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그런 ‘위안부’를 준비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일 본의 천황제’나 ‘일본의 군사주의’가 아니라 국가세력을 유지/확장시키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는 국가 시스템이 만든 문제다.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가 쓴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라는 소설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위안부 이야기가 나온다. 1950년대에 국경을 수비 하는 군인들의 민간인 강간 문제가 심각해지자, 군대가 직접 비밀리에 여 성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봉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서문)다고 말하는 것처럼, 남미의 페루도 ‘군인을 위한 위 안부’를군이 나서서 조직화하고 운영했다.
앞서의 기지촌 여성의 자전에세이는 ‘군인들을 위한 위안부’가 우리 자신도 용인한 존재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동두천에서 일하던 그녀들은 국가에서 주관하는 ‘교양강좌’를 들어야 했는데, 그녀들은 국가가 발 행한 “검진증을 뺏기지 않으려고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앞쪽 좌 우로 군수, 보안과장, 평택군청 복지과장”(김연자, 123쪽)이 앉아 있고. “터 놓고 양색시를 해도 좋다고 국가가 인정한 매춘자격증”(138쪽)이기도 했던 보건소가 발행한 ‘검진증’을 그녀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국가— 한국 정부가 미군을 위해 만든 ‘위안부’였기 때문이다(『화해를 위해서』 참조).
그런 한국형 ‘위안소’가 생기게 된건 미군 역시 아시아의 여성들을 대상 으로 무차별 강간을 했기 때문이다. 한 일본인 여성은 일본의 패전 직후 오 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의 성폭행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제일 무서웠던 건, 우리 마을을 내 집에 있는 것처럼 활보하고 다니던 미 군들이었습니다. 지켜주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던 미망인이나 약한 여자들, 나이 든 약한 여자, 남의 부인 할것 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어깨에 둘러메고 데리고 갔 고 폭행을 했지요. 낮에 먹을 것을 찾으러 가려 해도 언제나 사람 그림자만 보면 떨었습니다. 밤에는 천장 밑이나 마루 아래 숨어서 잤습니다. (중략) 수용소엔 꼭 매일 밤, 미군이 막 들어와서는 여자들을 둘러메고 나갔습니다.(소카갓카이創価学会 부인평화위원회 편, 221~222쪽)
만주 지역과 북한에 있었던 일본인 여성들이 갑자기 진주해온 소련군에 게 매일 밤처럼 강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또 연 합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자 일본은 직접 나서서 점령군인 미군을 위한위 안소를 만들기도 했다.
미군들은 한국전쟁 때도 한국인 여성들을 강간했는데, 한 위안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인제거기서는여주이천을가니까는,글쎄못살겠는거야,또.어.미국사람땜에. “그때는 인제 미국 사람들(한테) 잽혔다 하믄 죽는 거야. 그냥 한 눔이 그러는 것도 아니래요. 그냥, 뭐, 여자들 피난 댕기다 저렇게 당해가지구 죽으면 그냥 산에다 버리구 이랬거던. 옛날 우리 겪던그식. 그, 그,그식이지. “미군이또해꼬지할라고 허니까, 응.
“걔들이, 한국 사람이 팔군단 마크 붙인 사람덜이구. 군속이거던. 이렇게 봐가 지고 뭐 하면은 들여보냈잖어. 거 여자들 있는 데루. 그렇게 한국 사람이 못돼먹 었어. 그래가지구 낭중에그양갈보, 양공주, 그걸 맨들은거아냐?
“그냥 안하무인이야. 부인이구 무신 처녀구, 무신 응, 늙은이구, 그것도 아랑곳 없더구만, 아이구. 그러니께는 저 그 도라쿠 안에서도 지네가 뭐 잡아가지구 거 기서 다 그래가지구, 죽으면 저 땅으로 집어내뿌리고 가구 이랬대는 거 아니야, 그있는 대루 군인들이다그지랄이야.(『강제4』, 237~238쪽)
이증언은 미군들 역시 일본군처럼 전시에 강간과 윤간과 때로 성폭행후 살해를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 한국 자체가 가담했다 는 것도. 물론 그건 미군이 ‘공산주의자’들을 한국 땅에서 몰아내주는 존재 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위안부는 ‘제국과냉전’에함께 동원된 셈이다.
“오키나와에서미군군속들은12살내지13살짜리오키나와소녀들을미 군기지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가둬놓고 병사들에게 성적인 서비스를 강요 했다. 필리핀에서 미군부대장은 적극적으로 매춘을 장려했으며, 그들중일 부는 심지어 자기 소유 클럽을 가지고 매춘부들을 집단적으로 관리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군용버스가 하루에 200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동두천 기지촌에서부터 근처에 있는 캠프 케이시로 실어나르곤 했다. 이때 부 대장은 그런 일을 암묵적으로 봐주고 넘어가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가담했 다.”(여지연,40쪽)또미군은“공식적으로는매춘에연루되는것을금지했지 만—비공식적으로는못본척하고 넘어갔다.”(같은책, 52쪽) 심지어는 미군 을상대했던 이들 중에는 일본군의 위안부였던 이도 있다.
‘가라유키상’들이 가난한 소녀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이 그 곳에 오게 된 이유는 가난이었고 어렸을 때 당한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희 생자들이거나 무책임하게 학대하는 남자친구나 남편의 희생자”(59쪽)들이 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미군홀 여종업원 모집, 월 20만원, 침식 제공’, 『아리랑』, 『명랑』 잡지와 신문광고에 실린 유혹을 따라 나”서기도 했는데,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되면 “화장품값, 침대값에 데려온 사람 소개비까지 덤터기 를 씌워놓”는 “권력의 역학관계” 속에 빠진 이들이었다. 그녀들도 일본군 위안부들처럼, “처음에는 ‘영화에서처럼 미군들하고 춤만 추면 된다’”고 들었다가 나중에는 “‘홀에서는 몸도 팔아야 된다’고 말을 바”꾸는 사태를 만났고, 그때는 “이미 소개비에 침대값, 장롱값, 먹은 것들이 빚이 되어 쌓였고, 가겠다고 하면 빚을 ‘갚아야 갈 수 있다’고 으르니 그 자리에 주저앉 을수밖에 없”(김연자, 138쪽)는상황에 처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과 한국에 있는 미군기지에는 미군을 위한 기지촌이 들 어서게 되었고, 한국의 기지촌 여성들 가운데에는 성병치료 주사를 맞다가 죽은 이들도 많았다. “훈련이 고될수록 미군들은 여자를 험하게 다뤄”(같은 책, 195쪽)서 힘들었다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일본군이 전쟁에서 돌아오면 폭행을 하기도 했다는 위안부들의 말을 상기시킨다. 그녀들은 미군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나가면 “원정”(194쪽)을 가기도 했는데, “훈련지에 갔다 오면 한결같이 심한 병을 얻었다. 골병이 든 몸은 살갗이 헐었고, 성병이나 임 신의 고통을 겪었다”(195쪽). 그들 역시 그런 경우에는 “여성 한 명이 하룻 밤에 서른명내지 마흔 명의 군인을 받”(여지연, 45쪽)아야 했다.
그중의 한 여성은 “일자리를 찾으려고 서울로 갔는데, 난데없이 믿을 수 없게도 기지촌에 팔려갔다”면서 그곳에서 “뼛골 빠지게 고생”했으며 “피 눈물이 난다는 표현이 딱 맞”(여지연, 111쪽)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미군과 의첫 경험을 “강간”이었다고 표현하고 “도망쳤지만 매번 붙잡혀서 그때마 다죽도록 맞았다”고,그때문에 “도망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난 참을 수가 없었어. 내 몸뚱이가 내 몸뚱이가 아니니까. 있잖아, 그게, 스물네 시간 내내내몸은내것이 아니었어.”(112쪽)
일본의 ‘위안부’ 문제가 주목받아온 것은 그들의 고통이 다른 경우와 비 교하기 어려울 만큼 여성들에게 가혹한 생활이었던 것처럼 간주되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미군을 위해 준비된 여성들 역시 미군을 상대하기까지의 과정이나 이후의 생활에서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없다. 그들 역시 참혹한 생활을 했고, 그런 참혹함과 그에 따른 고통은 ‘일본군’이나 ‘미군’이라는 고유명사 이전에 ‘성노동’ 자체가 강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런 일을 하게된것은 그곳에 국가가 만든 ‘군대’가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규약’까지 만들면서 철저하게 ‘관리’를 했기 때문에 일본만 이 제도적인 ‘군 위안소’를 만들었던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베트 남에서는 4000명의 미군들에게 서비스하는 매춘시설이 미군에 의해 특별 히만들어졌”(같은책,39쪽)다. 그리고 “1980년대 미육군교본”에는 “보건증을가지고 있는 클럽 여성들만을 상대할 것과 거리 여성들을 피하라고 충고했다”(38쪽). 말하자면 규모와 방식은 다르지만, 기본 구조는 일본군이나미 군이나 다를게없다.
하지만 이들의 피해는 아직 공식적으로는 공개된 적이 없다. 1992년에 윤금이 사건으로 미군의 성폭행 문제가 주목받기도 했지만, 해방되자마자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된 냉전체제에 편입되면서 한국은 미국의 횡포에 대 해 말하지 못했다. 그런 냉전체제에서 한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을 포 함한 세계 곳곳에 주둔하게된미군기지는 아직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는 그렇게 세계 곳곳에 존재하게 된 미군기지 중 ‘자산가치’가 가장 높은 곳으로, 한국은 네 번째로 인식되고 있다(하야시 히 로후미, 2012, 4쪽). 그에 따라 미군기지 면적과 주둔 군인수도 일본이 2위, 한국이 3위를 차지한다(일본 3만 5329명, 한국 2만 4655명, 2010년 12월 31일 기 준). 그리고 그 기지의 존속을 위해 오늘도 여성들이 참혹한 생활을 강요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