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기자는 “1943년부터 45년까지 정신대에 동원된 한일 두 나라의 여성은 모두 20만가량. 이 가운데 한국의 여성은 5~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한 기자조차 조선인 위안부는 5~7만 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동원된 정신대가 1944년 2월 시점에서 16만명이었다고 하지만,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정신대의 숫자였다.
그런데 센다는 “일본군이 동원하고 사용한 위안부 총수는 1938년에서 1945년까지 8만이라고도 10만이라고도 하는데, 그 대부분이 조선인 여성”이라고 말한다(28~29쪽). 이 책 부제목의 ‘8만 명’은 여기서 나온 숫자였다. 그리고 센다가 쓴 숫자는 한국인 기자가 말한 숫자보다 많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20만 명이 아니라 2만 명, 아니 2000명이라 해도,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처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안부 20만 명’설은, 센다를 비롯한 위안부 문제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서울신문』 등의 기사를 전적으로 믿은 결과로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설사 ‘20만 명’이었다 해도 그 인원을 모두 ‘군이 강제로 끌어간’ 것은 아니었다.
20만 명이라는 숫자 이상으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이 상징하는 것처럼, ‘위안부’가 대개 어린 소녀였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그렇지만 그런 이미지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이 문제가 보도될 때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했던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실제로는 위안부들은, “내가 나이가 제일 적었지. 거 간 중에. 다른 여자들은 다 스무 살 넘었어”(『강제 5』, 35쪽)라거나 “우리 있는 데는 한 스무 명 남더라구. 그 사람들은 나이가 조금 많고 스무 살 다 넘고 전라도서도 오고 경상도서도 왔더만”(87쪽)이라고 말한다. 증언한 본인 말고는 “스무살 다 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우리 앞에 있는 위안부들의 당시 나이는 오히려 ‘예외’였다.
거기 위안죠(위안소)가 많아. 많으니께 공치는 사람도 있더라구. 거기 가면 다 남자 상대만 한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니더라구. 거기 여자들하고 다 얘기 해봤지. (중략) 나이가 다 고만고만해. 한 스무 살, 스물한 살, 최고 많은 게 스물다섯 살. 서른 살 최고 많더라고.(『강제3』, 96쪽)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8월에, 미얀마(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의 소탕작전에서 미군의 포로로 수용되어 전쟁정보국OWI의 심문을 받은 ‘조선인위안부’ “여성들의 평균연령은 25세”(「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 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004, 296쪽에서 재인용)였다. 어느 조선인 출신 일본군도 위안부들이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던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누님’으로 부르며 지냈다고 증언하면서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정신대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2011).
물론 어린 소녀가 위안부가 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어린 소녀가 위안소에 가게 되었을 때는 “어떤 군인이 몇 살이냐고 해서 열 네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젖이나 더 먹고 오지, 부모형제 보고 싶어서 어떻게 왔느냐’”(『강제 2』, 51쪽)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나이가 결코 평균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위안부상이 소녀로 정착된 것(위안부를 다룬 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소녀 이야기>인 것도 그런 의식을 반영한다)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탓도 있지만 앞서의 20만 명설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상이 우리의 피해의식을 키워주고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증언한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강제로 끌어간’ 유괴범들, 혹은 한 동네에 살면서 소녀들이 있는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우리 안의 협력자들 때문이었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 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설날에 내가 합천에 있는 우리 작은 할아버지네로 갔어. 작은할머니가 사랑에 어떤 남자를 데리고 오더니 인사하라고 해서 인사드렸지. 그 남자가 마흔 살이 넘은 그 동네 이장이었어. 인사하고 몇 달쯤 후에 그 남자가 나를 찾아왔어. 복숭아나무에 꽃핀 3월이나 4월쯤 봄이야. 만으로 열네 살이었어(1942년). (중략) 안 가려고 했는데 이장이 잠깐이면 된다고 나를 잡아끌고 올라갔지. 갔더니 야트막한 산 위에 행길이 있는데 거기 짐차가 와 있더라구. 타라고 해서 탔지. (중략) 그 차를 타고 대구까지 왔어. 대구에서 나는 그 이장과 어떤 집으로 갔고 다른 여자들은 그 차를 타고 그냥 갔어. (중략) 하룻저녁인가 자고서 그 이장이 나를 부산의 방직회사까지 데리고 갔어.(『강제3』, 193~194쪽)
산으로 봄에, 봄에 인자, 친구 둘하고 셋이서 나물 캐러 갔는데 일본 남자 하나하 고 한국 남자 하나가 쪼끄만 도라크(트럭) 차에서 내려서 곁으로 오더라고. 그 사람들이 과자를 주면서 “따라가면 밥도 하얀 쌀밥에다 고기반찬에다 해주고, 뭐 과자도 주고 옷도 좋은 옷을 입혀준다” 그러더라고. 내 나이 열세 살이었어요.(같은책, 222쪽)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 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강제1』, 124쪽) 그날도 언니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인 한 명과 그 사람의 앞잡이인 듯한 조선인 한 사람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일본인은 당코바지를 입고 있었고 조선인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조명길에서 바둑을 두면 서 너를 찾고 계신다”고 말했다. 같이 놀던 애들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어디론가 도망쳤다. 나는 열두 살이었지만 키도 크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있어서 열다섯 살쯤으로 보였다. 전에 아버지가 똑똑하다고 심부름을 시킨 적도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믿고 그들을 따라갔다. 조명길로 데려가서 그들은 나를 골방에 밀어넣었다. 거기에는 이미 나처럼 속아서 온 여자들이 세 명 있었다.(같은책, 136쪽)
그러자 세살 위인 오빠가 계집애를 가르쳐서 어디에 쓰느냐면서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 오빠는 학교에 못 가게 책을 모두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버리면서 계집애는 공부 가르치면 바람난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자 오빠는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계셔서 나를 때리지 못하니까 서당으로 끌고 가서 낫으로 찔러 죽인다고까지 했다. 나는 옆집의 키가 큰 언니가 학교를 다니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학교에 못 가게 했기 때문에 그해(아홉 살) 늦은 봄에 엄마에게도 말을 안 하고 고모가 사는 서울로 도망쳤다.(같은책, 183쪽)
첫 번째 증언에서 짐차에 태워 간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동네 이장이었다. 세번째 증언을 한 소녀가 여기저기 전전하다 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위안부’가 된 나이는 열다섯 살이다. 이처럼,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가 된 경우는 대부분 주변 사람이 속여 데려가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보호공간이 되지 못한 경우다.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자신을 위안소에 보냈다고 생각하는 한 위안부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원망 때문에 “임종때 사람을 보냈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 딸을 어떻게 그런 곳에 보낼 수 있는가 하는 원망의 마음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강제2』, 181쪽)고 말한다.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기까지의 정황은 이렇게 하나가 아니었다. ‘강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라는 인식은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업자 등 주변 가담자의 소거, 예외적인 사례를 일반화한 수용이 만든 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