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협의 운동이 힘을 얻은 것은 일본의 지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진정어린 투쟁과 따뜻한 인권의식은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한 ‘전후 일본’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의 지원자들의 위안부 이해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지원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해왔다. 물론 위안부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거부할 수 없고 도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속적이었다. 또 그녀들의 선택이 설사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구조적 강제’ 속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녀들의 처지는 노예적이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노예’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위안부’의 ‘자유’를 억압한 주체는 ‘일본’이나 ‘군’만은 아니다. 그녀들을 인신매매 등의 수단을 통해 모집하고 이동시키고 군에 넘겼으며 ‘위안부’들의 노동의 대가인 군표를 가로채는 형태로 관리했던 업자와 포주들이야말로 그녀들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구속한 주체였다. ‘군인’ 이상으로 오히려 더 빈번하게, 더 가혹하게 ‘위안부’의 자유를 구속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업주와 포주들이었다. 임금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상황을 ‘노예’적인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녀들의 ‘주인’은 군인이 아니라 ‘업자’이고 포주였다. 설사 그들에게 군인 이상의 권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위안부’의 주인이 ‘업자’인 건 분명하다.
‘위안부’들은 유곽이나 기지촌에서 일해야 했던 여성들이 대부분 그렇듯, 누군가에게 팔려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빚’과 함께 위안소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으로 그 빚을 갚지 않는 한 그녀들은 그곳에서 나올 수 없었다. 실제로 여러 위안부들은 ‘계약기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계약기간이 다하기 전에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노예’로서의 그녀들의 주인은 그녀들의 관리자인 포주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명, 때로는 수십 명을 상대로 성을 제공 해야만 했던 가혹한 상황을 놓고, 이제까지의 일본의 지원운동은 성의 ‘구매자’만을 비난해온 셈이다. 다시 말해 여성을 상품화해서 착취했던 성의 판매자, 즉 그녀들의 ‘주인’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망각해왔다. ‘위안부’들의 증언에는 ‘일본’뿐 아니라 자신을 팔아버린 부모나 자신을 가혹하게 다루고 또 패전하자 버리고 달아난 ‘주인’에 대한 원망이 적지 않은데도, 지원자들은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위안부’의 참혹한 상황을 만든 책임은 전부 ‘일본군’에만 있다는 인식을 정착시켜버렸다.
‘성노예’라는 단어는 미국이나 유럽 혹은 다른 피해국가를 상대로 일본군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꼭 정당한 싸움이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개념이 정착되면서 결과적으로 세계는 지금, ‘인신매매’의 주체를 ‘일본군’으로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일본인•조선인•대만인 ‘위안부’의 경우 ‘노예’적이긴 했어도 ○○○○○○ ○○○ ○○○○ ○○○ ○○ ○○○. 다시 말해 같은 ‘제국 일본’의 여성으로서 군인을 ‘위안’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공적인 역할이었다. 그들의 성의 제공은 기본적으로는 ○○ ○○○ ○○○○○ ○○○ ○○○ ○○○. 물론 그것은, 남성과 국가의 여성 착취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했지만, ‘일본’ 군인만을 위안부의 가해자로 특수화하는 일은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페미니즘 정신을 바탕에 둔 운동이었음에도 ‘일본’ 비판에 더 무게가 실리면서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남성과 국가와 제국’의 문제로 다루는 일을 어렵게 하고 말았다. 다른 나라 역시 이 문제에서 무죄일 수 없음에도 그들의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 셈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중국이나 네덜란드 등 전쟁 상대였던 ‘적국의 여성’과 본국•식민지•점령지의 여성들이 처했던 위치는 다르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해주거나 ‘간호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박유하, 2009; 하야시 히 로후미, 2010).
한 군의는 “내가 ‘위안부’를 처음으로 본 것은 거류민 여성에게 위생/응급처치 교육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든지, ‘너는 천황 폐하를 일본인과 똑같이 섬길 수 있어서 기쁘지?’ 하는 식으로 깔보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http://www.ne.jp/asahi/ 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일본의 지원운동 방식은 이런 상황과 심리가 보여주는 ‘식민지인의 이용과 차별’의 교묘한 구조 역시 보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부’가 ‘간호사’를 겸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두고 그저 “‘간호사’로 만들어 당국이 연합국에게 위안부의 존재를 은폐하려”(『교도통신』, 2008. 7. 31.) 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정식 군속으로 임명해서 위안소의 존재도 감추는 동시에 함께 돌아갈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같은 기사)이었다고 해석하는 것 역시, 위안부의 ‘동지’성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그녀들은 전시에 이미 간호부로 일하고 있었다.
‘성노예’라는 단어는 ‘조선인 위안부’가 처한 그런 복잡한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한다. ‘동지’적 관계를 직시하는 것이 꼭 ‘일본군’을 면책하는 일은 아닌데도 이 부분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일본의 지원자들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보지 못했거나 한국의 정대협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불리한 사실로만 판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면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어도,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감정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추어진 차별감정을 보기 위해서도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의 다면성은 오히려 직시되어야 했다. 명확하게 보는 일만이 책임을 져야 할 책임 주체와 피해자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지’적 관계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을 고집했던 이들을 무조건 규탄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응답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차별의식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동지적 관계’는 우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지원자 측의 운동가나 연구자들 역시 그런 사실은 눈감았거나 보지 못했고, 조선인 위안부에게서 그저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만을 보려 했다. 그것은, 명확한 ‘굴종’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인 협력을 강요당한 ‘식민지’의 복잡한 구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국가와 제국’ 비판이 앞선 나머지 식민지의 미묘한 심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동지적’ 상황을 그저 예외적인 것으로서 배제해버린 일은 ‘동지적’ 측면에만 혹은 ‘매춘부’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려 했던 이들의 반발을 불렀고, 대립을 심화시켰다. 말하자면 위안부의 증언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은 일, 다시 말해 위안부의 ‘피해’에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외면했던 일은 일본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