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제로 모집된’ 정신대

그렇다면 ‘일본군이 강제로 데려갔다’는 증언들은 무엇일까.

‘위안부’들의 증언은 자신을 데려간 주체가 ‘마을 남자’이거나 모르는 아저씨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경찰’이나 ‘군인’이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해서 중급 규모의 여자사냥은 전쟁의 확대에 따라 대규모의 여자사냥으로 바뀌어간다. 대규모로 여성들이 모집된 것은 1943년부터였다. 모집이 가장 극심했던 것은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하에 모집된 것이다.

‘정신대.’ 이 얼마나 그럴듯한 단어인가. 이 ‘정신대’원의 자격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이었다. 다만 총계 20만(한국 측 추정치)이 모집된 가운데 ‘위안부’가 된 사람은 ‘5만 내지 7만’이라고 한다. 모두가 위안부가 된 것은 아니다.(106쪽)

센다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가 모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단정한 이유는 “당시 일을 조사한 한국인 신문기자”(106쪽)가 “우선 18세에서 22, 3세의 여성만을 골라 위안부로 만들고, 중년 여자는 군수공장에 보내진 것 같습니다”(107쪽)라고 한 말에 있는 듯하다. (후에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한 윤정옥 교수는 센다의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신대와 위안부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애매하게 겹쳐지면서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결과로 만들어진 기억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위안부’의 모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정신대’의 모집은 전쟁 말기, 즉 1944년부터였다. 그리고 정신대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였다. 일본은 1939년부터 ‘국민징용령’,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국민근로동원령’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14~40세의 남자, 14~25세의 미혼 여성을 국가가 동원할 수 있도록 했는데, ‘12세 이상’이 대상이 된 것은 1944년 8월이었다(일본 위키피디아 ‘여자정신대’ 항목).

그나마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발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센다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1970년 8월 14일자 『서울신문』은 1944년에 정신대제도가 시행되었다고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이 정신대는 사실상 나치의 소녀대보다도 잔인했던 위안대. 정신대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군수공장, 후방기지의 세탁소 등에도 배치됐으나 대부분 남양, 북만주 등 최전선까지 실려가 짐승같은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 기사는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가 곧바로 한국에서도 시행된 것처럼 오해했고, 그에 더해 정신대가 위안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기사는 이어서 작가 한운사의 말을 빌려 “일선부대에 여자들이 끌려오면 1개 소대에 2, 3명씩 배치, 천황의 하사품으로 굶주린 사병들의 노리개가 되었고 날이 새면 또 다른 부대로 끌려가 곤욕을 겪어야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사진에 “일제는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숱한 부녀자들을 동원, 군수공장의 직공이나 전방부대의 위안부로 희생시켰다”고 설명해두기도 한다.

하지만 ‘정신대’란 남성들을 전쟁에 보내 노동력이 부족해진 일본이 여성들을 공장 등의 일반 노동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든 근로동원제도였다. 무엇보다 ‘위안부’와 이들이 다른 것은 ‘정신대’는 12세 이상의, 즉 중학교 이상의 ‘학생’이나 졸업생이 주요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위안부’들의 다수는 가난이나 가부장제 속의 교육차별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저학력이었지만, ‘정신대’에 동원된 이들은 대부분 학교교육 시스템 안에 있는 이들이었다. 윤정옥 교수가 ‘정신대’에 징발되지 않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고 말하는 것도 ‘정신대’의 대상자가 처음부터 ‘위안부’와는 달랐 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에는 「여자정신근로대, 만 15세부터 25세로 조직」이 라는 제목의 기사(『매일신보』, 1945. 6. 1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80쪽에서 재인용)가보인다.

긴급 증산을 위하여 이미 생산전에 참가하고 있거니와 8월부터는 여자들도 근로에 참가하기로 되었다. 만 15세부터 25세까지의 여자 중 놀고 있다고 볼수 있는 여자들을 대상하여 여자근로정신대를 조직하는 것으로 국민의용대의 조직 발전을 기다려서 구체적으로 결성할 모양인데 여자근로정신대원은 상시요원과 임시요원의 구별을 두고 상시요원은 여자들이 할 만한 사업 중에 동원하며 임시요원은 어획이 많았을 때, 운반 같은 데 동원하는 등 적절한 방면에 동원하기로 되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에서 정신대 제도가 실제로 (법에 의거한) 강제적 동원의 형태로 가동된 것은 1945년 8월인 듯하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1944년에는 조선에서도 정신대가 조직되었는데, 그 배경을 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사치와 향락과 안일만을 찾고 있던 양키 미국 여자들도 싸움에 지지 않겠다고 공장으로 몰려들어 벌써 전 미국 공원의 반 이상을 여자들로 채우고 있다고 한다. 이 양키의 도전을 마다할 황국의 여자들이 아니다. 다 같이 보내게 되지 않았는가. 이들 장성들이 정신하고 있던 생산진은 우리들이 굳게 지키기 위하여서 반도 여성들의 총궐기가 있어야 할 지금이다. 여자는 절대로 징용을 안 한다. 이러한 때 나의 뒤를 따르라는 듯 여성 진군의 봉화를 들고 일어선 근로낭자군이 있으니 그 이름은 평양여자근로정신대이다. 이미 내지에서는 수많은 정신대가 조직되어 증산장으로 진군하여 좋은 성적을 드러내고 있는 터이지만 조선서는 이제 평양정신대가 여자근로의 집단동원으로는 처음이다.(『매일신보』, 1944. 4. 19., 같은 보고서에서 재인용)

내지—일본에서 정신대 모집이 시작되자 조선에서는 이런 식의 ‘자발적인 동원’이 시작되었다. 이후의 같은 신문에 실린 「여기 지원병의 누이있다, 생산전장은 어뎁니까, 함남으로부터 정신대를 자원해 내성」(1944. 9. 14.), 「정신대 아니라도, 두 처녀 탄원 들어 우선 사무 위촉」(1944. 9. 16.), 「가정도 나라 있은 뒤에야, 혈서로 여자정신대 탄원한 아리마 양」(1944. 9. 20.),「처녀들이 바치는 이 적성, 여자정신대원 지원 쇄도」(1945. 2. 24.) 등의 기사에 의하면 자원 형태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자원 역시 (애국심을 발휘해야 하는)총체적 강제 속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서울신문』의 기자는 정신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정신대가 그대로 위안부가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식의 자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다른 한편에서, 국민동원을 징용으로 간주하고 기피했던 이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미혼 여성의 징용을 두고 “개중에는 이를 위안부로 여기는 등의 황당무계한 소문이 항간에 퍼져있”(후지나가다케시, 2006. 후지나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 엮은 『정부 조사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 4』[1998]에 수록된 1944년 7월의 일본 내무성 문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는 상황에서 앞서의 신문이 전하는 사례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하는 착각은 일본이 ‘국민동원령’이라는 ‘법’을 만들어 전쟁을 위한 국민동원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 분명하다. 위안부들의 증언에는 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으니, 그런 사례가 와전되면서 정신대와 위안부가 같은 것으로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처녀공출이라는 단어가 (성경험이 없는) ‘처녀’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정신대를 곧바로 성노동에 동원되는 ‘위안부’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기자는 센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통지서가 온 다음에 사흘이 지나면 어디로 모였습니까? 면장집입니까?”

“주재소 앞입니다. 거기서부터 경찰이 인솔해 트럭이나 기차에 태워서,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서울로 데리고 왔습니다. 배웅하는 가족들, 엄마들은 딸들 발 아래 매달리면서 엉엉 울었고, 그 사람들을 경찰이 떼어놓으려고 하면 이번에는 그 경찰의 다리에 매달려 울면서 애원했는데, 발로 걷어차였지요. 세상 어느 나라에, 딸이 군인의 노리개가 된다는데 기꺼이 보내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가난한 농부라도 인간이니까요.”(110쪽)

‘트럭이나 기차에 태워서,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한 주체는 ‘경찰’이다. 그런데다가 이들은 ‘통지서’를 받고 모였다고 한다. 이 상황은 명확히 ‘공적’인 징집이었고, 징집 대상이 노동력 보충을 위한 ‘정신대’임은 분명하다. 실제 위안부들의 증언에서, 이런 식의 이별 장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배웅하는 가족들, 엄마들은 딸들 발 아래 매달리면서 엉엉 울었고, 그 사람들을 경찰이 떼어놓으려고 하면 이번에는 그 경찰의 다리에 매달려 울면서 애원’했다는 경우 역시 증언에서 나타나는 평균적인 모습과는 다르다.

실제 위안부들의 증언을 보면, 단독으로 떠나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약간씩 차이는 나지만, “저녁이라도 준비한다고 혼자 논두렁에서 쑥을 캐고 있는데, 3, 40대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이런 고생 하지 말고 배불리 먹을 것도 주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아봐준다고 자기만 따라오라고 해서” 가게 되는 식의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중간에 무서워져서 우는 “그녀의 뺨을 때리더니 강압적으로 다시 그녀에게 길을 재촉”한 것도 일본 군이 아니라 ‘조선인 남자’였다(이국언, 74~75쪽). ‘공장’에 보내준다고 속여 데려간 한 남자는 “공장에 간다고 하더니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하자 김씨는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며 우리를 일본 사람에게 넘기고 사라져버렸다”(『강제1』, 87쪽).

‘정신대’ 동원과 ‘위안부’ 동원의 풍경은, 예외로 보이는 증언을 제외한다면(제외하는 이유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확연히 다르다. 이들이 ‘트럭’이나 ‘기차’에 실려 대륙 혹은 ‘남방’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대도시에 집결한 다음의 일이었다.

재일교포 김일면의 책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는 “어떤 산촌 지역에서는 할당된 인원을 달성하려고 트럭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신대’로 지명한다는 통지를 내고, 만약 도망치려는 기색이 보이는 여자는 잡아서 수갑을 채워 유치장으로 처넣었다. (중략) 나중에는 길거리에서 여자들을 잡아왔다”(182쪽)고 말한다. 김일면 역시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한 것이다.

‘위안부’를 ‘강제로 끌어’갔다고 말해 ‘조선인 위안부’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책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1977), 『나의 전쟁범죄』(1983)이다. 최근까지도 언론은 요시다의 책을 ‘강제동원’의 증거인 것처럼 다루지만(『조선일보』, 2012. 9. 6.), 이 책의 신뢰성이 의심받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요시다 자신도 그의 책이 거짓이라는 비판에 대해 “책에 진실을 써봐야 아무런 이익도 없지요. (중략) 사실을 숨기고 자기 주장을 섞어 쓰는 건 신문도 하는 일 아닙니까”(『주간 신초新潮』, 1996. 3. 27.)라면서 “반론을 하지 않겠다”(『아사히 신문』, 1997. 3. 31.)고 말한 바 있다.

앞서의 기자나 재일교포 학자, 그리고 요시다에 이르기까지 강조된 강제연행은 우선은 정신대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윤정옥 교수도 정신대 모집에선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말한다. 강제연행이 있었다면, 국가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정책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데려간 일반인이 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신대가 그런 방식으로 모집된 시기는 패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단기간에 ‘20만의 소녀’를 모집할 수 있었을 리도 없다.

여성들을 군이 주체가 되어 ‘강제로 연행/납치’한 것은 일반적으로는 전쟁터에서 개인 혹은 집단이 자행한 글자 그대로의 ‘강간’의 경우였다. 또 그 대상은 기본적으로는 ‘조선인 여성’이기보다는 타국 여성—적국의 여성이었다. 위안부 중에는 함께 있던 일본군이 중국인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기본적인 관계는, 그렇게 중국인과 일본군의 관계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