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는 이어 “어떤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갔는지 알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내놓고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에 걸쳐 각국의 미혼 여성이 위안부가 되었는데, 그중 80퍼센트가 한국인 미혼 여성이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한국인 여성들이 어떤 정황에서 가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설명은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의 다른 여성들과 ‘한국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정황이 모두 같은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조선인 여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반도’ 출신 ‘일본’ 여성—‘제국 치하 국민’의 자격으로 군인에 대한 성의 제공을 요구당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상황은, 일찍이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해외로 돈벌이를 나가야 했던 일본인 여성을 대체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조선 여성’이 많았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지만 우선은 ‘조선’이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여성들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현지 여성보다 ‘조선’ 여성들이 인기가 많았다면 그녀들이 ‘준일본인’일 뿐 아니라 외모에서까지 ‘일본 여성’을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외는 있었겠지만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던 그녀들이 일본옷을 입고 일본이름을 갖고 일본군을 상대했다는 사실은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인 위안부’를 대체한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조선 여성의 임금은 일본 여성의 뒤를 이었고, 중국 여성은 그 다음이었다(『해남도로 연행된 조선인 성노예에 대한 진상조사』). 정대협은 그런 ‘차이’, 다른 지역 여성들과의 근본적 차이를 배제하고 똑같은 피해자로만 설명한다.
‘정신대’는 가난하지 않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여성들도 대상이 되었지만, ‘위안부’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가난한 여성이었다. 성이나 장기나 피 등 신체를 파는 일은 대개는 다른 경제문화자본을 갖지 못했을 경우에 마지막으로 선택된다.
무엇보다, 성노동의 가해자는,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시켜 경제적 자립의 기회를 주지 않고 아버지나 오빠가 물건처럼 팔 수도 있었던 시대, 여성의 소유권을 남성이 가졌던 시대의 가부장제적 국가였다(『화해를 위해서』). 따라서, ‘조선인’이 처음부터 타깃이 될 이유도 없었다.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른 경제활동이 가능한 문화자본을 갖지 못한 ○○○ ○○○○ ○○○○ ○○○○ ○○ ○○ ○○ ○○ ○○ ○○○. 그녀들 중에는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 공장에 가는 여공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사진 5 1944년 9월 3일 중국 윈난雲南성 라멍拉孟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들. 정대협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는 「임신한 조선 일본군위안부」라는 제목의 이 사진에 “일본군은 전쟁에서 패하자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을 그대로 버리고 갔다. 이 중에는 임신한 여성들도 있었다. 이 여성은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설명을 붙여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조선의 미혼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의 타깃이었던 것처럼 말하는 정대협의 설명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이 많았던 것이 식민지의 빈곤과 인신매매조직의 활성화 등 전체 사회구조의 결과라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홈페이지는 다시,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분은 알고 있나요?”라는 질문과 “현지에 버려지거나 자결을 강요당하거나, 학살 당하였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위안부들은 폭격으로 사망한 이들이 오히려 소수이고 대부분은 귀국했거나 현지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중에 일본군의 도움으로 귀국한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도 정대협의 설명은 말하지 않는다.
한국에서의 대표적 ‘위안부’ 사진이라 할 수 있는 임신한 소녀 사진의 설명에서도 “일본군은 전쟁에서 패하자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을 그대로 버리고 갔다”는 설명이 붙어 있을 뿐, 왜 버렸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사진 5> 참조). 중국 이외에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연합군이 포로로 수용했고 귀국한 경우가 오히려 많아 보이는데도, 그런 설명은 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런 질문들이 오직 하나의 정답만을 찾도록 하는 단답형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은 상황에 대해 ‘왜’를 묻거나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질문들은 그저 분노를 키우는 일로 귀결될 뿐이다. 결국,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는 일이, 그렇게 된 구조를 생각하도록 하고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특정 고유명사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저 적대감과 피해의식을 만드는 일에 치중하는 이런 식의 서술이 과거의 잘못을 딛고 이해와 용서와 평화를 만들 가능성은 적다.
정대협 홈페이지의 두 번째 항목에서는 “할머니들이 강제로 연행되었던 장소를 보여줍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동북/동남아시아의 거의 전역에 걸쳐 빨간 점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표시들 중에는 ‘나눔의 집’에 만들어져 있는 조악한 침대만 하나 달랑 놓여 있는 삭막한 위안소뿐 아니라 노래와 춤이 따랐던 요릿집 형태의 위안소도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공창이 아닌 사창들, 즉 허가받지 못했던 위안소도 섞여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붉은 점들을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들이 성노동을 강요당한 곳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사진 6 위안소의 입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청초한 일본 여성’이라는 말은 여성들에게 신체적 위안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까지 요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사 속아서 끌려왔다고 해도 여성들은 국가와 남성의 이러한 요구에 따라야 했다.
홈페이지는, 출입문 왼쪽에는 ‘몸과 마음을 바치는 야마토 나데시코(大和撫子: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을 표현하는 말-인용자)의 서비스’, 오른쪽에는 ‘성전 대첩의 용사 대환영’이라고 쓰여 있는 위안소 사진을 올려놓으면서도, 그런 문구와 ‘강제로 끌려간’ 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사진 6> 참조). 홈페이지는 그저 할머니들의 증언에 “만주로 연행”되었다거나 “중국에 추가적으로 연행”되었다거나 “부산에서 열여섯 살 때 일본군 위안부로 연행”, “집에서 위안부로 연행”되었다는 식으로 전부 ‘연행’이라고 말할 뿐이다(정대협이 2012년에 개관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런 정보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기억’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런 상황이 또 다른 기억을 갖는 일본인들의 반발과 부정을 부르고, 한국과 지원단체들은 다시 그들을 비난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20년이상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정대협이 이런 식의 정보만을 유포해온 것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했던 것처럼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정보가 부족했거나 착각에 의한 부분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오류를 알게 되었다면 그 사실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처럼, 정대협은 위안부에 대한 이해가 바뀐 부분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저 홈페이지의 콘텐츠를 바꾸거나 전시내용을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대협의 인식이 한국의 ‘공적 기억’을 만들어온 만큼, 위안부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다면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