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여야가 합의한 아시아여성기금

일본은 앞에서 본 것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와 보상’을 하게 된다(박 유하, 2005;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오무라 야스아키). 그런데 한국에 서는 그런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혹은 일부에 알려져도 그에 대한 비판이 힘을 얻으면서 일본은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한국 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세계적인 운동을 펼쳐온 것이지 만, 일본에서는 이후 언제까지 사죄를 해야 하느냐는 혐한 감정이 확산되게 된다.

사실 일본의 ‘기금’은 위안부 문제가 발생하자 곧바로, 위안부 문제를 부 정했던 이들의 주장을 억누르고 실시된 보상이었다. 말하자면 기금은 분명 ‘사죄와 보상’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지원단체는 정부의 보상 방식을 단지 일본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만 간주하고 비난했다. 기금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잊혀지고 만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새롭게 법을 만들어 보상하는 대신(즉 국회를 거치는 대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만들어 위안부들에게 수상의 편지와 함께보상금을전달했다. 그런 방식을 취한 것은 과거청산 문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사회당수이기도 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내각을 이끌던 때였는데, 무라야마 내각은 그때까지 자민당이 다루지 않았던 역사문제에 대한 대응을 중요시한 내각이었다. “그러나 의원석 숫자로는 자민당이 사 회당의 세 배를 차지하고 있었던 데에다 내각의 주요한 자리를 거의 자민당 이 차지하고 있었던” 내각이었다. “따라서 참의원이었던 시미즈 스미코淸水澄子가 고노 담화 발표 이후부터 입법을 위해 활동하고 있기는 했지만 의원 입법이 성립될 가능성은 낮았다.”(쓰치노 미즈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 민기금’의 정책과정에 관한일고찰—액터 분석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아시아여성기금’이란 그런 상황에서 전후청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무라야마 정부가 차선책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아시아여성기금은 보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우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일본의 진보, 보수 양쪽의 비판을 받으며 사업을 실시했던 것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각의양해에 의해 설립이 결정되었는데, “각의양해에는 전 각료의 합의가 필요했고, 반대파의 설득이라는 정책 결정에 따르는 난 관은 의원입법과 다를 게 없다. 일반적으로 각의 결정 때는 각료 간에 논의 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료들에 의한 사전의 ‘물밑작업’에 따라 각의에 의 안이 올라갈 때엔 전 각료의 합의를 얻어야 하게 되어 있으며, 각의는 서명 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자민당의 경우 모든 정책은 당내의 정무조사회에서 심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며, 거기에서의 결정은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서 “자민당 각료뿐 아니라 반대파 의원의 합의도 얻지 않으 면 각의양해에는 도달하지 못”(같은 글)하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낸 일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민당 의원의 숫자가세배나 되는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을 위한 입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국회’를 제치고 ‘정부’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기금’이었다. 다시 말해, ‘기금’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만 그 주체가 국회가 아닌 정부였을 뿐이다. 더구나 국회를 통과하기 어려웠던이 유가 꼭 ‘자민당’이 실질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은 ‘기 금’의 성립과 실시에 열심히 나선 이들이 자민당 사람들이었다는 데서도 알수있다.

당사자와 지원단체들은 “연립정권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자민당이며, 시미즈 스미코 등의 여성의원들의 리더십만으로는 법안 제출 은 어려웠다”(같은 글)는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더구 나 발의가 어려웠던 것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던 소위원회에서는 “정말 강 제연행은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격렬해서 논의가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 있었던것으로보인다(‘기금’홈페이지).결국이런문제에관한“정책지식과 발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남성 의원들이 대부분인 소위원회는 실질적인 기 능을 하지 못하고 이름뿐인 위원회가 되었기 때문에 논의가 관저로 가게되 었”(쓰치노미즈호)던것이다.

말하자면 국회입법이 불가능했던 것은, 그저 국회의원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물론 그런 이들이 없었다고 단정하 는것은 아니다). ‘위안부’들이 정말 군에 의해 ‘강제연행’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1965년에 개인보상은 끝났다고 생각한 인식 때문이 국회입법이 되지 않았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