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인용했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는 인도네시아의 “암본 섬에서 강 제연행•강제사역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다”(「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워싱턴 포스트』의 ‘사실’ 광고를 비평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강제성은 조선 인여성과는 다른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 ○○○ ○○○○ ○○○ ○○○ ○○○○ ○○○○ ○○○○ ○○○○ ○○○ ○○○ ○○○ ○○○ ○○○○ ○○○○ ○○○ ○○○○○○ ○○○○ ○○ ○○○ ○○○○ ○○ ○○○○. 분명 그녀들 중에는 가난 속에서 ‘흰 쌀밥’을 꿈꾸거나 여자가 공부하는 일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던 가부장사회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 가 되고자 한 이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을 ‘자발적’으로 갔다고 생각하는 것 도있을수있는 일이다.
하지만 설사 ‘자발적’으로 ‘희망’했다 하더라도 그녀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추업醜業’이라고 불리던 일을 선택하도록 만든 것은 그녀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사회적 구조였다. 그녀들은 그저 가난하거나 식민지의 여자거나 가부장제 속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자립 가능한 또 다른 일을 할수 있을 정 도의 교육(문화자본)을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일—직업’이란 집 바깥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을 제공하는 직 업은 설사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해도 사회적•심리적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런 ‘추업’에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향했다면 무엇이 그런 표면적인 ‘자발성’을 이끌어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남성이고 군대이고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이었다. 다시 말 해 ‘위안부’란 어디까지나 국가와 남성, 그리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만드는 전쟁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긴 존재다. 위안부의 자발성이란, 본인이 의 식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와 남성과 가부장제의 차별(선별)이 만든 자발성 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폭탄이 터지는 최전방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며 병사들의 욕구를 받아주어야 했다.
전쟁이 난후 괭이를 들고 우리가 보국구덩이를 팠다. 섬을 돌아다니면서 공습을 피했는데 그런 때 양은칠과 임창수가 나를 들것에 업고 다니기도 했다. 나는 몸 이 회복된 다음에 폭발탄을 날라주기도 했다. 피난 중에도 나무판을 가져다가 칸 만 질러놓고 가려놓으면 물을 떠놓은 대야에 밑을 씻을 여가도 없이 달려들었다. 바나나, 야자, 사사포 나무 등 과일나무마다에 밑에 커튼을 치고 군인을 받았다. 술 먹고 달려드는 군인을 내가 밑이 붓고 몸뚱이가 말을 안 들어서 밀쳐냈더니 칼로 어깨를 쳤다. 어떤 때는 총대로 얼굴을 때렸다. 거기다 걸음도 못 걸으면서 피묻은 붕대 등의 빨래도 해야 했다.(『강제2』, 60쪽)
‘위안부’들이 병사들에게 “단체로 다가가 자신을 팔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 교를 부렸”다거나 “참으로 밝고 즐거워 보여”서 “성적 노예에 해당하는 모 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오노다 히로오)라는 발언을 들면서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이 일에 참여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분명 그녀들 중에는 ‘자신을 팔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교를 부렸’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또그 런그들이 ‘밝게’ 행동하고 ‘즐거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포주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자신의 의지로는 되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위안부들이(물론 그중에는 계약기간의 만료에 따라 돌아간 이 들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도착했을 때의 당혹감과 슬픔과 분노를 지우고 ‘자신을 팔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은 없다. 그 적극성은 포기와 체념, 혹은 그저 살기 위해 자신에게 부여한 트릭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애교를 부리는’ 일이 비참성과 배 치되는 일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녀들에게 부여된 역할이었던 ‘위안’에 충 실하려 했다 해도 그것이 ‘위안부의 고통’을 부정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 ○○○ ○○○○○○ ○○○ ○○○ ○○○ ○○○○○○○ ○○○○ ○○○○○○○ ○○○ ○○○ ○○(『화해를 위해서』). 설 사 “동정을 이끌어내서 돈을 가로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여자”(오노다 히로 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많지 않은 돈을 다 써버리고 후회한 병사 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들을 일본이 식민지배 구조 속에서 병사들을 ‘위 안’하기 위해 동원한 이상 그녀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얼굴로 ‘애국처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그 녀들을 그렇게 만든 일본으로서는 오히려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다.
식민지인으로서, 그리고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 는 ○○○○ ○○ ○○○ ○○○ ○ ○○○ ○○○○, ○○○○○ ○○○○○—○○ ○○○ ○○, ○○—○ ○○○ ○○ ○○○ ○○○○ ○○○○○ ○○○○○ ○○○○ ○○○ ○○○○○ ○○○○○ ○○○○○○○○ ○○. “내지는 물론 조선•대만에서 전쟁터에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같은 글)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 국가가 그런 ‘애국’을 식민 지인들에게까지 내면화시킨 결과일 뿐이다.
같은 위안부들 중에서도 산속이나 섬 같은 오지에까지 일본군을 위안하기 위해 이동한 것은 대부분 식민지 여성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만든 것이 구조적인 것인지 개인적인 선택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무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이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있 었다는 사실을 일본의 ‘애국자’라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물 론그작업이 말할수없는 고통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에 반해, 예외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인 위안부들은 대개 도회 지의 좋은 시설에서 장교들을 중심으로 상대하며 상대적으로 편한 환경을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인 위안부들이더많이 가혹한 환경 으로 가게된이유는, 그들이 식민지의 여성이라는 계급적이고 민족적인이 중차별의 결과로 일본 여성들보다 가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군인들 이그녀들에게서본적극성이란 그런 상황이 만든 적극성이었다.
그녀들이 주둔지뿐 아니라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에까지 갔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위해서건 강요에 의해서건 위험한 장소까지 간 것은 대개는 조선인이었다(물론 일본인도 없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들 의 적극성의 표현일 수 있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가난이었다는 것도 분명 한 일이다. 그리고 그녀들 자신의 적극성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이용해 돈 을 벌려 했던 포주들의 적극성일 뿐이다. 무엇보다 그 대부분은 군의 요청 에의해 이루어진 ‘파견근무’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위안부의 ‘적극성’이란 바로 식민지인이라는 요소가 만든 적극성이었다. 그건, 포로감시원으로 동 원되었던 조선인 군속들이 일본인보다 잔혹(박유하, 2009)했던 것과 비슷한 구조 속의 일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일본이었다.
그런 이상, 그녀들의 적극성과 주체성을 말하는 일이 ‘위안부는 없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진송에서처럼 다이찡에서도 겨울이 되면 한 달에 한 번씩 군인을 받지 않는 날 아침에 일본 병사들 무덤에 풀을 뜯고 향을 꽂고 빗자루로 쓸어주기도 하고 합장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거기에 뼈를 묻은 군인 들이었다. 눈이 오는 추운 때에도 높은 산에 올라가 그 일을 하였다. 무덤을 찾아 다닐 때에는 무덤자리를 아는 사람이 데리고 다녔다. 노는 날에는 피묻은 군복이 나이불을 빨아서 꿰매 들여보냈다.
또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면 환송하러 나가고 돌아오면 환영하러 나갔다. 어 쩌다 시간이 나면 소방대 훈련과 가마니를 세워놓고 창을 찌르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소방대 훈련은 진송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몸뻬 를입었다.(『강제2』, 177쪽)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군인을 위안했을뿐아니라 죽은군 인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다. ‘피묻은 군복’을 빨아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여차하면 함께 싸울 수 있는 훈련까지도 한 이들이 조선인 위 안부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 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할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 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
전쟁터에서의 병사들의 성행위는 국가에 의해 빼앗긴 ‘일상’을 되찾으려는 간절한 갈망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위안 소 이용을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의 성행위”(오노다 히로오)로 정당화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 ‘증거’의 확인은 결국 남성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확인이기 때문이다.
부정하는 이들은 또한 “왜 전후 65년이나 흐른 지금에서야 비난”(기무라 사이조)하느냐며 “역사는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재판할수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이유는 당시의 일본이 위안소 관 리와 이용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른 후그 것이 ‘나쁜’ 일로 인식된다면 6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재심 판’의 대상이 될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재심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생집을 위안소와 똑같이 치부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위 안소는 전쟁과 군인들을 위한 장소였다. 군인들이 쉽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군인’이라는 존재가 폭력에 길들여진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 러 증언들은 그런 폭력 역시 차별의식이 기반에 깔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다. 위계질서에 길들여진 군인들에게 조선인 위안부란 권력을 갖지 못한졸 병이라도 권력을 시험할수있는 대상일수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처럼 한심한 나라가, 무슨 낯짝으로 일본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들이 저질렀던 부끄러운 짓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일본 을 비난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기무라 사이조, 같은 글)는 비난은 위안소의 구조와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야기다. 그들은 또 “피해 망상에만 근거를 두고 있는 한국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일본을 비난”하는 미국을 비난하며 “일본은 진실을 전달해주어야 한다”(같은 글)고 주장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은 일본이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위안 부 문제를 부정하고 일본 정부 역시 문제가 전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기금’ 이후로는 이 문제를더이상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조선이 받았던 고통에 대해, 당한 당신한 테 잘못이 있다고 가해자가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책임’은 어 디까지나 ‘자기 책임’의 주체가 생각해야 할 문제다. ‘조선은 멸망 직전’이 었는데 일본이 구해준 것이라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은 강한 자의 논리일 뿐이다.
설사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갈등 해소는 자신의 책임을 먼저 생각하 는 데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이들은 식민지배를 하게 된 ‘이유’만 강조하고 싶어하지만, 상대방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한대 화는 결국 닫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화에는 상대방의 긍지를 생각하는 상상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죄와 보상은, 이제까지 부정해왔던 이들이 마음을 표현할수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