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가 20만 명이 있었다고 한다면, 또 그중의 80퍼센트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면, 2012년 현재까지 등록된 234명이라는 숫자는 너무나 적은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해방 때 스무 살이었다고 해도 1991년 시점에서는 아직 60대다. 그렇다면 나머지 ‘위안부’들은 왜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돌아오지 못하거나 이미 사망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돌아왔다’고 한다면, 그 대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비참함과는 조금은 다른 상황으로 자신들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의 기억을 차지했던 것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던 이들이 아니었을까.
거의 10년 전 일이지만, 위안부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혼자 나와 사는 ‘위안부’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개를 키우며 혼자 살고 있었는데, 나눔의 집이 싫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착오로 일본군인과 헤어지게 된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할머니에게 나눔의 집이 불편했던 것은, 그 공간이 사랑의 기억을 품어주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완벽한 피해자’의 기억만이 필요한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들이 아직껏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피해의 기억만이 필요한 곳에서는 화해의 기억은 배제된다. 기금을 받았거나 일본군을 사랑한 위안부들의 이야기는 결코 ‘위안부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대상에서 배제되는 이야기들은 공적 기억이 되지 못한다. 당연히 역사로 남지도 않는다. 그렇게 위안부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의 ‘공적 기억’만을 만들어왔고 다른 기억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과거에 그들을 우리 사회에서 ‘일본 제국의 위안부’라는 일을 담당하도록 고향 밖으로 내몰고, 이후에도 50년 동안이나 그들을 망각이나 차별로 역사에서 배제했던 것처럼 그들을 또 다시 ‘지금, 이곳’의 역사에서 배제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