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 공모하는 욕망들

최근에 나와 주목을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는 한 위안부의 육성을 사용한 ‘위안부 이야기’다. 증언자의 육성을 살렸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창작 이상으로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 소녀가 위안부로 가게 된 계기는, 일제의 공출을 피하려던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자신이 센닌바리千人針를 만드는 공장으로 가서 일하면 아버지가 나올 수 있다고 한 이장의 말이다. 이 소녀가 다다른 곳은 인도네시아의 스마랑. 다른 위안부들의 경우처럼 곧바로 험악한 얼굴의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고통스러운 위안부 생활을 시작한다.

속아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된 이 할머니는 군인의 폭행을 특히 강조하는데, 그중 하나로 아편주사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은 이 애니메이션이 사용하고 있는 증언을 2002년에 채록된 것으로서 인터넷에서 공개하고 있다(http://www.hermuseum.go.kr/bbs/bbsview.asp?stop=3&s_left=3&idx=49). 그 이야기를 읽어보면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우선 그녀는 자신이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소작인을 많이 거느리고 살았던 ‘무남독녀 외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들처럼 가부장적인 여성차별이 아니라 아버지가 ‘왜놈’들이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한 이로 묘사하는 것이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공출에 대한 저항이 문제의 발단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과 다른 위안부들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장이 다 얘기를 했어. 어떻게 해서 내가 끌려갔는지, 고향 사람들은 다 알아. 그래서 날 무시할 사람 하나도 없어. “상황이 다르지. 왜냐하면 그냥 무조건 끌끼간 사람두 아니구. 난 오로지 아버지를 위해서 그래서 갔거든, 가두 공양한다 하구. 사람들은 그 당시 알아, 내 일본갈때. “우리 고향에서 내를 다 알거든. 인자 우리 집안도 잘 알고, 소문난 집안인께. 또 어떻게 해서 갔다왔다는 걸 다 알기 때문에 저 보통 위안부보다는 칭하가 있지.(일본군위안부피해자 e-역사관홈페이지)

그녀가 ‘무조건 끌끼간’ 사람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그 사실이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보통 위안부보다는 칭하’가 있다는 말은, 자신이 일반적인 ‘조선인 위안부’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를 둘러싼 정황이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차이가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긍지를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그런 차이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소녀 조선인 위안부’를 대표하는 존재로 그려질 뿐이다. 그리고 소녀를 보낸 직접적인 주체가 마을사람-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기는 하지만, 증언에 나오는 이야기—소녀가 ‘자청’했다는 사실은 사용되지 않는다.

특히 아편에 관한 이야기에서, 원래의 증언은 아편을 놓은 이가 군인이 아니라 ‘주인’이었다고 말하는데 애니메이션에서는 군인이 주사를 놓은 것처럼 그려진다. 그렇게 되다 보니 ‘주인’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증언에서도 ‘주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때 한 번 뿐이다).

“가서 얼마 안 돼서 남자들 상대 안 할려구 내가 발악하구 하니…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받았는데 피가 죽죽 나구 목간도 못 갔어. 나 살려달라고 그러니깐 나 살려준다면서 그때부터 아편을 놓아주는 기라. 그게 아편인 기라. 그 뒤 아편을 맞고 나면 아픈 데도 모르는 기라, 상대를 해도. 그래 가지고 고만 일요일이나 토요일은 다섯 대씩 아편을 맞았다. “기분 좋은 거는 모르고 아프지가 않아. 처음에는 하루에 한 대 맞구, 나중가서는 한 대 가지고는 안 되거든. 그러니깐 두 대 맞고 일요일, 토요일 날은 다섯 대 맞구. “매일 놔줬다. 인자 주인[이]놔줘. “모르지. 아편주사라는 걸. 내가 중독이 될 때 알았지. 하루 한 번 주던 게, 아침에 주고 저녁에 주고 그러고 이제 주사를 안 주면 아이고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바로 중독 초기라.(일본군위안부피해자 e-역사관홈페이지)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들은 일본군이 아편까지 놓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아편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위안부들의 증언에서도 많이 보인다.

아편을 하는 여자도 있었다. 나이 먹고 몸이 힘들고 속상하니까. 중국 사람 중에는 아편 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편을 팔에 혈관에 맞기도 하고 빨아먹기도 했다. 몰래 중국집에 가서 하는 것이다. 아편은 쌌다. 아편을 빨고 오면 안 아프다고 했다. 아편 기운이 떨어지면 죽어간다. (중략) 그런 언니들이 나중에 돈도 떨어지고 주사를 더 꽂을 데가 없으면 살이 굳어지면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강제 2』, 157~158쪽)

또 아편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중략) 중국인, 조선인 장사들이 몰래 와서 파는 데 나도 한번 찔러보니 세상이 내 세상이여.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중략) 함께 있던 여자들도 몰래 아편을 많이 했어요. 군인들이 찔러줬어요. 들키면 큰일 나지. 군인은 아편을 못 찌르게 돼 있었거든. 군인들이 몰래몰래 찔러줬는데, 같이 아편을 찌르고 그걸 하면 그렇게 좋다고 하면서 여자도 찔러주고 자기들도 찌르고, 그렇게 했어요.(『강제3』, 133~134쪽)

아편은 하루하루의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언에 의하면 대부분은 ‘주인’이나 상인들을 통한 직접사용이었다. ○○○ ○○ ○○○ ○○○ ○○○ ○○○ ○○ ○○○ ○○○ ○○. 아편이 본래 좋은 기분을 만들거나 고통을 잊기 위해 쓰는 것인데도, <소녀 이야기>의 아편 이야기는 그런 문맥을 완전히 소거하고 그저 ‘일본군의 악행’의 증거로만 이야기된다. 물론 이 위안부가 해방 후에 ‘밀수’로 생활을 했다는 것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육성’을 토대로 해 ‘진실’성이 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이런 식의 각색을 거친 이야기는 ‘위안부의 온전한 삶’에대한 이해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2012년에 ‘위안부’ 대신 ‘성노예’라는 단어를 공식적인 명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당사자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자신의 위안부 생활이 ‘성노예’로 말해지는 데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해 왔으면서도 정작 그 명칭이 정착되는 데에는 반대한 것은 의식 여부와는 상관 없이 그 이름이 자신들의 ‘과거’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노예’라는 호칭은 분명 ‘위안부’를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위안부’의 전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그네들이 애써 가지려 했던 인간으로서의 긍지의 한 자락까지도 부정 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소녀 이야기>의 주인공이 증언에서 자신이 일반 위안부와는 출신이 다르다고 강조하는 것도 긍지를 잃지 않으려는 몸짓일 수 있다(물론 다른 위안부들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없지 않다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작품 <소녀 이야기>는 그런 그녀의 ‘긍지’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위안부의 긍지가 주목되는 것은 오로지 일본을 상대로 한 ‘조선인’으로서의 긍지에 한한다. 그러면서도 ‘위안부’에 관해서는 언제까지고 그녀들은 ‘성노예’여야만 한다. 말하자면 ‘민족의 피해’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런 한 그런 이름으로 남아 있고 싶지 않은 그녀들의 ‘개인’으로서의 긍지는 무시되는 것이다.

‘성노예’라는 단어는 위안부들의 또 다른 기억을 억압한다. 그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은 위안부 자신의 기억이라기보다 개념화된 ‘식민지의 기억’이자 우리의 민족주의가 요구하는 기억일 뿐이다.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 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강제1』, 124쪽)

앞에서도 보았던 이 증언은 근년에 가장 활발히 활동해온 이의 증언이다. 그런데, 20년 전인 1993년에 나온 증언집에서 그는, 이 일은 “만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친구 “분순이”가 불러 “따라나 갔”는데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가 보여주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같은책, 124쪽)고 말한다.

그런데 2004년에 교토 대학교에서 열린 모임에서는, 자신이 끌려간 정황을 “열다섯 살”이었고 “일본군의 칼에 위협을 받은 여성이 자신을 불러 감싸안아 끌어갔”다고 말한다. 또 최근 한국의 신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서는 “대구에 있는 집 마당에까지 일본군이 들어와서 끌고 갔다”(『영남일보』, 2012. 9. 14.)고 말하기도 한다. 끌려갔을 당시의 나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일본군에 의한 강압적인 정황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011년 12월에 미국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만나 했던 증언에서는 “열다섯 살때 대만의 가미카제 부대에 끌려갔다”, “군인 방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가 온갖 고문을 당해 거의 죽을 뻔했”(『연합뉴스』, 2011. 12. 14.)다고 말한다. 또 위안부 생활에 대해서는 “말을 듣지 않으면 전기고문도 했다”(『영남일보』, 위의 기사)고 말한다. 하지만 앞의 증언집에 의하면, 그렇게 한 이는 일본군이 아니라 그녀를 데려간 일본인 “주인 남자”였다. 위안소에서 행해진 “전기고문”, 즉 “전화 코드를 잡아빼서 그 줄로 나의 손목, 발목에 감”고 “전화통 손잡이를 마구 돌”리는 행위를 했던 일본인 “주인 남자”는 ‘위안부’뿐 아니라 일본 여자와 조선 여자인 “부인이나 첩도 걸핏하면 두들겨 패”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군인들에게 맞은 적은 없는데 주인에게는 많이 맞았다”(128쪽)고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실제로, 위안부들에게 폭행을 가한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라 그들을 데려온 ‘주인’들인 경우는 적지 않았는데, 폭행의 주체가 그들이었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부의 그런 ‘변화’는 의식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기대가 그렇게 만든 측면이 크다. 증언을 듣기 위해 모인 이들은, 미리 인지된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지식이 보완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랐을 테니까. 한국인이라면, 그 피해가 더 가혹할수록, 더 끔찍할수록, 일본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당당해질 수 있게 되니까, 증언의 장이 어떤 이야기를 요구하는지는 위안부들 역시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에 차이가 난다고 해서 위안부들만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들의 그런 증언을 듣고 싶어했던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이 과거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는 체험이 기본적으로 피해체험인 것은 분명하다. 그 정치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그 체험이 정신적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한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고문과 성적 노동을 포함한 신체적 강제에 더해 생명까지도 ‘일본’이라는 국가에 맡겨진 상태였으니 식민지 체험이 피해 체험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기억을 모두 말살시키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담론은 표면적인 피해 인식 외의 모든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 기억 역시 우리 자신의 과거의 반쪽이라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상처받은 자신만을 기억하는 일은 협력하고 순종한 기억을 배제하고 배척한다. ‘일본군의 잔학성’에 균열을 가하는 이야기들이 위안부들의 증언에 많았는데도 20여 년 동안이나 그런 이야기들이 공식화되지 않은 것은 그런 욕망의 크기를 말해준다.

하지만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등신대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신체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고 하는 심리와 한없이 닮아 있다. 그런 욕구는 때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영원히 안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성형에의 욕구 까지도 만들어낸다.

그러나, 70세가 되어가도록 그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다면, 그건 과거의 상처가 깊어서라기보다는 상처를 직시하고 넘어서는 용기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혹은 우리가 아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보듬는 자신에 대한 사랑 대신 타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더 큰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싶지 않은가. 애국심이 그렇게 발휘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아름다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