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최종적으로 30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을 조선, 중국 대 륙, ‘남양’군도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주둔지와 전쟁터에서의 생활이 란, 각자의 고향에서 보냈던 ‘일상’이 상실된 생활이다. 전쟁이란 그런 비일 상적인 세계를 말한다. 비일상을 견디기 위해서는 ‘일상’과 가까운 환경이 필요해지기도 한다. 스킨십을 동반한 성적 욕망이 그러한 ‘일상’ 중 하나임 은 물론이다. 똑같은 성욕 처리라 해도 전쟁터에서의 강간은 오히려 일상 을 벗어난 행위다. 그러므로 ‘강간을 막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한다는 것은 병사의 ‘일상’ 또한 관리해야 하는 ‘군’으로서는 필연적인 발상이었을수있 다. 말하자면 일상과 여성으로부터 격리되어 남성들끼리 생활하게 되는 군 대 시스템이나 전쟁 자체가 이미 ‘위안소’를 필요로 하게 된다. ‘위안부’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구조를 드러내주는 명칭이기도 했다.
일본의 부정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른바 ‘강제연행’설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하지만 위안부를 모집한 중심 주체가 민간인이라 해도, 또 모집하는데에 사기나납치등의수법이횡행하고있다는것을병사들이알고있었다는것 은 상부 역시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이 불법적인 행 위를 막으려 했다 해도 불법적인 수단이 자행되는 시스템 자체를 방기했다 면 시스템을 유지시킨 책임이 군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군이 위안부 모집에서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분명히 군이 ‘직접’ 모집하지 않았다는 것 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밀수품을 막으려는 국가의 태도에 비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군은 이때 소비자가 밀수품을 사지 않도록 밀수품을 막으려 했던 것이지만 정식 관세를 내면 통과시키는 식으로 수입 자체는 허가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은 상품의 품질에 대해 감시하고 불만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직접 관리와 개선에 나설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이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도, 일본군이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는 시스템의 단 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안부’가 임 신했을 때 낙태시키는 일을 맡았던 한 군의가 ‘나는 검사관이라는 무기〓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http:// www.ne.jp/asahi/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그런 식의 일방적 권력의 존재는 군이 시스템을 ‘관리’한 관리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관여’했을뿐 아니라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군이 모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해도 군의 관여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군이 물리적으로 행사한 ‘강제연행’을 글자 그대로 ‘강제’ ‘연행’으로 생 각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강제연행’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행해진 경우 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기든 납치든 업자와 포주들이 ‘강제’적으로 데려가는 일이 빈번했던 위안소를 유지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수요를 창출 한다는 점에서 공범자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살인교사와 비슷한 구조일 수밖에 없고, 그런 시스템을 필요로 한 것이 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군 인에 의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강제’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식민지 에서는 오히려 당연하다. 전쟁터가 아닌 식민지는 아직은 ‘일상’이 유지된 공간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법’이 작동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징병이든 징용이든 구성원의 의지에 반한 ‘강제적’ 모집 행위조차 ‘법’을 통해 이루어 졌다는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식민지에서 무차별적 ‘강제연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행위를 ‘유법有法’화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비일상적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뿐이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온건했고 좋은 통치였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온건하고 좋은 통치란어 디까지나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이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 의 통치가 총체적인 ‘온건통치’였던 것은 일본 국가에 대한 복종이 전제된 공간에서의 일이었다. 정신대 모집은 ‘법’을 적용시켜 합법화하면서 위안 부 모집을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식민지에서의 ‘온건통치’의 임계선이 무너지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 앞에 본 소설과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인도네시아나 중국 등지에서의 납치(수 용)강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전쟁터’이자 ‘국가’ 바깥의 공간 이어서더이상 ‘일상’을 유지하는 ‘법’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 기때문이다.
‘위안부’ 모집에서 업자와 포주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바로 그래서라 고 이해해야 한다. ‘온건통치’의 범주에 ‘자발적으로’ 편입된 이들이 ‘개인 적’으로 불법을 자행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 지 않고(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 을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식민지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건, ‘지배’라는 것이 구조적으로 언제나 저항과 반발을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 문이다. 반체제 ‘사상범’을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유지법’이라는 ‘법’을 작 동시키는 일로 ‘법’망 안에서 가능했지만, 식민지인들을 마구잡이로 ‘연행’ 하는 것은 ‘온건통치’를 표방하는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군의 관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있는 일이 아 니다. ‘제21군 사령부가 위안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내무성에 400명, 대만 총독부에 300명의 여성을 모집해주기를 요청한 경위를 나타내는 자료’(요시미 요시아키, 2007. 5.) 외에도 위안부의 증언과 군인이 남긴 다수의 기록에서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군의 관여는 명백히 드러난다. 모든 위안소가 ‘군이 설치한, 군인•군속 전용 제도’(위의 글)라고 할 수는 없는 경우도 있지 만, 군이 위안소를 필요로 하고 이용한 이상 위안소에 대한 군의 관여를 부 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군이 주체가 되는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 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 은분명하다고 해야 한다.
‘위안부’ 이동에 군이 관여했다는 점을 두고 전쟁터이기 때문에 군이 보 호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메뚜기」는 그 이동이 단순한 ‘보호’ 가 아니었다는 것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일본 본토 와 한반도 사이의 이동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국가의 관리를 받아야 만했다. 따라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여권과 유사한 국가의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인에 대해서는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출국을 ‘21세 이상의 경험자’로 정해놓았지만, 조선이나 대만의 경우에는 그런 제 한이 없었다(요시미 요시아키, 2009년 여름). 이것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것 처럼, 식민지 여성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보호의식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 실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