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패전 직후 —‘조선인 위안부’의 귀환

1.‘일본인’에서 ‘조선인’으로

위안부들은 패전 이후에도 대부분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일본군에 의한 학살로 간주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부들의 증언은 위안부들의 현지 잔류와 귀국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어느 날 일본 헌병이 위안소로 와 내일 아침이면 러시아 군인들이 처들어와서 위 안소에 불을 지를 테니 어서 도망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같이 있던 ‘미즈코’와 둘이서 새벽에 도망 나왔다. 그때 다른 위안부들도 다 도망 나왔는데 뿔뿔이 흩어졌다. 나와 함께 나왔던 ‘미즈코’와도 귀향 도중에 인파 속에서 서로 잃어버렸다. 기차에 매달려 타기도 하고, 기차 지붕 위에 타기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걸어서 하얼빈을 거쳐 한달 닷새 만에 개성까지 왔다. 기차에 매달려 길이가 몇십 리나 되는 것같이 느껴지는 굴 속을 지나갈 때면 기차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강제2』, 214쪽)

중국 헤이룽 강黑龍江 부근의 헤이허黑河라는 곳에 있었던 이 위안부의 이야기는 만주에 나가 있었던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귀환 체험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에서는 어디에서 기차를 탔는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대부분의 재만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갑자기 참전한 소련군을 피해지금의 북한 지역까지 걸어서 도망쳤다. 그리고 혹한과 전염병과 기아로 1945년 여름부터 1946년 봄까지 만주와 북한에서만 수만 명의 일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주했던 이들 중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본인 위안부도 조선인 위안부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외지’로 불렸던 일본군의 점령지와 식민지에 나가 있던 일본인들 중 무사히 귀국한 이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서 무려 670만 명을 넘었다. 그들의 귀환 여부와 그 과정은 어디에 있었는지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고, 그것은 당시 ‘일본인’이었던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조선 인일본군들 중 일부는 만주에 있던 일본군과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가 극심한 추위 속에서 강제노동을 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군인 중에도 필리핀이나 남태평양 지역의 섬들에 있었던 군인들은 대부분 전사했는데, 그 지역에 가 있었던 위안부들도 그들과 운명을 함께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가 될 때까지와 된 이후의 상황이 하나가 아니었던 것처럼, 귀국 여부나 귀환과정 역시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방됐는지 어떤지도 몰라. 그러는데 남자가 너희 맘대로 가라고 그러더라고. 돈은 아무것도 안 주고 맨손으로 나왔어. 그래 일곱 명이 백두산으로 걸어나왔어.(『강제3』, 83쪽)

여기서의 ‘남자’란 이들을 관리한 주인 남자이다. 데려온 주체가 업자였으니, 그들의 귀국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업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업자들은 대부분 먼저 도망치거나 ‘해방’의 형태로—‘돈은 아무것도 안주고’ 이들을 방치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귀환 여부가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는 점이다.

많아야 삼 년 있었다는 기억인데, 해방되고 나왔어. 스물세 살 닭띠 해에 해방됐는데, 난 몰랐잖아. 주인도 없고, 참 이상하더라고. 어쩜 일본 군인이 하나도 없어? 우리한테 어떤 한국 남자가 빨리 나오라고 그래요. 몸뚱아리만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전쟁이 끝났다. 집으로 가야 한다고 그래요. 광장이라도 가라고. 광장에 가니까 큰 광장에 한국 여자들이 빽빽한 거야. 위안부가.(『강제3』, 182쪽)

만주에 있었던 위안부의 이 증언은 우선은 ‘일본군의 학살’과는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물론 목숨은 부지했어도 이들의 귀환 역시 순탄했던 건 아니다. 만주에 있던 일본인 여성들은 소련군에게 강간당하거나 끌려가 일정 기간 동안 성노동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인 여성도 전쟁 당시에는 ‘일본인’이었기에 혼란 속에서 같은 피해를 입었던 듯하다.

그런데 소련군이 막 들어와요. 소련군들이 우리를 덮치려고 했어. 나한테 묻지도 말어. 난 정말 그건 말하기 싫어. 그래서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일지도 몰라. 일본 군인보다 소련 군인을 더 못 봐주겠더라구요. 그렇게 더럽더라구요. 막 처 내려오는데.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얼빈으로 가서 들어갈 때처럼 하나하나 돌이켜 나왔어요. 하얼빈에서 100명 이상의 일본군 시체를 밟고 왔어. 얼굴은 새카맣게 하고 농부들이 입는 옷을 허름하게 입고 나왔어. 그러지 않은 사람은 소련으로 많이 끌려갔을 거예요.(『강제3』, 182쪽)

일본군의 위안부였던 이 증언자에게는 일본군 체험보다도 소련군의 참전에 따른 경험이 더 끔찍한 체험이었던 듯하다. 당시, 여성들은 죽은 군인의 옷을 벗겨 입거나 머리를 짧게 깎고 얼굴에 숯검댕이를 발라 소련군의 강간을 피했다. 자신의 ‘기억상실증’의 원인이 그 체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상징적이다. 그녀에게는 위안부 체험보다도 귀환 체험이 더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만주에서의 상황으로 보인다. 일본인 여성들은 소련군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조선인들에게도 방치되어 죽어갔지만, 조선인 여성들의 경우는 일단 한국 땅에 들어선 이후엔 상황이 조금은 나아졌을 것이다.

만주에 있었던 이들은 조금씩 다르면서도 대부분 이와 대동소이한 체험을 말한다.

거기(중국우한-인용자)서 생활한 지 일 년쯤 되어 일본이 투항했어. 그때 죽은 일본 군인도 많았지. 일본 군인들은 한국인과 중국인한테 맞아죽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했어. (중략) 그 집의 주인 내외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여자들끼리도 먹고 살 길이 없어 자기 살려고 각자 흩어졌어. (중략) 같이 있던 여자 두 명은 중국 사람의 첩처럼 살았어. 먹을 데 없고 잘 데 없으니까. (중략) 타국 땅에서 설움이 많았어. 중국 사람들이 기생질했다고 나에게 침을 뱉었어. 여기는 중국 땅이다, 돌아가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나를 위협하기도 했어.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중략) 남의 집에 들어가서 일해주고 먹고살았지. (중략) 내 이름을 이춘도로 바꾸고 중국 국적을 얻었어.(『강제5』, 163쪽)

해방되고 해 안 넘기고 나왔어요. 쫌 추웠지 춥기는. 그래가 미군들 그 코 큰 사람들 배는 한 척밖에 안 왔는디. 그래서 인자 큰 군함이 항꾼(함께) 간다 그래요. 조선으로 엄마한테 간다 해여. 그래서 너두 나도 해보껜 거기서 심지뽑기를 했어요. 일본 군인인가 미국 군인인가 모르겄는디. 그걸 깡통을 들고 와 하나 뽑으라고 그러더라고. (중략) 그래갖고 나만 나오고 그 언니는 못 나왔지.(『강제5』, 198쪽, 중국 한커우에 있었던 이의 증언)

인자 한데 쭉 있다가 일본이 졌다케서. 일본 사람, 높은 사람이 얘기를 해줬지. 일본이 졌으니까 우리는 일본으로 가니까 너희들은 조선 대통령이 새 나라가 됐다고 하면서 가르쳐줬어. 부대에서 기차를 태워줘서 우리는 모두 상하이로 가가꼬 거서 배로 왔지. (중략) 조선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반장이 있거든요. 반장이 도끼이(도해)라고 하지. 몇 번 몇 번 며칠 며칠 되면 1반이 간다 2반이 간다 그래 해요. (중략) 한국 사람들 반장해가지고 잘해주요. 조선 사람들 잘해주요. 반장들이 태와주고. 나올 때도 에로다구요(어려웠다구요). 가딱 잘못하면 못 나와요. 아직 거 살고 있는 여자 있을 끼라. 같이 있는 여자들은 배를 한 배를 안 타니까 흩어지지 어디로 갔는 지 몰라. (중략) 부산서 내려가지고 어릴 때부터 부산 얘기는 들었거든. 부산서 있다가 마산에 걸어갔거든.(『강제5』, 143~144쪽)

이들 역시 업주의 발빠른 도주와 방치를 증언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의 잔류란 이들에게는 먹고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또 귀환 여부는 ‘에로다구요’로 표현되는 근본적으로 탈출이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의 ‘운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본군 ‘높은 사람’이 이들을 학살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에서 기차를 태워”보냈다는 사실 역시 ‘일본군의 학살’과는 다른 증언이다. 그런데 동남아시아 쪽이 되면 상황은 더 극명하게 갈린다.

해방이 되자 위안부 여자들을 다 모아서 근처 수용소로 가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배를 타고 갔는데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인 것 같았다. (중략) 언젠가 귀국할 때를 대비하여 옷과 이불 같은 것을 많이 마련해두었으나 하나도 가져올 수 없었다. 당시에는 일본이 진 것이 기쁘기는 커녕 아득하고 아찔할 뿐이었다. 내 청춘을 바쳐 그렇게 번 돈을 몽땅 쓰레기처럼 버리고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강제3』, 289쪽)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식당 보이러를 팔아달라고 그랬는데 팔아주지도 않고 결국 돈을 못 받았어. 맨날 팔고 돈을 준다고 했는데. 배가 일본으로 나올 전날에 그 보이러값을 가지러 갔는데 쇠사슬을 휘두르면서 나를 협박하는 거야.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 일본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것이요. 그동안 압박을 받았으니까. 일본 군인들이 나를 보고 ‘네창 기치가이(아가씨 미쳤어?) 총갖고 다니는 우리들도 그 사람들한테 못 가는데 돈이 뭐요?’라고 그랬어. (중략) 우리 여자가 한국에 나올 적에는 쉽게 나왔어. 부대에서 간호원처럼 있다 나온께로 딴 사람들은 여러 달 걸렸지만. 일본 군인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 거요. 나도 그 배를 탔지.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도 못하고.(『강제3』, 233쪽)

중국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현지인들에게는 ‘적’의 관계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 중엔 스스로가 위안소를 경영하는 업자가 된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일본의 패전이란 우선 그동안의 자신의 위치와 재산을 잃는 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있었어도 ‘간호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일본군과 함께 쉽게 빠져나온 경우도있었다.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 못 한 것은 일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돈을 벌었던 경우에도 이들은 모은 돈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그건 그들이 일본의 점령지에 나가 있었던 결과로 일본과 함께 현지에서 쫓겨 달아나야 했던 ‘준일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가난’은 업주들에게 노예같은 착취를 당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패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식민지나 점령지에 나가 있었던 일본인과 조선인 등 ‘일본 제국’의 구성원들은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전을 맞아 대부분 몸만 빠져나와야 했고, 돌아온 각각의 ‘조국’에서 오랫동안 차별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 부분이 (일본인, 대만인과 함께) ‘조선인 위안부’가 중국에 있었던 위안부와도, 다른 동남아시아에 있었던 위안부와도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부분이 기도 하다.

이제 생각하니 태국의 방콕이라고 기억나네. 거기서 몇 개월 있었어. 일본 군인과 군속이 인솔하여 방콕에서 걸어나와서 부둣가에 가 있으니까 일본 가는 배가 왔어. 쪼맨한 배 타고 나와가지구 거기서 또 큰 배에 옮겨탔어. 일본까지 타고 온 배이름은 생각 안 나. 우리를 배에 싣고 요코하마로 왔어, 일본 사람이 데리고 왔어. 요코하마 와서도 미군을 봤지. 시코쿠 전쟁범인들만 집어넣는 데로 왔어. 한국 여자는 나하고 셋이 왔어. 그 외엔 전부 일본 사람들이야. 거기 오니까 한국 여자들이 붙들려서 많이 와 있대. (중략) 해방된 다음해 초에 (한국에) 왔어. (중략)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일본에서 부산까지 타고 온 배가 미국 배야. (중략) 내가 나올 때 여자들이 한 30명 나왔어.(『강제3』, 313쪽)

버마의 양곤(랑군)에 있다가 전쟁 막바지에 폭격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했던 이 위안부 역시 일본군의 안내로 일본까지 왔다가 귀국한 경우다. 이들이 ○○○○, ○ ○○○○ ○○ ○○○ ○○ ○ ○○○ ○○○ ○○○○ ○○ ○○○○ ○○○ ○○○ ○○○○○ ○○○○. 그건 설사 그들이 가혹한 성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라고 해도 ‘제국의 일원’이었던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