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조치에 나서야할세가지 이유
‘조선인위안부’가 역사 속의 ‘피해자’라는건부정할수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 여론은 새로운 보상은 물론 1990년대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기금’을 “역사적 사실 에 관한 냉정한 검증이 결여된” 것으로 보고 “1993년 고노 관방장관 담화 에는 일본의 관헌이 마치 조직적, 강제적으로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했다는 듯한 기술이 있어 오해를 심화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았다”(『요미우리 신문』사설, 2011. 10. 17.)는 기사는 그대 표적 의견이다.
한일 양국이 1965년의 국교정상화 조약의 체결에 앞서 과거에 대한 논 의를 거쳤고, 그 결과로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의 ‘보상’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배상은 ‘독립축하금’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협력금’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 정부는 막대한 배상을 했지만 조약에서 ‘식민지배’나 사죄’나 ‘보상’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보상금인데도 그 ‘명목’은 보상과 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1990년대의 ‘기금’이 실제로는 정부가 중심이 되었는데도 마치 국가와는 관계가 없다는 식의 형 태를 취했던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
해방 후 최초로 양국 간에 이루어진 공식적 대화였던 한일회담은 성립까 지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잘 알려진 것처럼, 회담이 시작된 계기는 샌 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었다. 일본은 패전 후 연합국의 점령에서 벗어나 독 립할 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해 전쟁 상대국에 대한 배상을 끝냈 다. 하지만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서명국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 지 못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방침에 따라 개별적인 ‘강화’를 해 야 했다. 결국 한일 간의 교섭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의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다(다카사키소지 등).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미국의 후방지원이라는 역할을 담당했고 그로 인 해 전쟁 특수를 맞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실은 일본은 전쟁 자체에 더 깊숙이 개입했다(쇼지 준이치로; 정병욱). 미군의 요청에 따른 통 역이나 운전 등의 군속 업무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참전해서 목숨을 잃은 사 람까지 있었다(정병욱).일본이 참전하게된건당시의 미•일군이 ‘반공’이라 는 이념으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 붕괴 후 한일 간의 새로운 관계는 그렇게 냉전구조에 깊숙이 가담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결국 지불된 것은 1910년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배’에 의한 인적•정신적•물적 손해에 대해서가 아니라(실제 일본의 ‘지배’는 ‘보호’에 들 어간 1905년부터라고 해야 한다) 중일전쟁 이후의 강제동원에 관한 보상이었다.
한때 결렬될 만큼 서로가 ‘식민지배’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된 것은 한일회담의 계기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한 것이 기 때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뒤처리, 말 그대로 ‘전후처리’를 위한 조약이었다. 한일회담의 기본 틀이 샌프란시스 코 강화조약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일 간의 협의도 ‘전쟁’에 따른 손 해와 보상에 대해 논의하는 형태가된 것이다.
회담은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과 조선이 청구해야 할 보상금(대일 채권, 한국인 군인•군속•관리의 미지급 급여, 은급, 기타 접수 재산)에 대한 논의가 중심 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청구권’과 관련하여 기본조약의 부수조약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국의 협정’ 이 맺어졌다. 결국 일본 측이 해결을 원했던 한반도에 남겨진 일본인들의 재산도 포기되었고, 포기된 재산을 (미국이 승전국으로서) ‘접수’한 뒤 한국 에 나누어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 또한 ‘반공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었고, 미국이 일본에게 받아야 할 비용(일본으로 돌아간 식민자들의 귀환에 사용된 배비용 등)을 그런 방식으로 대신 받아 한국 의자립을 도와주고자한일이었다(이상, 아사노 도요미).
결국 1965년의 조약 내용과 돈의 명목에 ‘식민지배’나 ‘사죄’ 같은 내용 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한국의 ‘청구권’이 1937년 이후의 전쟁 동원 에 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상금 전액은 한국 정부가 대신 받아 국가가 개인의 청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지불되게 되었다.
한일기본조약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 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 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 복지와 공통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양 국이 국제연합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 하며, 또한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의 관계규정과 1948년 12월 12일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Ⅲ)호를 상기하며, 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이에 다음과 같이 양국의 전권위원을 임명하였다.
여기서는 과거의 한일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단지 ‘역사 적 배경’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이 조약이 샌 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한국이 일본에 대한배 상 청구를 1937년 이후로 한정한 것은 (명기하고 있진 않으나) “식민지 관계 는 일차적으로 배상 청구의 대상이 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장박 진, 2009, 248쪽)했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연합국들, 즉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일본의 ‘식 민지배’를 문제삼지 않았던 것은 그 회담이 ‘전쟁’후처리를 논의하는 회담 이었고, 연합국들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국’을 구축했던 나라였기 때 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에 의해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는 많았지 만 ‘식민지배’는 아직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 시, 그리고 이후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식민지배’—타민족을 ‘점령’, ‘지 배’하는것이 ‘나쁜’ 일로 공적으로 인식된 적은 아직 드물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1965년의 조약에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이 포함되 지 못했던 것은 한국의 청구가 “미국의 대일 배상정책의 움직임과 연동해 서 전개될 수밖에 없는 제약 아래 있었기 때문”(위의 책, 248쪽)이었다. 애초에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참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서명국 참가의 가능성은 일본에 대한 막대한 배상 청구의 포기와 연동되는 구조” 속에서 “한국 정부의 능력을 초월한 구조적 결과”(248쪽)에 있었다. “한일회담의 목적은 당초부터 특수한 과거의 청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반공을 위한 우 호적인 한일관계 수립에 있었”(256쪽)던 것이다.
결국 한일회담은 서로가 ‘식민지배’를 의식하면서도 그에 대한 견해를 ‘공식적으로’ 남기지 못한 회담이 되었다. 이는 당시의 세계구조와 인식의 한계의 결과였다. 말하자면 미국과 소련이 중심인 세계대국에게 등 떠밀리 는 형태로 양국 다,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한 채(일본 측 또한 일본인 의개인 재산을 되찾지 못했다) 끝나버린 회담이기도 했다.
그리고 식민지배가 끝나고 20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 만들어진 조약에는 ‘식민지배’나 ‘사죄’라는 말이 단 한마디도 안 들어가게 된다. 그런 의미에 서는 한일기본조약은 최소한 인적 피해에 관해서는 ‘제국후’ 보상이 아니 라말그대로 ‘전후’ 보상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지화’했던 국 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보상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요청 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식민지화 과정에서의 동학군의 진압에 대해서도, 1919년의 독립운동 당시 수감/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関東 대지진 당시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밖에 ‘제국 일본’의 정책에 따르 지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가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대 해서도, 공식적으로는 단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 리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국민동원의 한 형태였다고 볼수 있지만, 제국의 유지를 위한 동원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배의 희생자다.
그렇다고 해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한일조약 자체를 깨고 재협상하는 것이 꼭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로서의 신뢰는 깨 질 수밖에 없다. 또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한일합방이 일본의 국민이 되 겠다고한약속이었던 이상 ‘위안부’ 동원을 ‘법적’으로 문제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국가가 합의한 ‘개인의 권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당시 조선에 재산을 남기고 간 일본인들의 청구권 문제에도 한국이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일협정은 또 하나의 제국이었던 미국이 주도하는 냉 전체제하에서 이루어진 탓에 식민지배에 대해 철저하게 되물을 기회를 한 일양쪽에 주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물론 1990년대에 일본이 ‘기금’을 만들어 보상한 것은 1965년에 했어야 할 일을 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1965년의 협정 내용을 보완한 것이었 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은 끝났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다 른 나라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로 실질적인 보상을 하면서도그일에 공적인 의미를 담지 못했다.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후 처리’ 였고 ‘식민지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일조약의 시 대적 한계를 생각하고 보완하는 것은 다른 전前‘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한 발 앞서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전쟁뿐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타국의 지배는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앞 장서서 표명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표명은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