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부’라는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 시 대에는 그것이 ‘상식’이고 ‘합법’이었다고 말한다.
일찍부터 ‘유곽’을 국가가 허용하여 ‘공창’이라는 공간을 당연시했던 일본이 기본적으로는 남성들만 있는 군대 주변에 ‘공창’을 만드는 일에 특별한 저항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공창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순차적으로 철폐되었고, “유지된 곳은 일본•호주•이탈리아•스페인 등의 국가”(요시미 요시아키, 2009년 여름)뿐이 었다. 당시에는 ‘상식’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공창제도가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했다고는 말할 수 없”(같은 글)다. 게다가 설령 ‘어디에 나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위안소 이용이 문제없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어디에나 존재했다’는 말은 합법성을 주장하려 하지만 그건 어 디까지나 남성 중심의 사고일 뿐이다.
‘법’이란 하나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지키기로 한 약속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법’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동시 대의 사고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일 수 있는 규칙이어야 하지만, 법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정의’의 내용은 늘 달라져왔다. 성매매를 ‘상식’으로 여겼던 건 그것을 더 많이 필요 로 했던 당시의 남성들뿐이다. 식민지에서의 ‘법’이 언제나 종주국 혹은 식 민자 중심의 법이었던 것처럼.
그런의미에서 ‘위안부’들이설령 처음부터 “공창 기생으로 팔렸다”(혼고 요시노리)고 하더라도 그 점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배 구조에서 발생한 문제인 이상 ‘일본의’ 공창 시스템—일본 남성 을 위한 법에 식민지 여성들을 편입시킨 것 자체가 문제였다(물론 그 시스템 에는 조선인 남성들도 기꺼이 가담했다). 그러므로 ‘위안소’ 이용이 “당시에는 허용되었다”(오노다 히로오)는 주장은 ‘위안부’ 문제의 피상적인 면만을 본 발언이다.
‘상식’론또는 ‘합법’론자들은 당시는 ‘모두’ 그랬다는 말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한다. 그러나 ‘모두’란 누구였을까. ‘모두’ 그랬다는 말은 대개의 경우 ‘모두’에 포함되려 하지않은 이들을 빼놓는 경우가 많지만, 무엇보다 ‘모두’라는 말은 개인을 집단 속에 숨게 만든다. 다시 말해 ‘모두’라는 말은 발 화자의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죄하는 식으로 작동 한다. 그런 식의 ‘모두’에는, ‘모두’로 지칭되는 이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본 래의 힘은 사라지고 집단의 ‘폭력성’과 비겁함만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모두’는, 언제나 숫자가 많은 것을 이용해 논의의 주도권을 잡으 려 한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상상을 통해 인류는 전쟁 을일으키고 지배를 정당화 해왔다.
물론 그렇다고 ‘당시에는 상식’이었다는 말에 들어 있는 당혹감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일이라는 의식 없이 저질러버린 행위, 더구 나 ‘법’의 보호 아래에서 한 행동이 훗날 비난받게 된다면 반발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다양한 상황이 있었는데도 비참한 상황만 강조되고 언제까 지고 규탄당하는 일이 심적 부담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또, 비판만 받게 되 면,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 시스템의 생산자가 되지 않고,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을 하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 하다.
하지만 ‘위안부’의 존재를 그저 ‘상식’으로만 여기는 것은 위안부라는 존 재가 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에 대해 사고하기를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대 사람들이 ‘상식’으로 용인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공통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런 구조가 현재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 문이기도 하다. 설사 과거의 일이라 해도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었음을 새 로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나 미래에 우리는 또 다시 변하지 않은 구조 속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다. 각자의 공동체, 남성이나 국가의 ‘상식’에 뒷받침되어 유지된 ‘법’에 근거해또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위안소의 이용을 ‘상식’이자 ‘합법’으로 여기는 사고에는 그 상황에 대 해 수치심을 느끼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여성을 압 도적인 다수의 남성들이 윤간했다는 사실, 한 사람의 인간을 ‘인간’이라기 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처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일본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닐까. 조선인 위 안부들이 ‘존엄성’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 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던 과거의 어느 한때를 수 치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수치를 만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는 데도, 수치스러운 공간을 벗어난 뒤로도 수십 년 동안 그 수치는 온전히 그 녀들의 몫이었다. 수치심은 때로 사람을 자살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렇다 면 지금 필요한 일은 그녀들의 수치심에 대한 상상력이다. 앞서의 소설의 주인공이 동료 군인의 행위나 위안부들에게서 느낀 건 분명 그런 수치심 이었다.
설사 그녀들의 수치심을 상상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이기를 포기하 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었던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던 ‘위안부’들의 고통 자체에 대한 상상은 가능할 것이다. 타자의 고통과 수치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다. 그런 상상력은, 똑같이 ‘합법’적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던 병사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