성 관계자를 한국에 파견해 새로 운 인도 지원책 등을 탐색했지만 합의하지 못했다”(2012. 5. 9.)고 보도한 참 이었다.

이때 양국 정부는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부정했지만, 일본 정부로서는보 상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비판할 것을 의식해서, 한국 정부로서는 입법 해결이 아닌 해결안을 정부가 받아들였다고 비판받을 것이 두려워 부정했을 것이다.

그런 제안이 나온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고위급 각료가 민주당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일본 측에 위안부 지원단체의 의향 을 물을 것을 요청하는 등 난색을 표”했다는 데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정대 협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6개월 전에 정부 차원에서 일본 정부에 위 안부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던 한국 정부가 정작 일본이 움직이기 시작 하자 지원단체 뒤로 숨었던 것이다.

이 사태는 2012년 3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인도적 조치’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고 말한 데에 대해 정대협이 성명서를 통해 비 난했던 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3월에 이어 6월에 도 ‘인도적 조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때 외교부는, 한국 정부 는 ‘입법 해결’을 바라고 있고 대통령의 뜻도 그렇다고 해명하기까지 했다. 2011년 여름에 나온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떠밀려 일본에 위안부 문제의 해 결을 요구하고 나섰던 외교부가, ‘인도적 조치’를 말한 대통령이 정대협의 비판을 받게 되자 대통령이 아닌 정대협의 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정대협 자체의 힘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 국민과 언론 대부분이 정대협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 만들어주는 힘이다. 다시 말해 이런 사태를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이 20년 동안 정대 협이 제공하는 정보 이외에는 다른 정보를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 던결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위안부’는 핍박받은 ‘식민지 조선’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2011년 연말에 ‘위안부’가 보신각 타종 행사에 초청되고, 문재인, 김두관등대통령선거 경선후보들이 빠뜨리지 않고 만나러 가는사 람이 위안부(『부산일보』, 2012. 8. 16.)인 것도 그 때문이다. ‘위안부’가, 배려 받고 보호받아야 할 ‘약한 자’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위안부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대협은 이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정대협 관련 인사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는 것도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정대협의 힘은 어느새 대통령도 이길 만 큼강해져 있었다.

원래 정대협은 1980년대의 민주화투쟁과 기독교단체와 여성운동의 접 합체로서 탄생한 조직이다(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단순한 ‘여성’단체가 아 니라 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진보 그룹이기도 하다. 1997년부터 진보파가 정권을 인수해 10년 동안 지속된 것은 정대협의 성장에 커다란 기폭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지원의 규 모에 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시기에 이 그룹에서 국회의원과 장관이 나왔고 21세기에 들어서는 한일정상회담을 비롯한 한일관계와 관련된 각 종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주요 단체가된것도 그것을 증명한다.

아시아여성기금의 해산과 한국의 진보정권의 종식 이후 정대협과 위안 부 문제는 한일 양국 사회의 관심을 한동안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1년,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온 이후 정대협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정대협이 이명박 정부 때에조차 박물관 설립에 5억 원을 지원받았다는 것도 정대협의 힘을 보여준다.

똑같은 ‘일제의 피해자’인 ‘태평양전쟁유족회’는 정대협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정대협의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이 단순히 민족주의뿐 아니라 페미니즘과 진보좌파 진영과도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2년에, 정부가 한일군사보호협정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두고 정대협이 정부를 ‘뼛 속까지 친일’이라는 말로 비난한 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정대협의 정체 성은 민족주의나 페미니즘만이 아니라 진보진영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 부 문제가 ‘민족의 여성’ 문제로 제기되면서 그런 문맥은 보이지 않았던 측 면이 있다.

물론 진보진영이라는 것이 문제일 수는 없다. 문제는 일본의 지원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도 진보나 페미니즘 진영이 그런 부분에 대한 자정작업을 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2012년 5월의 일본의 제안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두 번째 기 회였다. 앞으로 일본이 다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가 마지막 기 회였다고 말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 정부는 원전 문제와 오 키나와 문제와 증세 문제로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 언제 내각이 해산될지모 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각이 바뀔 경우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이될것이 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그 경우 민주당보다 이 문제에 강경한 자민당 연 립정권에서 민주당 각료가 그 자리에 머무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 황이었다(그리고 실제로 이후 자민당이 정권을 잡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찍 부터 이의제기를 해온 아베 전 수상이 다시 수상이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대협과 정부는 당시에,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위안부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당시의 일본의 움직임은 거부되고 나서야 보도되었으니, 정부가 일본의 생각을 당사자들 에게 전하고 의향을 묻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렇게까지 정부 가정대협을 의식한 것은 정대협에 반하는 일이곧국민감정에 반하는 일로 인식되어 비판받을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정대협의 생각’ 이외의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언 론과 관련 학자들이 ‘정대협의 생각’ 이외의 생각을 국민들에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일본 인식은 전여옥의 『일본은 없 다』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정대협의 생각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물론, 1998년의 일본문화 개방 이후 일본 드라마와 영화를 쉽게 접하 게 되면서, 그리고 교과서 문제 등의 역사인식 문제를 거치면서, ‘일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는 이전에 비해 훨씬 깊어졌다. 그러나 그와 비례하 는 형태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사죄하지 않는 일본’, ‘뻔뻔한 일본’이 라는 인식은 이전보다 더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리고 ‘위안부’는 위안부 자신이 “내가 독도고, 독도가 용수”(이용수, 앞의 『영남일보』인터뷰, 2012. 9. 14.) 라고 말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지켜야 할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응은 한국의 자존심 싸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사죄했고, 2012년 봄에도 다시 사죄를 제안했다. 그 리고 앞으로도 정대협이 주장하는 국회입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 이유는 1965년의 조약, 그리고 적어도 ○○○○○○○ ○○○○○ ○○○○○○○ ○○○ ○○○ ○○ ○○는 점, 있다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례여서 개인의 범죄로 볼 수밖에 없고 그런 한 ‘국가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기금을 받은 위안부들이 무시된 건 정대협이 생각하는 ‘정의’에 굴복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돈이 필요해서 받아들인 현실적 ‘타협’ 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계심과 저항은 일찍이 ‘제국’에 저항했 던 좌파로서는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국가’가 되 어 개인의 의지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국민의 호응을 얻었지만, 실제 운동의 주도권은 분명 좌파가 가지고 있었다. 정대협이 90년대 이후 일본의 좌파와 연대하고 북 한과 긴밀히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제국’에 저항한 세력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원래는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의 미를 가지는 좌파가 어느새 국가의 얼굴을 하고 위안부를 억압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운동에서는 ‘여성의 인권’을 화두 삼아 운동을 세계적으로 성공시켰지만, 정작 지원단체의 뜻에 따르지 않는 ‘늙은 한국 여성’의 인권 은존중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처음엔 분명 식민지배의 문제로 제기되었던 이 문제가 ‘식민 지배’가 낳은 문제라는 인식은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다. 2000년대 이후 다 른 국가들과 연대한 세계운동을 펼치게 되면서 ‘전쟁’이 키워드가 된 ‘여성 의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만 호소해온 결과다. 말하자면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특수성은 보이지 않게 되고 만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한 정대협 의운동은 그런 모순을 안은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