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들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로, 만화로, 그리고 노래로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재생산된 ‘위안부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참혹하고 비참한 측면만을 강조하면서 ‘끔찍한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더욱 공고히 해왔다. 물론 ‘끔찍한 피해’ 이야기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이야기들이 위안부의 여러 모습을 총체적으로 그리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단 하나의 위안부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져도 결국 그 이야기들은 위안부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는 증언집의 극히 일부를 반영할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 역시 그런 작품 중의 하나다. 이 작품에는 정신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짚더미 속에 숨었다가 끔찍한 일을 당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이전에도 여자정신대에 대해서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본토나 남양군도에 가서 일하고 싶은 처녀들은 지원하면 보내주고, 나중에 집에 송금도 할 수 있다는 면사무소의 공문이 한바탕 돈 후였지만, 그럴 생각이 있는 집은 한 집도 없었고, 설마 돈벌이를 강제로 보내리라고는 아무도 짐작을 못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은 그게 아니어서 몇 사람씩 배당을 받은 면사무소 노무과 서기들과 순사들이 과년한 딸 가진 집을 위협도 하고 다짜고짜 끌어가는 일까지 있다고 했다.(조남현감수, 41쪽)
“면사무소의 공문”이 돌았다는 건 여기서의 모집이 위안부가 아니라 근로‘정신대’ 동원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몇 사람씩 배당을 받”았다는 것도 ‘배당’이 법적으로 가능한, ‘국민동원령’이라는 법을 이용해 이루어진 ‘정신대’에 관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면사무소 서기’와 ‘순사’들이 직접 간여했다는 것도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사태가 공개적인 모집, 즉 ‘국가동원’ 하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이 상황을 위안부에 관한 사항으로 생각하고 읽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직접 본 이야기뿐 아니라 ‘소문’에 대해서도 쓰고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설마설마 하는 사이에 더 나쁜 일이 생겼다. 그건 같은 면내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소문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동구 밖에서 감춰놓은 곡식을 뒤지려고 나타난 면서기와 순사를 보고 정신대를 뽑으러 오는 줄 지레짐작을 한 부모가 딸 애를 헛간 짚더미 속에 숨겼다고 했다. 공출 독려반들은 날카로운 창이 달린 작대로 곡식을 숨겨두었음 직한 곳이면 닥치는 대로 찔러보는 게 상례였다. 헛간의 짚가리로 창을 들이대는 것과 그 부모네들이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창끝에 처녀의 살점이 묻어 나왔다고도 하고, 꿰진 창자가 묻어 나왔다고도 하고, 처녀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피를 많이 흘리면서 달구지 로읍내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고도 했다.(41~42쪽)
박완서는 이 끔찍한 상황을 ‘실제 상황’이라고 말하는데, 이 일을 당한 처녀의 ‘사건 이후’는 다시 ‘…고 했다’는 식으로 ‘들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곡식’을 찾기 위해 찌른 ‘창’이 짚더미 안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무기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이 상황이 ‘곡식 공출’을 하기 위한 과정에서의 잘못된 판단이 만든 사건이라기 보다는 ‘강제적인 정신대 모집’이 만든 사건으로만 기억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창을 찌른 가해자들이 조선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창자’나 ‘살점’이 강조되는 참혹성에 대한 기억은 이 상황에 대한 분노를 가중시킨다. ‘같은 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서도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듣는 이들은 그녀의 죽음까지도 예상하며 슬픔과 분노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작가가 ‘실제 상황’이라고 말하는 만큼, ‘정신대’를 위안부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사건을 ‘위안부’ 동원의 현장—끌려가지는 않았지만 끔찍한 죽음을 맞은—으로 오해하도록 만든다. 박완서도 아마 당시를 경험한 만큼 ‘정신대’로 가는 것이 성노동을 하는 일인 것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텍스트이기도 한데, 전체적으로는 온건한 내용이지만, 끔찍한 장면이 감수성 강한 중고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는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의 한국에서 결정적인 ‘위안부’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아마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일 것이다. 열일곱 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연행’된 것으로 나오는 드라마의 주인공 윤여옥은 ‘독립 운동가의 딸’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위안부가 된 이들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은 이들이었다는 점에서는 이 드라마는 실제 ‘위안부’의 보편적인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설정은 ‘위안부’에게 바람직한 ‘우리 민족을 대표’시키려는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가난한 농부의 딸보다는 ‘독립운동가’의 딸(때묻지 않은 고귀한 정신을 상징한다)로 설정하는 것이 그녀가 ‘위안부’가 되는 일의 부당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만화가 이현세의 <남벌>(『일간스포츠』에 1993년 7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연재되었다)도 일본군의 ‘위안부’모집을 다루었는데, 여기서의 ‘일본’의 폭력 묘사는 『그 여자네 집』이상의 수준이다. 동시에 일본을 침공하고 정복하는 욕망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폭력을 폭력으로 갚고자 했던 1990년대의 당대의식(『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런 류의 소설이나 드라마, 그리고 만화들도 오로지 ‘하나의 위안부’상을 재생산하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폭 넓은 이해보다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부정적인 인식만을 키우는 이야기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간이 흘러 2012년 봄에서 여름에 걸쳐 방영된 드라마 <각시탈>에서는, ‘강제로 끌어간’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군이 모집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친일파’ 업자를 군이 이용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업자들은 일찍부터 존재했고, 소녀들을 속여서 데려오라고 한 것처럼 말하는 설정은 작가의 상상일 뿐이다. 그들은 꼭 ‘친일파’여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나섰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