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자/단체 측이 ‘위안부’ 문제 부정론자들과 정부를 동일시한 이유는 그 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책임과 사죄의식이 정부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물론 차별감정과 식민지주의적인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정 부내에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정치가나 관료의 대부분이 ‘전후민주주의’ 교육을 받았고 천황제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한 사람의 국 민으로서 필요한 만큼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반성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경시했다.
우파의 반발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자민당을 포함한 ‘각의양해’ 를얻었다는 것은 자민당 내에도 ‘사죄’의마음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금’의 보상금과 함께 ‘위안부’들에게 전달된 ‘수상의 편지’를 “개인으 로서의 수상”에 의한 편지였고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는 의견(마이크 혼다 Mike Honda 인터뷰)이 적지 않았지만, 그 편지는 ‘수상’이라는 대표성을 띠 면서도 ‘개인’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던 결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실 질적 보상은 하면서도 ‘국가보상’이라는 점을 희석시켜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택된 개인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상이 ‘개인’으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편지였다. 그리고 야스쿠니에 수상이 참배하는 것을 비판한다면, ‘수상의 편지’ 역시 국가를 대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물론 정부의 애매한 태도, 즉 실제 로는 보상의 주체였는데도 그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았던 데에 있다. 그건 1965년의 조약에 저촉되지 않도록 신경쓴 관료다운 태도였다고 할수 있다.
위안부 문제를 위한 일본의 운동은 천황제 비판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사회의 개혁’을 지향하면서 그렇게 정치화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면서 ‘위 안부’ 문제는 실제로는 좌우갈등임에도 한일갈등-민족갈등으로만 나타났 던 것이다. 과거의 인권 문제가 현실정치를 움직일 수 있는 양상이 되면서 각각 정치화되어버린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입법이 어려운 것은 운동이 그렇게 정치화되었기 때 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보수신문인 『요미우리読売 신문』조차 기금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 『요미우리 신문』이 2011년, 기금 은 물론 고노 담화에까지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은, 운동의 성공 은더많은 지지자를 확보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의미에서 운동이 실패했다 는것을 말해준다.
당시 지원자/단체가 천황제 폐지를 향한 ‘일본 사회 개혁’의 지향보다 ‘위안부’ 문제 자체에만 집중했다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강제동원’에 대한 의문을 받아들이면서 구조적 강제성에 대한인 정을 구하고 합의에 도달했더라면, ‘전후 일본’ 또는 ‘현대’의 한계에만 주목해서 좌파 이외의 생각과 사람을 규탄하는게 아니라 전후 일본의 가능성에도 시선을 돌리면서 정부의 대응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했더라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2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