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는 일본의 전시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했 고, 지금도 존재한다. 지금의 기지촌 여성들 역시 현대의 ‘위안부’이고, 군 대가 존재하는 곳이면 ‘위안부’는어느 곳이건 존재했다.
일본인 위안부들은 이미 “메이지 초기부터 아시아 각지에 존재”(야노 도 루, 41쪽)했고, 그녀들이 일본에서 ‘낭자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메이지 30년대 초(1890년대 말)부터였다(42쪽). 그리고 “러일전쟁 직후의 번성기에 는 수마트라의 메단 부근까지 포함해 6000명의 낭자군이 한 해에 1000만 달러의 수입을 얻었다”(43쪽).
이 무렵에는 “일본이 세력을 확대한 각지에 공창 제도가 이식”(야마시타 영애, 109쪽)되었고, “일본인 예기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속규칙이 영사관령 으로서 제정되었다”(후지나가 다케시, 206쪽). 전국에 적용되는 ‘단속규칙’이 나온 것은 1916년이었는데, 이때는 이미 “수많은 조선인 성매매 관련 업자가 관동주나 남만주 철도 연선 각지에 퍼져”(209쪽) 있었다. 1928년에는 일 본인 창부가 부족해져서, 조선인과 중국인 창기를 고용하고 성병검사를 하 기로 결정했다(207쪽). 하지만 조선인 창기는 1920년대 초부터 이미 대만에 들어가 있었다(206쪽).
○○○ ○○○○ ○○○ ○○ ○○○○ ○○○ ○○○○ ○○○ ○○ ○○○ ○○○○ ○○○○○, 아시아 태평양전쟁기의 ‘위안소’의 최대 공급 원”(110쪽)이 되면서 생긴 존재였다. 그리고 전쟁이 본격화되어 수백만에 이르는 군대가 주둔하고 오지에까지 들어가게 되면서 군인들과 함께할 위 안부로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여성들이 선택된 것이다(업자나 위 안부 자신이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 위안부’가 전체 위안부의 ‘대부분’이라는 게 가능한 일이 었을까. 지역마다 현지의 위안소가 이미 있었고 일본인 여성들이 이미 가 있었다면, 그 자리를 급격히, 또 완전히 메우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까. 한 연구자는 20퍼센트만 조선인이고, 중국 등지의 현지 여성이 30퍼센트, 일 본인이 40퍼센트, 나머지는 그 밖의 지역 사람들이었을 거라고 말한다(하 타 이쿠히코, 410쪽). 실제로 당시 위안소 경험을 한 한국인 남성은 위안소의 “주인들은 중국 사람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 자 등 지원 위원회, 41쪽)이었고 “대부분의 여자가 현지 여자”(115쪽)였다고 말한다. 위안부들 자신도 “(성병 검진하러 가면) 일본 여자들도 많고, 중국 여 자도 있어. 대만 여자, 홍콩 여자, 상해 여자도 있고”(『강제 3』, 102쪽)라고 말 한다. 그리고 수요가 많아지자 이미 진출해 있던 조선인 업자들이 더욱 많 은 조선인 여성들을 모집해 데려간 정황을 위안부들의 증언들은 명확히 보 여준다. 군이나 경관에 의한 ‘강제연행’은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오히려 극소수다.
이들은 본인이 하지 않았어도 중간업자에 의해 이미 포주와의 계약관계 에 있었고, 그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당했다. 대부분의 ‘위안부’들 이버는 것보다더많은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던 것은 그런 결과다.
전체적으로는 이들을 ‘강제로’ 모집한 것도, 이들을 감금한 것도, 생리를 하는 날이나 아픈 날에도 손님을 받아야 하는 식으로 노예화한 것도, 또 임 금을 가로챈 것도 기본적으로는 업자들이었다. “(군인들이) 돈 주고 가면 주 인들이 다 받”(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41쪽)는쪽이 훨씬 일반적인 정황이었다.
면담자 혹시 위안소에서 춤도 추고 그래요?
이서근 아그렇지.
면담자 아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이서근 술도 먹고 노래도 하고. (중략)
이서근 (중략)장교를 상대로 하는 사람들은 일본 여자, 조선 여자하고 주로,대 만여자도 있었는지…? 근데 현지 여자는 주로 병정들이 상대를 하고.
이은두 그럼, 그럼.
면담자 그럼 그냥 중국에서온사람들도 아니고 해남도 여자예요?
이은두 해남도 여자가 중국 여자야. 면담자 그럼막끌어다가온거에요? 이은두 그게다중국 여자야.
이서근 모르지뭐끌어왔는지…뭐끌어왔는지… 뭐.
이은두 아,거사이공도 현지 여자여.
이서근 대부분의 여자가 현지 여자야. 근데 만주라든가 중국에 보면은, 거기는
조선인이 있었어. 거기서는, 비뤼빈에서는 조선인이 있더라구.
이은두 그럼, 더러 있었어. 그것도 비리핀 여자들.
이서근 주로 피리핀이었지. 그리고 사창굴.
면담자 사창, 사창이 있었어요?
이서근 사창 있지.
면담자 나대에도 있었어요?
이서근 나대에도 있지.
면담자 거기 조선인들 있대요?
이서근 글쎄 조선인들은…
면담자 그럼 사창 같은데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이서근 거기 중국 사람들.(같은책, 114~115쪽)
대만의 ‘위안소’ 체험자와의 면담을 기록한이장면은, 이른바 ‘위안소’가 누추한 침대 하나만 달랑 놓여 있는 곳만은 아니라는 것, 장소에 따라서는 ‘현지 여자’가 대부분인 곳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여자들이 전부 ‘막 끌어다가 온’ 여성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해군 징병 1기생이었던 이들이 생각하는 ‘위안소’에는 카페나 요릿집 형태의 윤락시설과 사창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면담자는 그곳에 있는 이들이 ‘막 끌어다가 온’ ‘조선인’ 들일 것으로 전제하고 질문을 하지만, 그런 기대는 번번이 빗나간다. 이들 이“조선 여자가, 조선 여자들이라는게말이지 보기 힘들었”(116쪽)다고말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말은 ‘위안부의 80퍼센트가 조선인’었다는 말조차 의심하게 만들 지만, 이들이 있었던 곳은 전쟁터가 아닌 곳이었으니 전쟁터가 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지역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현지 여자’가 전쟁터까지 따라갈 리는 없었을 터이니 전쟁터에까지 간 것은 ‘일본인’이나 ‘조 선인’,그리고‘대만인’에한한것이었을가능성이크다. 혹은이들이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그런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이 ○○○ ○○○○○○ ○○ ○○ ○ ○ ○○○ ○○ ○○○ ○○○, ○○○○○ ○○○ ○○○ ○○ ○○○○ ○○○○. 대부분은 업자가 인솔해서 갔겠지만, 그것은 ‘왕언니’가 미군의 팀스피리트 훈련지에까지 간것같은 ‘원정’이었다.
‘조선인 군인’들에게는 ‘조선인 위안부’는 ‘비싸’서 이용하기 어려운 존 재였다. “현지 여자는 주로 병정들이 상대”했다는 것은 ‘위안’이라는 행위 가 ‘인간의 상품화이자 계급화’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조선인 위 안부’가 제국 내에서 놓여 있었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인들에게 차별받는 대상이면서도, 그들은 말이 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비슷하며 같 은 ‘동족’으로서 기밀을 지킬 수 있는 존재로서 ‘일본인 위안부’를 대체할 수있는 존재였다.
그녀들이 ‘낭자군’이라고 불렸던 것은 ○○○○ ○○○ ○○○ ○○○○○○○ ○○ ○○○ ○○ ○○○○. “‘애국봉사관’이라는 곳에는 조선인 여 성이 많았”(문태복•홍종묵, 72쪽)고 그런 곳을 포함한 현지 위안소를 조선인 군속들도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같은 책, 74쪽)은 허가를 받아 이용했다. 물론 그들 역시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걸, 사양할 필요는 없어’, 모두가 그 런기분”(기요카와고지•사쿠라이 구니토시, 65쪽)이었다.
○○○ ○○○○ ○○○○○○ ○○○○○○○○ ○○○○○○ ○○. 그것은 그들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순간부터 걷어 낼 수 없게 된 모순이었다. 우리가 ‘조선인 위안부’의 다양한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은 그런 식민지의 모순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2년 일제에 끌려가 중국 옌볜 등지에서 위안부 피해를 당하다 해 방을 맞았다”며 “위안부 생활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다가 2000년 6월 한국을 떠난 지 58년 만에 돌아왔다”고 고백(『한국일보』, 2011. 12. 14.)한 위안부의 말 역시 ‘대부분이 살해당했다’는 우리의 상식에 균열 을일으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이 직접 ‘강제로 끌어간’ 존재이고 그들을 ‘감금’한 것도 일본군이고 모든 군인은 포악하고 모든 위안부는 ‘순진한 어린 소녀’로만 간주하는 일은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위안부 (이른바 ‘매춘부’를 포함)들을 배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피해 자성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은 피해자로서의 욕망이 시키는 일이지만, 표 면적인 모습이 ‘완벽한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 역시 피해자이 고 희생자였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란 한 사람의 조선인 위안부가 그 두 얼굴을 갖 는것은‘식민지화’된순간피할수없는일이었다. 그런모습을있는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한우리는 식민지화되었던 우리 자신, 우리의 과거와 화해 할수가 없다.
‘조선인 위안부’의 증언과 전파에서 과장과 왜곡이 발생한 것은 그런 과 거를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기보다 는 해방 후 50년의 교육이 그런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쳐오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보고 싶지 않고 버리고 싶은 얼굴만을 굳이 확대해 서 보려 하는 일본인들이 늘어가는 중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그들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본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그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거나 거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만 기억하려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의 또 하나의 얼굴을 보지 않 는것은 그들이 그들 방식대로 보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된다.
정대협을 비롯한 한국의 언론이 위안부 문제를 ‘소녀 20만 명의 강제연 행’으로 이해하게 된 근본 원인은 식민지 시대 때 생긴 ‘풍문’—‘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에 있었다. 패전 직전에 일본인들이, 전쟁에 지면 (적군 에 의해) 남성은 거세되고 여성은 강간당한다는 이야기를 믿었던 것처럼, 한국인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믿었던 것이다. 지배자를 ‘강간(정복)하는 남 성’으로, 또 피지배자를 ‘거세된 남성’이거나 여성으로 상상하는 것은 제국 주의 시대엔 흔한 일이었으니 그만큼 국가동원에 대한 공포가 컸다고할수 도있다.
‘식민지화’는 필연적으로 지배하에 놓인 이들의 분열을 불러온다. 그러 나 해방 후 한국은 종주국에 대한 협력과 순종의 기억은 우리 자신의 얼굴 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과거의 다른 한쪽을 망각하는 방식으로 해방 60여 년을 살아온 결과 현대 한국의 과거에 관한 중심 기억은 저항과 투쟁의 기억뿐이다. ‘친일파’—일본에 협력한 자를 우리 자신과는 다른 특 별한 존재로 간주하고 색출하고 비난하는 일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도 그들이 ‘바람직한 우리’에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 ○ ○○○○○ ○○○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 런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냉전 종료와 함께 시작된 세계화는 한일 진보세력의 연대뿐 아니라 세계 와의 연대를 성공시켰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던 그 시간들은 ‘한국인 위안부’와 다른 나라 ‘위안부’와의 차이를 소거 해버린 시간이기도 했다. 세계와 연대하기 위해 이 문제를 ‘여성인권’의 문제로 어필한 결과로, 지금 세계가 아는 위안부 문제에는 ‘조선인 위안부’는 ‘없다’. ‘위안부의 대부분’이 조선인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왜 조선인 위안 부가 많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게된 것이다.
대신 우리는 일본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하는 ‘도덕적 오만’을 즐겨왔다. 그러나 도덕적 오만은 가해자의 수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이 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인정하지 않고 세계를 향해 일본을 비난하면서 얻어진 도덕적 오만은 과연 위안부를 위한 것이었을까. 거기에 있었던 건 그저 과거의 강자를 굴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압박’이 가 능한 ‘강자’로서의확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굴복시키려는 욕망—지배하고 싶은 욕망은, 우리가 아직 굴욕 적인 굴복 경험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천황이 내 앞에 무릎꿇고 사죄하기 전까지 나는 용서할 수 없다”(『뉴스로』, 2011. 12. 13.)는한위안부의 말은 그런 심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2인자로서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를, 혹은 연합군 포로를 학대하기도 했던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면, 우리의 그런 욕망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굴복에 의해 맛본 굴욕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 것은 식민지화의 상처가 만든 왜곡된 심리였 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심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강자주의적 인 욕망에 머물러 있는 한 일찍이 제국 일본이 가졌던 ‘강자로서의 욕망’ 비 판에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강자로서의 ‘제국’에 의해 상처를 입었던 우리가 구 제국(일본) 의 죄를 다른 제국(네덜란드)과 연대해 또 다른 제국(미국, 영국 등 유럽)에게 물어온 방식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우리의 호 소방식은 제국에 저항했던 식민지가또다른 제국과 연대한다는 기묘한 구조 속의 것이기도 하다. 구 제국들이 일본 비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그들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했던 나라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네덜란드 가 인도네시아라는 식민지를 잃은 것은 일본의 점령이 계기가 되기도 했으 니까. 더구나 자국의 여성이 일본에게 유린당했으니 그들이 일본을 비난하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네덜란드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 역시 ‘적’ 의관계였다는 점이다.
더구나 일본을 잠정적으로 적대시하는 담론들은 한국의 군비 증강을 부 추기고 정당화하기도 한다. 군비 증강을 하고 싶어도 ‘우리 민족’인 북한을 향해서는 노골적으로 하지 못하는 관계자들의 변을 뒷받침하고도 있는 것 이다. 그건 위안부 문제에 더 열심히 나선 이들이 군사주의를 비판하는 우 리사회의 진보좌파라는 점에서도 아이러니가 아닐수없다.
일본이 제국주의에 나선 것은 서양을 흉내낸 일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상 은 아시아였고, 말하자면 아시아의 불행은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 이기도 하다. 그건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침략이 되고 말았지만, 일본의 전 쟁의 명분은 서양 제국으로부터의 ‘아시아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결과적 으로 일본은 졌고, 전후 일본과 한국은 함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적 냉 전구조 속에 안주하게 된다. ‘제국’에 대해 제대로 물을 기회도 없이 미국의 주도로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수십 년을 미국 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물을 기회를 갖지 못한 채로 ‘냉전의 사고’를 내면 화하게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