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하루는 텐트를 치고 있던 부상당한 군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를 우미라(바다)로 가라고 가르쳐줬어요. “우미라로 가라, 이 산을 따라가면 우미라가 나오니 너희들은 그리로 가거라. 나는 죽으니까 너희는 나가서 살아라. 미군이 묻걸랑 저팬이라고 하지 말고 코리아라고 해라” 했어요.(『강제3』, 57쪽)
‘마닐라에서 떨어진 시골’에 있었다는 이 위안부의 이 증언에는, 패전을 맞아 마지막 순간에 위안부를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되돌려 구하려한 일본 군인이 있다. 필리핀이나 다른 지역의 고립된 섬에서 일본군은 치열한 전투와 기아로 인해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었다. 이른바 ‘위안부의 죽음’은 대부분 전쟁터에서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센다가 인용했던 1970년 8월 14일자 『서울신문』도 “필리핀이나 사이판 등 남방으로 보내진 위안부는 대부분 슬픈 죽음을 당했다”고 말해, 그 죽음이 ‘남방’ 지역에 한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이 신문이 인용한 “솔로몬 군도에 학병으로 갔던 이호원 씨”라는 이도 “전쟁 초에 남방으로 끌려온 정신대원들은 미군의 공격으로 후송선이 끊겨 ‘정글’ 속에서 군인들과 함께 시달리다 죽어갔다”고 전한다.
난리가 나서 여자들 15명하고 주인하고 애기들 모두 18명이 피난을 갔지. 처음에는 미군들이 마구 폭격을 할 때 일본놈들이 우리를 몰고 다녔지. 주먹밥 해서 주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우리 맘대로 빠져나가라고 그래. 근데 맨 마지막 빠져나가지도 못할 데 데려다놓고 해제를 시켜뿔데. 그때 미군들이 센소칸(잠수함)으로 질 만들어 대니고 그랬거든. 그러다가는 끝판에 가서 맘대로 다 가거라 하니까 나도 산에서 돌아댕기다가 보면 막 폭격을 섬에다 하고는 해서 그때 많이 죽기도 했어. (중략) 나중에는 막 배에서 미국놈들이 섬을 보고 나오라고 손들고 나오면 안 죽인다고 나오라고 배에서 방송을 하면서 뺑뺑 돌았어. 그런데 손들고 나가면 그 뒤에서 일본놈들이 쏴 죽여버렸어. 나가면 오모쨔(장난감)맹으로 놀려먹고 죽인게 우리 손에 죽으라고 쏴부렀어. (중략) 그것 캐러 갔다가 미군들한테 잡혔어. (중략) 노다 섬에서 포로가 돼서 사이판으로 나왔지. 나는 부모 볼랑케 한국으로 간다고 그랬어. 막 흩어지고 죽고 그랬어.(『강제5』, 318~324쪽)
팔라우에 있었던 이 위안부의 증언은 위의 ‘학병’이 본 상황과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위안부의 직접적 죽음의 대부분은 미군(연합군)의 폭격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위안부들은 일본군들과 함께 피신 다니다가 막바지에 개별 행동을 하게 되었고, 함께 있었던 경우에는 ‘항복’을 둘러 싸고 일으킨 갈등이 때로 이들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군의 철칙은 포로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규범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항복을 ‘남성의 거세와 여성에 대한 강간’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여기서 일본군이 ‘오모쨔’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런 의식은 직접적으로는 군부의 선전에 세뇌당한 결과이겠지만, 여성의 신체와 생명의 관리자는 언제고 남성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이 ‘조선인’인지는 불분명하다. ‘항복’하면 포로가 되어 천황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당시의 사고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이렇게 말하는 위안부가 살아 돌아온 것도 그 가능성을 말해준다.
센다의 책에는 위안부들이 기모노를 입고 군인들과 함께 죽을 준비를 했다는 상황도 적혀 있다(156쪽).
일본인 위안부는 조선인 위안부에게 흰 헝겊을 손에 들고 투항할 것을 권하고 자신들은 부상당한 군인들이 마시는 청산가리를 마셨다. 그곳으로 진격해 들어온 중국군인이 세어본즉 그 시체는 7구였다고 한다.(131쪽)
일본인 위안부들은, ‘일본이름’을 갖고 ‘일본인’처럼 행동해야 했던 ‘조선인 위안부’들을 패전의 순간에 ‘조선인’으로 되돌리려 했다.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일본인’에게만 허용된 의무이자 긍지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 확인되는 한 일본군이 패전 직후 조선인 위안부를 무조건 사살했다는 이야기를 보편적인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신을 ‘일본인’으로 믿었던 일부 조선인 일본군처럼 자결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죽음’으로 알려진 사진은 폭격에 의한 것이거나 ‘일본인 위안부’일 가능성이 높다.
패전 직후 위안부를 방치했던 주체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업자였지만, 위안소와의 관계가 더욱 밀접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지에서는 물론 일본군의 보호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패주할 때 위안부와 군인 간에 ‘차별’이 있었느냐고 묻는 센다에게, 군인은 이렇게 말한다.
지휘관급은 마지막 단계가 되어도 그네들한테 꽤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패주하게 되면 군인들끼리라 해도… 인간의 에고이즘이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특별히 전우의식이 강한 사람만 서로 도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155쪽)
전쟁터의 극한상황에서 군인이 조선인 위안부를 버리고 갔다 해도, 그 또한 대상이 ‘조선인’이어서라기보다는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에고이즘’이거나 ‘위안부’ 집단보다는 ‘군인’ 집단을 더 우위에 둔 차별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센다는 다시 전직 군인의 증언을 이렇게 전한다.
전투력의 40퍼센트가 전사할 가능성이 있어도 전투에 이긴다고 판단했을 때는 공격을 발동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60퍼센트라도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작전기획입니다. 병력이라도 그럴진대 81, 82여단이 위안부를 버린 것은 군인으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고 말해도 좋겠지요. 그런 데다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뭔가 식량과 금전은 건네주고 나서 안전지대에 숨어 있으라고 말했을 테니, 오히려 인도적인 조치였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부대 자체가 그 이후에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으니까요. 데려갔더라면 그녀들은 같은 운명이 되었을 겁니다.(158쪽)
센다가 다시 버마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 추궁하자 이렇게 말한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까지 전면붕괴하게 되면 군 자체가 통제되지 않고 병력 파악조차 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명령조차도 말단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보급도 생각을 못 하지요. 위안부만 죽은 게 아니었고, 군인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만약 그 이상의 책임을 추궁한다면, 그 책임은 위안부를 발상하고 전쟁에 데려간 사람한테 있다는 게 되겠지요. 그건 전쟁책임 추궁처럼 한두 사람한테 책임을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162쪽)
아마도 이것이 전쟁 말기의 극한상황 속의 표준적인 진실이었을 것이다. ‘에고이즘’이건 ‘국민으로서의 충성’이건 일본군에 대한 비판은 그 누구보다 ‘위안부를 발상하고 전쟁에 데려간 사람’에게 향해져야 한다.
위안부들의 증언에 나타나는 죽음이나 자살은 패전 때가 아니라 위안소 생활 때의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군인들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패전시 군인들이 조선인 위안부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실제로 위안부들이 얼마나 귀환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앞에 나타난 이들의 숫자가 적은 것은 우리 앞에 나타나야 할 만큼 피해가 컸던 이들인 게 아닐까. 다른 이들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신은 어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귀환 여부는 그녀들이 처했던 상황에 따라 달라졌겠지만,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거나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학살당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 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 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