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미군을 위한 위안소가 생긴 건 미군이 ‘해방군’으로서 한국에 주둔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한국 정부는 1951년 5월, 유엔 군을 위한 위안 방법으로서 댄스홀과 위안소 설치를 결정했고, 동시에 한 국군 병사를 위한 특별위안대 결성도 결정”(Lee Im Ha, 「Korean War and Mobilization of women」, 세계여성대회에서의 구두발표, 2005.6., 하야시 히로후 미, 2012, 194쪽에서 재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2년에 네 개의 부대의 위안부 총수 89명이 이동하며 위안을 했고, 1년 동안에 합계 20만 4560명에게 ‘위안’을 실시”했다. ‘유엔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16개 국의 군인들 역시 그렇게 ‘위안소’를 이용했다. 그렇게 다국적의 수많은 군 인들을 ‘위안’했던 ‘유엔 위안부’는 1954년 시점에서 고작 ‘2564명’(같은 책, 150쪽)이었다.
위안부들이 ‘원정’간 곳에서는 “여자들이 버젓이 헤집고 돌아다녀도 동 네 사람들은 속으로야 ‘에이, 더러운 것들’이라고 욕을 할지언정 없는 방도 만들어 내줄 정도”(195쪽)로 이들에게 협조했다. 그것은 “갑자기 시골 동 네에 가게들이 들어서고, 논밭 위에서 밤새도록 음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식으로 상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에 대해 편견을 품고 차별을 하면서도 일반인들 또한 그렇게 미군을 위한 위안부 시스템을 이용 했다.
일본의 가라유키들이 근대 초기 일본의 국가경제에 도움을 주었던 것처 럼, 이들 역시 ‘국가’에는 애국자였다. “1964년 한국의 외화수입이 1억 달 러에 불과하던 시절,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근 10퍼센트인 970만 달러”(한홍구, 『한겨레』, 2012. 12. 1.)였고, 당시로서는 막대한 비용이었던 1억 원이나 들여 ‘기지촌 정화사업’을 하면서까지(『오마이뉴스』, 2012. 8. 26.) 존 속시켰던 이유는 단순히 안보라는 이름의 ‘반공’뿐 아니라 그렇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이제, “자신의 추한 역사를 돌이켜보지 않고 일본에 대해 위안 부 배상을 요구하는 위선을 보이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에 대해 ‘보상과 사 과’를 요구하고 있다(『뉴시스』, 2009. 1. 9.). 그리고 그에 부응해 ‘기지촌여성 인권연대’가 출범하고 변호사들이 이들을 위해 나서고 있다(「기지촌과 미 군기지, 현재진행형인 미군 문제의 역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공식 블로그’, 2013. 1. 16.). 조만간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가 이들에게 국가보상을 해야하는 날이올수도 있다.
한국의 기지촌에 팔려간 필리핀 여성들을 위해 필리핀은 한국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경향신문』, 2002. 10. 17.). 그런데 필리핀은 냉전체제 유 지를 위한 ‘위안부’를만든 존재로 ‘국가’가아닌 ‘포주’를 겨냥했다.
2006년이 되어, “동두천에선 거의 한국 여성을 볼 수가 없”(『주간 경향』669호, 2006. 4. 11.)게 되고, 한국 여성을 대체하던 조선족이나 러시아인들이 필리핀인과 페루인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일찍이 일본인 위안부가 하던 일 을 조선인 여성들이 하게 된 것과 같은 구조 속의 일이다. 한국의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더 가난한 외국인 여성들이 한국인 여성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 는 것이다. 문제는 그 대체를 위해 지금도 “동아시아를 향해 세계 각지에서 인신매매된 여성들이 보내지고 있”(하야시 히로후미, 2012, 152쪽)다는 사실 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의해 지탱되어온 근대 국민국가 체제는, 국가세 력을 확장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고 고향을 떠나 ‘나라를 위 해’ 일하는 그들을 ‘위안’할 여성들의 조직을 유지해왔다. 그런 의미에서는 러일전쟁 시대의 일본인 위안부도, 태평양전쟁 시대의 조선인 위안부도, 해 방 후 한국에 주둔하게 된 미군을 위한 위안소도, 기본적으로는 모두 똑같 이 국가(안보 혹은 경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동원된 피해자들이다. 그런데 도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만 해당하는 문제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일본 군의 숫자가 워낙 많았던 데다가 전쟁기간이 길고 전쟁지역이 넓어서 표면 화되기 쉬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 더해, 패전국이 되어 그러한 사실들 이승전국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앞서의 센다처럼 그들 스스로 가이사안을 문제시했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늘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 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가 난한 자원병들은, 처음부터 신체 자체, 생명 자체를 국가에 저당잡힌 존재 들이기도 하다. ‘위안부’와 군인은 그렇게 함께 국가에 의해 동원된 존재이 면서그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한국과 일본 등지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와 태평양전쟁 때의 일본군의 차 이는 전시인지 평상시인지, 군인 수가 많은지 적은지의 차이뿐이다. ‘주둔’ 이란 ‘전시’를 예상하거나 대비한 ‘전시대기’ 상태이고, 전쟁이 일어나게되 면 군인 수는 당연히 많아진다. 일본의 패전 직후나 한국전쟁 때와 같은 일 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국민들은 “국가라는 것이 끊임없이 전쟁 상태 에 있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고 “장기 적인 전망과 전략에 의해 준비되고 예상된” 전쟁을 ‘갑작스러운 사건’처럼 받아들인다(가라타니고진, 252쪽).
‘위안부’라는 존재는 제국주의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제국이 붕괴한 이 후에도 아시아에서 ‘위안부’ 시스템이 이어진 것은 곧바로 본격화된 냉전 체제 때문이다. 1965년의 한일협정이 개인의 청구권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 은상태로 맺어진 것도 냉전체제 속의 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안부들 은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졌으면서 냉전 유지에도 이용되었고 냉전 때문 에보상을 받지 못했던 셈이다.
한국은그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고,그전 에일본이나 미국이 했던 일을 베트남에서 했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면서도 의식적으로는 철저하게 식민화의 길을 걸었던 셈이다. 베트남은 아직한 국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한적이 없지만, 그건 양국의 암묵적인 합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이토 마사코). 언젠가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군의 강간과 폭행에 관한 사죄와 보상을 청구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1990년 전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식적으로는 냉전이 끝났지만, 아시아는 여전히 냉전 상태에 있다. 기지는 안보를 위해 서라기보다는 냉전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고, 그런 한 그들을 ‘위 안’하는 명목으로 여성들이 준비되는 위안부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리고 그런 냉전을 유지하는 군대가 필리핀등과거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 없이 여전히 새로운 제국(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