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소에서 —풍화되는 기억들
센다의 책에 등장하는 한 군인은, “옛 북만주의 쑨우孫呉”라는 곳에 있던 “대소련 병참기지로 일본인이 만든 마을”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군대용 위안소가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숫자는 사단 군인 2만 명에 50명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민간인 관리인이 있었습니다. 군은 영업에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들에 대한 관리는 위생 면에서는 군의부 후방 관계 군의가 하고 있었습니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하고, 화류병 환자를 발견하면 각 연대의 주번사령을 통해 각 부대에 통지하고, 그 위안부에게는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즉 관리권은 군이 갖고 있었습니다. 간접관리였지만, 군으로서는 성병을 가장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요?(64쪽)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만 명에 50명 정도라는 숫자는 위안부들의 생활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육군 소위였다는 다른 군인은 이렇게 말한다.
위안소는 바왕청覇王城에 큰 것이 있었고 카오청현考城縣에 출장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왕청은 통과하는 부대가 많은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대규모 위안소가 필요했던 거겠지요. 카오청현의 위안소는 현지 주둔부대용이 고 위안부 숫자도 적어서 각 부대별로 날짜를 정해 이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긴 경비주둔, 특히 우리처럼 시간이 정해져 있는 미군 비행기의 공격에 대비하는 부대는 그 시간만 지나면 한가합니다. 고참병은 요령 좋게 외출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중략) 게다가 오랜 주둔생활 기간에 같은 위안부들과 지내다 보면 부인 같은 느낌이 되는지 군인들도 그렇게 허겁지겁 욕망을 채우려 하지만은 않게 됩니다. 언제라도 할 수 있다는 식의 분위기였지요. 그래서 그녀들은 주둔부대의 일원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또 장식품이라고 할까, 위안부가 없는 주둔부대는 과자를 갖고 있지 않은 아이처럼 폼이 안 난달까,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녀들을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위안부들도 그에 부응해서 휴일에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선물을 가지고 와서 빨래를 해주거나 진지 옆에서 기관총을 손질하는 군인 옆에서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거나 꽃을 꺾거나 하기도 했는데,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노래하니 평화로운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군인들도 (위안부들에게) 점심을 먹이거나 하고 있었습니다. 주둔지에서의 군인과 위안부 관계는 어디든 이런 게 아니었나 합니다. 하긴 빨래야 군인들은 초년병 때부터 훈련을 받아 익숙해져 있으니 (술장사하는) 여자들보다는 더 잘했지만요. 다만 그런(그녀들이 빨래도 해주는) 성의를 기뻐했습니 다. 하긴 조선인 위안부 쪽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는지 빨래를 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65~66쪽)
‘주둔부대의 일원’이자 ‘부인 같은 느낌’이었다는 위안부들. 사실은 이것이 조선인 위안부에게 요구된 역할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군대에 투입되어, 회사에서 일하는 남성을 여성이 집에서 일하며 다시 회사에 나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군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거기에 필요한 갖가지 보조작업을 하도록 동원된 것이 위안부였다. 그런 의미에서도 전쟁터에서의 강간의 대상이 된 ‘적의 여자’와 위안부는 군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가족과 떨어져 전방에 나가 있는 군인들을 ‘부인’처럼 신체적•정신적으로 위무하고 사기를 북돋는 역할, 그것이 위 안부들의 원래 역할이었다. 위안부들이 군인들과 휴일의 ‘평화로운’ 한때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호원도 배운다고 배왔지. 미국 사람이 뭐시가(비행기가) 오는 거 같으면 총도 맞추면 이것 배우고. 이것저것 배우고 호다이(붕대)를 갖다가 어디 맞으면 어떻게 감으라 카는 거 그거 연신 배와주고 놀 여개가 없어요.(『강제5』, 139쪽)
거기가 일선이라도 군인들 큰 전쟁 나가서 돌아오면 기모노 입고 에프론 하고 고쿠로사마데시타(‘수고하셨습니다’) 인사하고 보통 때는 몸뻬 입고 안 그러면 스카트 같은 거 입고. 기모노는 겨울거 여름거 봄거. 도시 가서 돈 주고 사야지. 인기까이(원문에는 괄호 안에 ‘송별회’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연예회’[여흥을 곁들인 술자리]의 잘못된 일본어발음일 가능성이 크다-인용자) 같은 거 하거든요.(같은책, 140쪽)
조선인 위안부가 한 일은 성적 욕구를 받아주는 일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호도 붕대감기도 배웠고 심지어는 총쏘기(총조립하기?)까지 배워 군인들과 함께 전쟁을 지탱했다.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면 ‘기모노에 에프론’ 차림으로 맞아들이고 축하연에 참석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대동아전쟁 나고 거기 있는 여자들이 다 훈련받았지. 아침이면 다 나와서 모두 체조하고, 군대식으로 똑같이 훈련받았지. 신작로 운동장에서 훈련을 달 반은 받았어. 수류탄 던지는 거 그거는 거 부대서. 부대서 거기서 훈련시키는 사람 있어. 훈련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지.(같은책, 140쪽)
이것은 전쟁 발생 이후의 상황인데, 후에 다시 보겠지만 위안부들이 처했던 상황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달랐고 전선인지 후방인지에 따라서도 달랐다. 또한 어떤 군인을 만났는지에 따라서도 달랐다. 물론 그 어떤 경우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 불행한 상황이었다는 본질적인 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안부의 그런 다양한 모습을 보지 않고는 결코 위안부의 총 체적인 면모를 포착하지 못한다.
한 일본인 위안부의 이야기는 ‘위안부’와 군인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위안부가 될 때, 전쟁터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이런 몸이 된 나도 나라를 위해 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전선의 위안소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후방 병참기지에 있게 되면 점차 생활에 익숙해진다고 할까 지쳐버리거든요. 왜냐하면 전방에서는 군인들과 먹는 것도 같이 먹고 본인들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도 그런 그들을 진짜로 위로해주려고 생각했지요. 군인들도 우리를 보면 ‘수고가 많네’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후방으로 가면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예요. 장교나 하사관들 중엔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요.(센다가코, 81~82쪽)
즐거웠던 일은, 글쎄요. 내 경우에는 역시 시코쿠四国 사람을 만났을 때였어요. 그것도 아이치愛知라든가 마쓰야마松山라든가, 고향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기뻤지요. 군인들도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성관계를 빼고 고향의 축제나 산이나 강얘기를 같이 하곤 했어요. 군인들도 그걸로 만족했지요.(같은책, 82쪽)
이렇게 ‘위안부’를 둘러싼 상황은 전방인지 후방인지에 따라 달랐을 뿐 아니라 상대에 따라서도 달랐다. 자원한 ‘위안부’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이 군인의 ‘위안’—‘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것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몸’이 되었다고 자기 자신을 비하해야 할 만큼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받아온 그녀들에게는, 군인을 상대하는 ‘위안부’란 처음으로 자신의 앉을 자리를 ‘양지’에 내받은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 ‘위안’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 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센다는 “속아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이렇게도 쓴다.
그녀들이 부대를 따라 행동할 때는 양복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양복이라고 해봐야 면원피스나 투피스였다고 한다. 그런 복장으로 특별한 날에 입는 옷이나 자신의 일상용품들을 넣은 트렁크를 들고 군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습지대 같은 곳을 걸을 때 혹은 강을 건널 때는 훈도시(남성용 속옷-인용자)만 걸친 군인 옆에서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건은 군인들과 똑같았던 것이다.(89쪽)
센다가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러한 광경에 근거한 것이리라. 센다가 말하는 정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사진도 실제로 남아 있다(33쪽 의<사진 2> 참조).
직업군인이었던 어떤 이는 중국인 등보다 조선인 위안부들을 더 많이 모집한 것은 그녀들이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적에게 통보하거나 군사정보를 흘리는 일이 없었”(121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선인 위안부’는 그렇게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점령지/전투지의 여성들과 구별되는 존재였다. 말하자면 일본군과의 기본적인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식민지가 된 조선과 대만의 위안부들은 어디까지나 ‘준일본인’으로서 제국의 일원이 었고(물론 실제로는 결코 ‘일본인’일 수 없는 차별이 있었다), 군인들의 전쟁 수행을 돕는 관계였다. 그것이 ‘조선인위안부’의 기본 역할이었다.
1945년, 600명의 군인들이 주둔했던 남방의 섬에 ‘스무 명의 위안부’가 도착했을 때를 한 군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군인들의 그때의 기쁨이란 전쟁이 끝나고 내지로 돌아갔을 때 이상이었습니다. 행위 자체를 기뻐한 게 아닙니다. 일본의 향기를 가진 여자를 살아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기뻐했던 겁니다. (중략) 조금 피로한 기색이기는 했지만, 젊은 일본 여성들이 방문해준 겁니다. 장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병사들의 기쁨도 더할 나위가 없었지요. 출격을 눈앞에 둔 전우들 가운데에는 소리내어 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중략) 비가 제 등을 때렸습니다. 한창 하는 도중에 문득 내지 생각이 나면서, 이러고 있는 우리의 존재가 웬일인지 무척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끝나고 나서 방을 나오는데, 여자가 누운 채로 “멋지게 죽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뒤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여자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겠지요. 베개 옆에 여자의 옷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는데, 맨 위에 부적주머니가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전쟁터에서 위안부를 안은 건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고 이때 한 번뿐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일에 신경쓸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군도 이제 방어전을 하느라 필사적인 상태였기 때문입니다.(181~182쪽)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역할. 말하자면 ‘위안부’에게는 신체적 ‘위안’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까지도 요구되고 있었다.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 ○○○○○○ ○○—○○ ○○○ ○○ ○○ ○○○ ○○○ ○○○○ ○○ ○○○ ○○○○○○ ○ ○○ ○○ ○ ○○ ○○○○○○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조선인 일본군’이 그랬듯이, ‘애국’의 대상이 조선이 아닌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딜레마를 잊고 눈앞에 주어진 ‘거짓 애국’과 ‘위안’에 몰두하는 것은 그녀들에겐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본군과의 연애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은 그런 딜레마를 안을 것을 포기한 이들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혹은 어리면 어릴수록 일본인의식이 강했을 터이니 딜레마로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이 훨씬 많았을 수도 있다.
센다가 인터뷰한 어느 업자는, 자신이 데려갔던 이들이 빌린 돈을 다 갚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을 때에도 그 일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응모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몸이 된 나도 군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몸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네들은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로워져서 내지에 돌아가도 다시 몸 파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군인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돈도 벌고 싶었겠지만요.(26쪽)
물론 이것은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다. 그러나 ○○○ ○○○ ○○ ○○○○○ ○○○○○ ○○ ○○○○ ○○○ ○○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에 위안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기도 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사유리’(작은 백합), ‘스즈란’(방울꽃), ‘모모코’(복사꽃) 같은 일본이름으로 불렸다(후루야마 고마오, 「하얀 논밭」, 12쪽)는 것도, 식민지인이 ‘위안부’가 되는 일이란 ‘대체 일본인’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진 3 ‘제국의 위안부’는 신체적 ‘위안’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까지 요구받았고, 그 ‘애국’의 대상이 일본이 었다는 데에 ‘조선인 위안부’들의 딜레마가 있었다. 1939년 8월 스좌장石家莊의 요리집(위안소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코쿠 쇼쿠도愛國食堂’을 찍은 이 사진에는 “병사들의 출신지가 제각각이어서 각 향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으니, 이름하여 ‘아이코쿠 쇼쿠도’. 고심 끝의 작명이었을 터이다. 희한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젊은 중국인의 눈”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다무라 다이지로田村泰次郎의 「춘부전春婦伝」이라는 소설의 첫머리에는 군대의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위안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향집이 가난”해서 “선수금에 팔려 위안부가 된” 이들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래 있었던 톈진天津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를 희망하여 군대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다. 모두 일본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이 탄 것은 트럭 15대 가운데 “앞에서 다섯 번째 트럭”이었다.
하루미(주인공 조선인 위안부-인용자) 등이 새로 옮겨온 집은 성내 북문 가까이에 있었다. 민가를 개조한 집인데, 위안쯔院子를 중심으로 그녀들의 방이 있었고, 바깥에는 ‘히노데칸日の出館’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여자들은 이전부터 있던 여자들을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 세 집 건너 이웃에 ‘기미노야君の屋’라는 집이 있었다. 여기에도 여자들이 네명 있었다. 이 정도 되는 여자들이 이 현성을 중심으로 하는 이 부근 일대를 경비하는 1개 대대의 군인들을—1000명에 가까운 욕망으로 넘치는 젊은 군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춘부전」, 112쪽)
이 소설은 ‘위안부’들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이동할 수도 있었다는 것, 이동은 군인이 맡았다는 것, 군은 이들을 군부대가 주둔하는 ‘같은 시’ 다른 지역에 있는 ‘여관’이라 이름 붙은 위안소로 이동시켜주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일본군’의 깊은 관여/관리 사실과 함께 위안부의 ‘자유’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들 ‘열 명’이 ‘1000명’을 상대해야 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들의 ‘위안소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그리고 일본인 위안부들은 ‘장교’나 ‘어용상인’이나 ‘국책회사의 간부’들을 ‘비단이불’에서 상대하지만, 조선인 위안부들은 “전선의 흙과 진흙으로 만들어진 주민들의 집의 온기도 없는 안페라(인도네시아 지역의풀-인용 자) 바닥”이나 “더 전방인 진지의 초소가 있는 토치카” 안에서 “빈대에 물리면서, 때때로 적의 공격에 떨면서, 하급 병사들의 고갈되지 않는 왕성한 욕망에 응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춘부전」은 ‘병사’에게 호감을 갖고 마지막에는 함께 죽는 위안부를 그리고 있다. 실제로 위안부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자살 소동을 벌이는 군인이 없지 않았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위안부’로서의 가혹한 생활 속에서도 연애는 존재할 수 있었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군인들은 난폭하고 삿쿠(콘돔-인용자)도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얼굴, 옷, 신발 등이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전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은 다소 온순하고, 이제 자기는 필요없다고 잔돈 부스러기를 놓아두고 가기도 했다. 전투에 나가면서 무섭다고 우는 군인들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정말 살아서 다시 오면 반가워하고 기뻐했다. 이러는 중에 단골로 오는 군인들도 꽤 되었다. “사랑한다”, “결혼하자”는 말도 들었다.(『강제1』, 53쪽)
속아서 간 경우건 자원해서 간 경우건 ‘위안부’의 역할은 근본적으로는 이런 것이었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머나먼 전쟁터에서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을 ○○○·○○○○○ ○○○○ ○○○ ○○○○○ ○○. 그 기본적인 역할은 수없는 예외를 낳았지만,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요구된 ○○○ ○○○○ ○○○ ○○ ○○○○, ○○○ ○○○ ○○○ ○○○ ○○○. “하루이틀 전쟁하면, 저 산비탈에 갈 거 같으면, 중국 여자들 있으믄 강제적으로 옷을 벗겨갖고 참 누워 자고 그란다고. 군인들이 저거가 그랬다고 그러지. 그럼 불쌍하게 중국 여자 그랬냐고 그러지. (우리에 대해 서는) 무조건하고 옷 벗기고 그러지 않지”(『강제 5』, 133쪽)라는 말에서처럼, 중국인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에게는 명확히 다른 존재였다.
그래서 위안부들은 말한다. “진송처럼 촌구석의 군인들은 이동이 잦지 않아 위안부와 군인들 사이에 인정이 싹틀 수 있었다”(『강제 2』, 173쪽)고. 위안부의 상황은 그렇게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이케다는 나를 불쌍케 여겨주고 참 귀여워해줬어. 몸두 마음대로 안 거스그하고 그냥 옆에서 가만 누웠다 가고. 좋은 사람도 있어.(『강제3』, 228쪽)
거기에 내 애인이 있었어. 좋아하는 사람이. 일본 남자 소쬬야. 구마모도 시미즈라고 그래. 나는 그걸 몰랐었어. 근데 내가 막 인자 후큐슈 가니까 아 뱃머리에 나 왔드라고. 배를 타고 막. 우리는 큰 배에 탔는데 뽀드를 타고 막 그때만 해도 “마보우, 마보우” 하는데 얼매나 반가운지. 허허 그때만 해도 반갑드라고 아주. 허허. “오도록 부탁을 많이 했다, 오라고 부탁을 많이 했다”고 그래. 헌병한테로.(같은 책, 110쪽)
이렇게 말하는 위안부는, “자꾸 배신감이 들어”라면서도 “지금도 이 사람이 안 잊혀져”라고 말한다.
복숭아꽃 필 때 기헤이가 말 타는 병이거든. 우리를 이쁘다고 말 태와갖고 말을 쫓아버려. 그럼 난 말 그 위에 올라앉아 가지고 죽는다고 소리지르면 말이 더 놀라서 뛰네. 사진도 많이 박혔는데 한국 나오면서 다 내삐렀어. 그거 놔두면 문제 될까봐. 그 일본 사람도 우리도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도 흉을 잡을라면 한이 없고, 그 사람한테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 또 입었고. 지는 사람이 문제야. 이기는 사람이 문제지. 쪼끄만 사람이 할수 없었잖어. 우리가 졌으니께. 일본놈도 좋은 놈도 있고 하고 하잖어.(『강제5』, 43쪽)
일본놈들이 그땐 막 별걸 다 갖다주는기라. 먹으라고. 근데 오는 거 보니 간즈메(통조림)랑 과일이랑 별거, 그땐 계란도 귀해서 계란도 가지고 와서 막 삶아주고, 먹고 일어나라고. 파인애플도 사주면 가지고 와서 막 따놓고 옆에 떠억 긴 칼 차고 저 구석에 앉아갖고 날 치다보고 앉아서 그걸 먹으라고 보네요. 그러믄 난 못 먹는다고 안 먹었어. (중략) 그랬더니 스기야마 군죠가 날보고 시영딸로 하자고, 올라오더니 밥 먹어, 밥 먹으면 한국에 보내줄게. 내가 보내줄게 지발 밥 먹으라고. 어떤 때는 또 시금치죽, 계란죽, 그거를 좋은 죽이라고 또 끓여 올려 보내주 네. (중략) 그때가 추어(추웠어). 막 벌벌 떨고 침대도 거기는 불 때는 데가 없어. 중국은 모포나 그런 거나 덮고 침대에 참 추워. 근데 거기서 인자 두르고 있으면 올라와서 추븐강(추운가) 올라와 보고 또 가고. 나스면 내꼭 보내주꾸마 했어.(같은 책, 39~40쪽)
물론 이런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기억일 수밖에 없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 ○○○○ ○○○○ ○○○ ○○○○○○ ○○○○ ○○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녀들에게는 소중했을 기억의 흔적들을 그녀들 자신이 “다 내삐렀”다는 점이다. “그거 놔두면 문제될까봐”라는 말은, ○○ ○○○ ○○○○ ○ ○○○○○ ○○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이후 내내 그렇게 ‘기억’을 소거시키며 살아왔다.
그 부대의 제일 높은 사람의 취사병이었던 한 군인은 나를 무척 좋아하여 대장들에게 식사를 해주고 남은 오징어, 쇠고기, 우렁 등을 ‘덴뿌라’로 만들어 중국인애 들을 시켜서 하루 한 번씩 나에게 보냈다. 심지어 달걀, 빨랫비누, 세탁비누, 흰사탕까지 보내주었다.(『강제2』, 174쪽)
그녀들은 그런 기억을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물건뿐 아니라 기억까지도 한 번 발화된 이후로는 우리 사회에서는 “내삐러”져왔다. 말하자면 그녀들이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버리는 것은 그녀들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다. ‘문제’삼을 것으로 여겨진 ‘사회’의 억압이다. 그건 그녀의 기억들이 ‘피해자로서의 조선’에 균열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는 무의식적 양해사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안소의 고통을 잊게 해주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기억들을 무화시키고 망각시키는 것은 그녀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일본군이 그저 성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짐승 같은 존재들로만 살아 있는 것은 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군인들에게 당한 고통을 말하면서도 또 다른 군인들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쁜 군인은 말도 못하게 나쁘지만 좋은 군인은 같이 울기도 하고 자기들도 천황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강제 2』, 57쪽)는 증언이야말로 위안소의 실태에 가장 가까운 것이리라. 그런데도 이 20년 동안 “어떤 군인은 달려들지 않고 젖통만 만지다가 가는 애들도 있었다”(56쪽)는 기억은 그저 묻혀 있어야 했다.
그 사람들은 뭐 저거 쌍시런 그런 거 취해서 오는 기 아니라 서로 얘기하고 놀고 그럴라고 저그 마음 위로하고 할라고 오지. (중략) 그 장교들은 잘 (관계) 안 해요. 저기 모미(몸) 생각해요. 고향의 처자들 고향의 마누라들 생각나는지 얼마나 그런지 앉아 운당께. 마누라 생각에. 그 부부간에 그렇게 정 말고도 자기 마누라가 눈에 선해가 남의 여자하고 잘 안 할라 그래요. 어떤 거는 그냥 가요. 그래도 자주오지. 위로받고 놀고, 술 먹고 얘기할라고 자주 오지. 육체는 안 하는 사람이 쌨어요.(『강제5』, 36쪽)
앞에서 언급한 미국 정부 전쟁정보국OWI이 전시에 포로로 보호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관해 작성한 보고서(「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는, “버마 전선의 일본군 소탕작전에서 포로가 된 20명의 조선인 위안부(Korean Comfort Girls)와 민간인 일본인 부부”를 대상으로 “1944년 8월 20일에서 9월 10일에 걸쳐” 벌인 심문 결과를 담고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일반 병사들은 여기 오는 것을 누가 보는 것—특히 줄서는 일을 수치스러워 했다. 개중에는 군인이 이들에게 구혼하거나 실제로 결혼한 경우도 있었다.(후나바 시요이치, 297쪽에서 재인용)
위안소에 와도 여자들과 자지 않거나 위안소를 이용하는 일 자체에 수치감을 느끼는 군인 역시 ‘짐승 같은 일본군’ 이미지가 강한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마루야마 대좌(대령-인용자)는 매일처럼 다니는 고객이었다. ‘요금’을 단번에 반으로 내렸다. 비정하고 이기적이었다. 미즈가미 소좌(소령-인용자)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는 따뜻하고 부하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미트키나 함락 때, 마루야마 대좌는 자기가 먼저 도망갔고 미즈가미 소좌는 자결했다”(같은 책, 298쪽에서 재인용)는 것처럼, 군인들 역시 다양했다.
‘짐승 같은 일본군’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에게 ‘수치심’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성행위 자체를 수치스러워 했다기 보다는, 가장 사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 공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상황,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야했 던 자신이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위안소에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는 그 ‘수치심’에 충실한 경우였을 것이다. 군인들의 성욕과 그 해소 과정이 국가에 의해 조종된 것이라는 한 연구자(구라모토 도모아키)의 지적은 그런 의미에서 정확한 분석이다.
위안부의 처지에 함께 눈물을 쏟는 군인. 그런 ‘인간적’인 군인 역시 우리의 기억에는 없다. 그건 ‘일본군’의 이미지가 ‘비인간’으로 정형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정형화는 수많은 기억들이 폭력적으로 소거된 결과였다. ‘위안부’의 상황—‘위안소’에 가기까지의 상황과 위안소에서의 상황이 하나가 아니었던 것처럼, ‘일본군’ 역시 하나가 아니었다.
하룻밤 자고 가는 군인이,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얘기하면 불쌍하다고 돈(요즘 돈으로 1000원이나 2000원 정도)을 주고 가기도 했다. (중략) 군인들은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강제2』, 36쪽)
내가 울면 저희도 울고 먹던 것도 주고 그랬다. 고주부대 부대장은 나보고 고생 한다면서 안쓰러워했고 중위도 내게 잘해주었다.(같은책, 159쪽)
군인 중에 못되게 구는 사람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군인들이 어디라고. 술 먹어도 잠잠하지. 행패 부리고 때리고 (이런 거는) 일절 없어. (계급) 높은 사람에게 맞아죽어”(『강제 5』, 90쪽)라는 대답도 또 하나의 일본군을 보게 해준다.
아유, 큰일나지. 헌병들 있잖아. (중략) 때리고 그러면 큰일나지. 안 때려. 그래도 가다가 뭐 몬된 놈 있지. 몬된 놈 있으면 또 막 우리 친구들이 건드리지 말라고. 낮에 우리가 이렇게 놀고 있으면 이 사병들이 그 아래로 이렇게 길인께 지내가면, 한국 여자들이 사병들보고 막 욕한다. 욕하면 그놈들이 막 뛰어 올라와. 뛰어 올라오면(하하) 우리는 저쪽으로 피해 달아나(하하). 욕하고. 예끼, 이놈의 새끼. 이렇게, 예끼 이놈의….(『강제5』, 36쪽)
한번은 보초를 서는 졸병 하나가 보초를 서다가 들어오려고 했다. 내가 그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더니 총대로 내 어깻죽지를 때리는 것이었다. 내가 그 일을 대장에게 알려서 그 군인은 혼이 났다.(『강제2』, 202쪽)
군인이 우리보고 위안부라고 하면 장교들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 여성들이 왔는데 그런 소리 한다고 뭐라고 했다.(같은책, 59쪽)
해남도의 위안소는 군대가 위에서 일정한 지시를 했다. 해남도에서도 처음 상당 기간 1할씩 받았다. 그러나 군대의 책임자가 바뀌면서 주인에게 수입의 6할을 여자들에게 주고 4할을 주인이 갖도록 정해주었다.(『강제3』, 281쪽)
여기 와서는 가끔 외출도 했어요. 아무 때나 할 수는 없고 높은 군인이 허락해주 면 나갈 수 있었어요. 두어 달에 한 번 외출했을까? 높은 군인들이 가는 데 함께 갔어요. 우리끼리는 못 가요. 군인들과 같이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거예요. (중략) 따라나가서 목욕도 하고 옷도 사고 반지, 목걸이도 사고 그래요. 중국엔 금값이 싸데요? 물건은 높은 군인이 조금씩 주고 간 것을 모은 걸로 사는 거야.(같은 책, 132쪽) 부대장이 힘을 써서 나를 고향으로 내보내주었다. (중략) 위안부로 왔다가 병이 들고 기한도 차서 나간다는 공문을 만들어줬다. 여기에 장교가 서명을 했는데 군인차를 타고 영안 역으로 나와 목단강을 거쳐 서울로 오는 기차를 탈 때 이 공문을 보여주면 통과할 수 있었다.(『강제2』, 161쪽)
여기에는 사병들의 경멸과 폭력을 ‘관리’하는 장교들이 존재한다. 위안부들이 말하는 군인의 폭행은, 오히려 규범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례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설사 규범을 어긴 경우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를 규탄하기 위해서도 그런 규범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더더욱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업자들이 과도한 착취를 하지 않도록 관리했다는 것도, 군이 위안소의 ‘올바른 경영’을 지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위안소에서 폭행 등이 없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위안소 설치와 이용의 책임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의 센다는 일본군이 위안부들의 권태감을 풀어주기 위해 부대가 주관해서 운동회를 열었던 일을 언급하면서, 위안부들이 운동회를 몹시 즐거워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조선인 위안부는 눈을 반짝이면서 눈물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즐거웠던 소녀시대를 문득 생각했던 거겠지 요”(80쪽)라고 말하는 군의관이 생각하는 복지가 결국은 일본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운동회 이후 일주일 동안”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빵따먹기 경주에서 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말했다”는 ‘위안부’들의 순수한 기쁨의 기억을 외부자들이 소거할 권리는 없다. 위안소에서의 시간이 지옥같은 고통의 시간이었다면 더더욱, 그런 가운데 맛볼 수 있었던 그런 체험과 기억 역시 그녀들의 생을 구성했던 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녀석들은 장난감도 가지고 와서 이거 내가 가지고 놀던 거니까 너 가지라구 선물이라고 주구 가. ‘왜 그런가?’ 하면 ‘나 가면 이제 못 오니까’ 그래. 별것 아닌 데도 하다못해 세수수건 같은 거에 이름 써가지구 주는 것도 있구. 인형도 주구 가구, 제것 모아놨던거다주구 가. 나는 그런 거 싫다구 그러면 아니라구 내가 쓰던 거라구 하면서 주구 가. 생각하면 그 군인들도 참 안됐지.(『강제3』, 301쪽)
아마도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은 정말은 자신이 아끼는 고향의 가족이나 친지에게 유품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불가능했던 전쟁터에서 위안부는 대리고향이자 가족이었다. 그런 특공대의 마음을 받아주고 동정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위안부들이었다. 그러나 피해기억만을 필요로 하는 한 “참 안됐”다고 말하는 연민의 기억은 잊혀질 수밖에 없다.
전쟁과 위안소를 체험한 작가 후루야마 고마오는 한 소설에서 위안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유코, 군인이 위안소에 가는 건 ‘더럽네’ 어쩌네 하는 수준도 아닐만큼 버러지 같은 짓이란다. 곧잘 군인들은 자신들이 버러지 같다고 자조하지. 그건 그렇다고 생각해, 나도. 군인들이 자기를 버러지 같다고 말하는 건, 군인들은 우롱당하면서 죽는 거라는 생각으로 자조하는 거야. 나는 군인은 작고, 가볍고, 툭하면 엉뚱한 곳으로 옮겨져서는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어져버리는 점에서 버러지같다고 생각해. 어렸을 때, 집 정원을 기어다니던 개미를 한 마리 잡아 눈약병에 넣어 학교에 갖고 가서 놓아준 적이 있어. 그리고 나는 개미로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멀고 먼 개미의 여행을 상상했어. 근데 지금의 나는 그때 그 개미와 비슷한 것 같아. 군인과 위안부의 만남 같은 건, 개미와 개미의 만남 정도로 밖에 안 느꼈거든. 또 나와 고미네(다른 군인-인용자)의 관계 같은 것도 우연히 같은 눈약병 속에 갇힌 두 마리 개미 같은 게 아닐까?(「개미의자유」, 『프레오8의 새벽』, 135쪽)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일본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 물론 그들에게는 조선인 위안부에 비해 남성이자 일본인이라는 지배적 지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교를 상대로 하는 사람들은 일본 여자하고 조선 여자” 이고 “현지 여자는 주로 병정들이 상대”(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국 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114쪽)한다는 식으로 계급화되어 있던 상황 속에서, 가장 하위에 놓여 성과 생명을 국가에 바쳐야 했던 식민지의 ‘여성’과 병사들이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순서를 다투지 않아도 되”는 위안부조차 “몇천 번이고 성교를 해야 하는”(같은 책, 「하얀 논밭」, 13쪽) 처지에 있다는 것을 본 이들도 다름 아닌 병사들이었다. 말하자면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가,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윤간’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적어둔 것도 병사들이었다. 후루야마는 “우리가 네이판 마을에 니퍼 하우스(니퍼야자 잎으로 지붕을 얹고 벽을 두른 집-인용자)를 만들고 3주 정도 지나자 조선인 위안부가 열 명쯤 왔다. 그녀들은 모두 사유리니 스즈란이니 하는 꽃이름을 딴 유곽식 일본 이름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가 만난 ‘조선인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기록한다.
“징용이라고 했어. 나 경상남도에서 밭에 있었거든. 그런데 징용이라고 그러면서 데려가는 거야. 기차를 탔고 배를 탔지. 나, 위안부가 된다는 거 몰랐어.”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이란 이런 걸 말하는군. 하루에한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운이야. 위안부가 된 것도 운이지.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도 운이고. 모두가 다 운이라고.”(「개미의자유」, 84쪽)
여기에는 속아서 왔다면서도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과 “위안부가 된 것”을 그저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간주하고 군인을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미 식민지가 된 지 오래인 땅에서 자라나 자신을 ‘일본’의 일원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성은 어디까지나 동족으로서의 ‘군인’일 뿐 적국으로서의 ‘일본군’이 아니다. 그녀가 일본군을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불행한 ‘운’을 가진 ‘피해자’로 보면서 공감과 연민을 표할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 그런 동지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한테 나가 압박은 많이 받았지. 압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내 운명인디. 내가 세상을 잘못 만나고 내 운명이고, 나를 그렇게 한 일본 사람을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 그리고 같은 한국 사람이지마는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샅이 아파싸서 죽갔는디. 막눈물이 절로 나오는 기라. 밥도못먹지.(『강제3』, 225쪽)
위안부 체험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는 우리 앞에도 있다. 말하자면 똑같은 가혹한 ‘운명’을 겪고도 그 운명에 대한 ‘태도’는 위안부마다 달랐고, 지금도 다르다. 그런 그녀는 일본군이 아닌 업자를 ‘폭행’의 주체로 기억한다.
혹독한 체험을 한 이들에게도 ‘즐거웠던’ 순간은 없지 않았고, 군인에게 신세타령을 하면서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위안부’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로 이동해야 했던 ‘개미’ 같은 처지임을 서로 민감하게 감지한 고독한 남녀이기도 했다.
물론 거듭 말하지만, 사랑과 평화와 동지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소’가 지옥 같은 체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명예와 칭송이 따른다 해도 전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지옥을 살아내는 힘이 되었을 연민과 공감, 그리고 분노보다 운명으로 돌리는 자세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
내가 고향 가야 하는데 우리가 부모도 모르게 여기 왔으니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그랬지. 그래갖고 그 장교들이 서둘더니 명령 쫙 내려갖고, 야단났는디 데려다주라고. 이 불쌍한 애들 왜 데리고 왔냐고. 무카야마 소사, 곤도 소사, 다카하시 주사, 뭐 이런 사람들이 주인을 불러갖고 이거 어디서 데리고 왔느냐, 이거 덷고 온 그 자리 갖다놓으라고. 그래서 그놈도 데리고 온 그 자리 꼭 갖다놓드만그려. (중략) 이 아까운 거를 한참 피는 것을 어디서 데리고 왔느냐고 이놈 거기 있던 자리 갖다놓으라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나를 아깝게 생각을 해요. 우리가 왜 짐승이래 불쌍한 거 날려보내 주는 거, 그 맘이 들었던가봐요. (중략) 그 여자들, 같이 있던 여자들 서너 명 되는 거 해방시켜 같이 전부 한국으로 나왔어.(『강제 5』, 50쪽)
유난히 어린 소녀가 위안소로 왔을 경우 그 상황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군인도 없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위안부를 되돌려 보내주기도 한 건 자신의 의지로 구조를 바꿀 수는 없는 ‘운명’ 속에서 그나마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의 윤리의식이었을 것이다. 위안부를 억압한 일본 군인은 그렇게 때로 업자로부터 위안부를 ‘해방’한 주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잊혀진 상태다. 그리고 기억되고 재생되는 건 그저 ‘포악한 짐승 같은 일본군’일 뿐이다. 위안부의 이야기 중 고통과는 다른 체험들이 기억되지 않는 건 그런 고통의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힘이 사회에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위안부는 “제일 즐겁고 행복하셨던 건 언제예요?”라는 질문에 “없지 없어” 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지금 중국 생각하면 만날 노는 거, 어디 나가서 산보하면서 노는 거. 경치 좋은 데 나가서 노는 거. 그 사람들이 어디 데리고 나가서 꽃밭에서 데리고 노는 거 그런 거뿐이여. 즈그들 놀 때 말 태와갖고 막 장난친 거. 말을 막 태와놓고 난 말 위에서 울고. 말이 펄쩍펄쩍 뛰먼 난 말 위에서 울고 막 사진 찍고 그 지랄 하더먼. 경혜라는 그 여자도 운전도 할 줄 모르는 게, 그 사람들이 자동차에 갖다놓고서 발로 밟아가지고 그냥 넘에(남의) 담벼락 처박아가지고 (웃으며) 막 내삐러. 그래 장난들이 맨 어른애들마냥 놀어.(『강제5』, 73쪽)
군인들과 위안부들이 어울려 말이나 자동차에 타고는 “어른애들마냥” 놀았던 체험을 이 할머니는 즐겁고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한다. 그건 이후의 인생이 얼마나 신산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유의 기억들 역시 공적 기억이 되는 일은 없다. 그건 ‘역사’라는 것이 듣고 쓰는 이에 의해 취사선택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군인들도 악한 사람 별로 없심더”(『강제5』, 141쪽)라고 말하는 위안부의 증언은 들려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런 평화로운 풍경이 위안소의 중심 풍경일 수는 없다. 이런 식의 평화의 다음 장면에, 혹은 이웃한 장소에 위안소의 비참은 존재했다. 위안부들과의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군인의 말을 인용했던 센다 또한 이렇게말 한다.
하긴 이런 일은 전쟁에 어느 정도 인간적인 마음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장교가 있는 부대나 주둔지뿐이고, 그 숫자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부대나 주둔지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다. 보통은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공동변소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 위안소에서는 여자들은 하루종일 팬티를 벗은 채로 “자, 다음!”, “다음!” 하는 식으로 무표정하게 숫자를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 역시 거칠었다고 한다.(81쪽)
인간을 죽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되어버리지요. 그렇게 석 달만 지나면 위안부를 사러 가는 일도 ‘돌격’이라는 군대용어가 딱 맞는 상황이 됩니다. 그녀들의 신세타령이라든가 속아서 끌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당시엔 동정심조차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지 여자를 혹시 강간하게 되면 꼭 죽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186쪽)
우리에겐 오히려 이런 유의 증언들 쪽이 익숙하다. 거칠고, 폭력적이고, 심지어는 쉽게 살인을 저지르는 일본군. 그런데 그런 상황의 확인과 함께 주목해야 하는 건 이들이 ‘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여성은 ‘위안부’가 아니라 ‘현지 여자’라는 점이다. “트럭에 타고 있을 때 일본 군인들이 중국인 여자들을 강탈하는 것을 보았다”(『강제2』, 200쪽)거나 “중국 여자들 있으믄 강제적으로 옷을 벗겨갖고 참 누워 자고 그란다고. (중략) (우리에 대해서는) 무조건하고 옷 벗기고 그러지 않지”(『강제 5』, 133쪽)라는 말도 그런 차이를 보여준다.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에게 ‘적의 여자’와는 다른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 위안부라도 그녀들이 놓인 정황은 다양했다. ‘조선인 위안부’란 식민지의 가난과 성적/민족적 차별의식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숫자의 군인을 감당해야 했다는 점에서도 ‘위안부’가 ‘군인’과의 관계에서 희생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양쪽 다, 국민동원이라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함께 움직여진 장기말이었다. 그들은 둘다 성과 생명을, 그것을 담는 신체를 ‘국가를 위해’ 바쳐야 했던 한 마리 ‘개미’들이었다. 포악한 군인이었건 온순한 군인이었건, 그들의 운명은 다르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남녀 간의 불평등, 민족적 불평등이라는 관계 속에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당신도 헤이타이상(군인-인용자), 헤이따이상, 나도 이리 산 것도, 고향을 떠나서 이리 산 것도, 천황을 위하여”(『강제 3』, 107쪽)라는 노래를 했다는 증언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들은 함께 국가에 의해 고향을 멀리 떠나 타지로 ‘이동’해야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사실 마닐라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는 한창 전쟁 때였고 군인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강제2』, 109쪽)
그렇게 꽉 줄이 서간? 그냥 모두 하나하나 들어오지. 그렇게 꽉 줄서서 들어오면 우린 뭐 죽으라고?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30분, 1시간씩이야.(『강제5』, 89쪽)
스무 살이 넘으면서부터 이력이 나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위안소가 여기저기 생겨서 상대하는 군인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진송에서 군인들 많이 받을 때도 그 숫자는 고슈보다 적어 20~25명 수준이었다.(『강제2』, 174쪽)
서로 상반되는 이런 증언들은 위안소의 상황이 하나가 아닐뿐 아니라 위안부들도 시간대와 이동된 장소에 따라 다른 체험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기억일 것이다.
대만이나 마닐라에서 “고고쿠신민나리”라는 신민서사를 외우라고 주인이 가르치고 군인도 가르쳤다.(『강제2』, 111쪽)
위안부들은 당시 ‘일본인’으로서 동원되었다. “군인들은 병에 걸리면 기합을 받는다고 하면서 삿쿠를 끼지 않으면 여자들과 관계하지 말아야 했고, 중국인 여자한테는 가지 말고 우리한테 가라는 말을 들었다”(『강제 2』, 155쪽)는 것 역시 그런 구조 속의 일이다. ‘조선인 위안부’란 그렇게 일본의 제국 확장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된 존재이기도 했다.
그동안 위안부들은 그저 자신들이 겪은 일을 담담히 말해왔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가려서 들어온 셈이다. 그건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이들이건 지원하는 이들이건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의 이미지는 증언의 한쪽 면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체험을 왜곡하는 데에 가담해온 셈이다. 그곳에서 위안부는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위안부가 아니다. 그들의 기억은 듣는 이가 원하는 ‘새로운 기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