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가 발생한 이후, 이 문제에 대한 한국의 공통인식을 만들어온 것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다. 물론 다른 지원단체나 연구자들도 있지만, 정대협은 그동안 ‘위안부’에 관한 정보제공자로서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에 관한 한국인들의 ‘상식’—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20만 명의 소녀—은 정대협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정대협은 홈페이지(‘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사이버기념관의 ‘애니메이션 배움터’)에서, ‘위안부’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정부에 의해서 강제로 연행, 납치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012년 7월 현재. 이후 정대협이 홈페이지 를 재정리하면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다. 하지만 이 글은 2012년 여름에 쓰기 시작한 것이고 지난 20여 년에 걸친 ‘공통기억의 형성’에 관한 글이므로, 이미 없어진 자료지만 수정 없이 사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정대협은 ‘정신대’에 관해서도 언급하면서, ‘정신대’란 ‘일본이 일본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남녀 조직 모두를 지칭하는 명사’라고 설명한다. ‘위안부’와 ‘정신대’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010년에 나온 정대협 현 대표의 책 (『20년간의 수요일』)에도 그 차이는 언급되어 있다.
사실 위안부 문제가 사회에 알려지면서 ‘위안부’와 ‘정신대’가 다르다는 지적은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해왔으니(후지나가 다케시, 112쪽), 이런 설명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왜 ‘정대협’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시 말해 정대협이 활동 초기에 정신대를 곧 ‘위안부’로 생각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정대협이 1990년대 초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무렵의 신문을 보면 ‘정신대 문제에 대해 사과하라’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대협이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윤정옥 교수를 인터뷰한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43년 이화여전 1학년 시절, 어느 날 학교는 1학년 학생을 전부 지하교실로 모으더니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아래 양쪽 귀퉁이에 지장을 찍게 했다. 정신대소집장이었다. 그 다음날로 자퇴서를 썼다. (중략) 다시 정신대 문제를 기억에서 되살려낸 건 1970년대 중반, 일본 기자 센다 가코우가 쓴 『분노의 계절』이란 책 속에서 ‘종군위안부’를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다.(『미즈내일』171호, 2004. 3. 신민경 기자)
도장을 찍게 했다는 이 소집은 윤 교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대’ 소집에 관한 장면이다. 학교를 대상으로 모집했고 ‘지장’을 찍었다는 상황은, 위안부에 관한 일반적인 상황—시골 동네나 도회지 길거리에서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은 계층 여성들을 유인하거나 신문에 공고를 내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윤 교수의 체험은 ‘국가총동원법’하에서의 정신대 모집이었음이 분명하다. ‘국가총동원법’이란 일본이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 국민’ 전체를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1938년에 만든 법을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에 ‘국민징용령’이 만들어졌고, 1941년 부터는 ‘국민보국근로협력령’에 의해 14~40세의 남성, 14~25세의 미혼 여성을 30일 동안 노동에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9월 차관회의의 ‘여성 근로동원의 촉진에 관한 건’에 의거해 14세 이상을, 1944년 2월에는 ‘국민직업능력신고령’의 개정을 통해 12세 이상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정혜경).
당시에 이미 정신대를 위안부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었으니, 어쩌면 당시의 윤 교수도 그런 소문을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윤 교수가 보았다는 센다의 책은 위안부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윤 교수는 그 책을 보고 조사에 나서 각지의 위안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니 윤 교수가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윤 교수는 조사 과정 혹은 이후의 운동 과정에서 정신대와 위안부가 다르다는 것을 몰랐을까. 아무튼 그렇게 착각을 바탕으로 한 윤 교수의 문제제기는 “81년에 한국일보에 정신대 할머니를 찾아다닌 기록을 연재”(앞의 기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30여 년을 지나면서 ‘일제가 어린 소녀까지 끌고 가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기억은 한국인의 ‘공적 기억’이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2012년 7월의 한 신문기사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서명과 모금 운동을 벌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난과 넋을 달래는 ‘해원비’를 세웠다”며 이렇게 말한다.
시사탐구동아리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정신대문제연구회가 지난 3•1절을 앞두고 전국 고교생 535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응답자의 86퍼센트가 ‘일제강점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한겨레』, 2012. 7. 23.)
‘위안부 문제’를 돕기 위해 활동하는 모임의 이름이 ‘정신대문제연구회’인데에서도 이 학생들 역시 ‘정신대’와 ‘위안부’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문제는 아직 어린 학생들이 여전히 그런 착각과 함께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자신들의 그런 혼동 사실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홈페이지의 콘텐츠나 박물관의 전시내용을 조금씩 사실에 가깝게 바꾸고 있으면서도, 그런 변화를 공식적으로 알린 적은 없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정신대에 관한 강제성이 위안부에 관한 강제성으로 오해되면서 여전히 ‘강제연행된 어린 소녀’라는 도식이 유지되고 있다.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은 일회성 강간과 납치성(연속성) 성폭력, 관리매춘의 세종류가 존재했다. ‘위안부’들의 경우 이 세가지 상황이 조금씩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조선인 위안부의 대부분은 앞에서 본 것처럼 세 번째 경우가 중심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중국 등의 점령지에서 많이 발생했던 첫 번째 경우나 네덜란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두 번째 경우까지 ‘조선인 위안부’의 경험으로 생각해왔다.
일본 국가가 필요로 했고,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 구조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는 점에서는 일본 국가의 ‘강제성’은 존재했다. 그러나 소녀들을 ‘위안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끌어간’ 직접적인 주체는 대부분 포주이거나 업자였다. 그런데도 정대협은 ‘위안부’를 “일본 정부에 의해서 강제로 연행, 납치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이라고만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