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 검토는 1994년 6월, 무라야마 내각의 발 족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검토의 출발점은, 국가보상을 개인에게 지급할 수없 다는 그때까지의 일본 정부의, 관료, 대장성, 그 밖의 관청 등의 원칙이었습니다. 무라야마 내각이 6월에 성립하자, 당시 외무성은 전후 50년 문제 대책을 위해 준 비 중이었던 ‘평화우호교류사업’안을 받아들여 그 항목을 예산안에 넣을 것을 내각에 요구했습니다. ‘위안부’ 문제 등 개별적인 문제에는 대응하지 않고 교류 사업을 중심으로 10년간 1000억 엔을 사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이 7월 17일 『아사히 신문』1면 머리기사로 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안에 대해 사회당 각 료들이 반발했습니다. 즉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이 없다는 데에 저항한 것입니 다. 관료들이 다시 국가보상을 개인에게 할 수는 없다는 일본 정부의 원칙을 제 시하여 정권 내부에서 격한 대립이 표면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당 정치가, 각료들은 국민이 참여하는 기금을 만들어 ‘위안부’에 대한 보상을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이 사실이 또 8월 13일 『아사히 신문』 머리기사로 보도되었습니다. 「전후보상, 10년 동안 1000억 엔의 평화교류기금 사업, 수상이 결심했다, 위안부 기금 통해 지원」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2일에 수상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측근이 밝혔다는 보도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진행되던 도중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8월 19일의 『아사히신문』머리기사였습니다. 방금 하나자키상이 소개한 “전 위안부에게 ‘위로금’”, “민간기금으로 기금 구상, 정부는 사무비용만, 실질적 ‘보상償い’ 직접보상 피한다”라는 기사가 난 것입니다. 이런 기사가 왜, 어떤 과정에서 쓰여졌는지, 누 구에 의해 쓰여졌는지는 아직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전후50년문제 3당프 로젝트’의 첫 회의도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 방침이 결정되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단계에,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보도를 내보내어 방향을 결정하려 하는 악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민간기금의 위로금’이라는 말이 없어지지 않는 이미지로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부여된 틀과 싸워, 어디까 지 이 틀을 수정할 수 있는지가 정부 안에 있었던 사람들, 사회당계 사람들의 과 제였고 후에 기금에 관여하게 된 이들의 과제였습니다. 그렇지만, 국가보상을 할 수 없어서 국민모금에서 위로금을 내놓는 거라는 설명이 마지막까지 기금의 활 동을 속박했고 그 일이 피해자들의 감정에 처음부터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말하 지않을수없습니다.(와다하루키, 2012, 59~61쪽)
‘기금’의 발기인이자 전무이사로서 오랜 기간 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온, 일본의 전후를 대표하는 지식인 와다 교수의 증언은, ‘기금’이 전쟁에 대한 반성의식이 강한 사회당을 중심으로 만들어 진 정책이었고, ‘전후보상’을 위해 마련한 예산으로 지급될 것이었으며, 따 라서 ‘국가’의 보상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와다는 “국민이 돈을 내는 것은 정부가 돈을 내도록 하는 마중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같 은 글, 62쪽)었다고 말한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내각의 결정에 의해 설립된 재단법인”이었고, “이 법인의 결정과 행동은 내각부와 외무성의 대표자가 항상 감독하고 있었고, 모든 문서는 이들 관청의 검토를 거쳐 작성, 인쇄되 었”다. “즉 정부의 결정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의미에서 정부의 방침을 실 행하는, 그런 재단법인”(63쪽)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단순한 ‘민간기금’으로 오인한 누군가가 아직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지기도 전에 딱지를 붙이고 나섰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제까지 조선반도 출신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 위안부 출신 여성에 대해서는 ‘정부에 의한 개인보상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해오고 있으며, 한 국의 김영삼 대통령도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 때문 에 이번 구상에서는 정부로부터의 비용 지출을 사무관계로 한정, 최대치를 모금 규모 전체의 2, 30퍼센트로 억제한다는 점과 이 모금을 위안부 문제 이외의 전후 처리에도 돌리는 방식으로 종래의 방침을 바꾸지 않고 간접적/실질적으로 전 위안부에 대한 ‘쓰구나이償い’를 실현할수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마이킨見舞金’의 대상이 되는 위안부는 1000명쯤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마이킨’과 함께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의 이름으로 사죄의 편지를 전 위안 부에게 보내는 안도 부상 중이다. 이 구상은 아시아의 청소년 등과의 인적 교류, 전쟁에 관한 역사자료 수집 등 ‘미래지향’의 시책을 중심으로 하는 총액 1000억 엔 규모의 ‘평화우호교류사업’(가칭)과는 별도의 것으로 병행해서 검토 중이다. “‘미래지향’ 시책만으로는 전쟁 중의 반인륜적인 행위의 쓰구나이는 안 된다”고 하는 전위안부들의 강한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정권으로서는 그 불만에 부응해 ‘과거청산’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개인보상이 되지 않는 범위 내의 궁여지책으로 구상을 짜고 있다.(『아사히 신문』, 1994. 8. 19.)
이 기사는 ‘미마이킨’(위로금)이라는 말로 기금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기 는 하지만, 동시에 ‘기금’이 ‘간접적’인 형태를 취한 ‘실질적’ 보상이었다는 사실도 명확히 알려준다. 말하자면 ‘기금’은 1965년의 협정 때문에 ‘개인 보상’은 안 된다는 원칙은 고수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정책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들의 “불만에 부응해 ‘과거청산’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로 만든 정책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정부가 피한 것은 ‘국가 보상’이라는 내용이 아니라 ‘직접보상’이라는 형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와다 교수의 말대로 오해는 깊어만 갔고, 이후 ‘기금’은 지원자와 부정자 양 쪽에서 쏟아지는 비판 속에서 고독한 사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권이 바뀌고 말았지만, 오랫동안 ‘기금’을 비판해왔던 이들은 정 권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민주당 역시 ‘개인보상’ 은안된다는 원칙을 넘어서지는 못했고, 마지막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안 한 것도 ‘인도적 조치’라는 이름의 보상이었다. 전후 처음 이루어진 정권교 체 이후 최초로 수립된 2012년의 정책도 연립정권에 의해 1994년에 만들 어진 정책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은 그것이 ‘국가’의 원칙이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기금’은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이들의 반대에 맞서 만들어진 것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결정이었다. 고노 담화에서 보여 준것처럼, 강제연행을 긍정한 것은 아니지만 구조적인 강제성을 인정한기 구였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비판자들의 목소리에 묻혀 결국, ‘문제의 중요성 을 인지한 양심적 관료’들과 정부의 정책에 호응해 국민모금에 적극적으 로 호응한 일반 국민들의 존재가 한국에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한국 언론 들이 직접 관계자들에게 취재하지 않고 지원단체의 의견만을 보도한 결과 다. 결국 지원단체의 의견만을 전 국민이 공유하면서 20년이 지난 것이다. 2011년의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심각한 국면에 빠져들게 된것 도그런 과정이 만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