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11년 겨울, 나는 연구년을 맞아 도쿄에 있었다. 원래는 이전부터 해왔던 연구—만주나 조선 땅에서 자라 패전을 맞아 일본으로 돌아가 후에 작가가 된 이들에 관한 연구—와 함께 ‘식민지지배’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이었다. 그 런데 2011년 8월, 한국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나오고 12월에 일본대사 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서게 되면서 갑자기 위안부 문제가 주목을 받게 되었고, 원래는 ‘식민지지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을 향해 쓸 생각이었던 원고 중 일부를 일본의 인터넷 잡지에 연재하게 되었다. 이 책 에서는 그 원고를 제2부와 제3부에서 나누어 사용했는데, 일본의 지원자들 과 부정자들을 비판하고 일본 정부에 ‘추가조치’를 촉구하는 내용이 중심 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12월의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수상의 만남 이후의 추이를 기대를 안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꼴로 게재했던 연재가 종반에 접어들 무렵, 일본 정부가 추가조치에 관한 제안을 했다는 것을 알고 예상 밖의 빠른 전개에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본문에서도쓴것처럼 결국그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을향해서또다른 위안부 문제론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같은 시기에, 나는 와다 하루키 선생,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 선생 등 신뢰하는 일본 진보지식인들과 모여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를 이어 갔다. 이전부터 나 역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연락해서 모임을 주선하기에 이른건 오직 와다 선생의 열의에 이끌려서였다. 와다 선생은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 한 아시아여성기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이다. 기금 문제로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왔는데도, 또 건강이 썩 좋지 않았는데도, 와다 선생은 어떻게 든이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열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2012년 1월 이후, 앞에 언급한 두 선생, 그리고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나 리타 류이치成田龍一,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 선생등‘한일, 연대 21’에서함 께해왔던 이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시도한 것은 그동안 이 문제에 관해 강경 한 입장을 취해왔던 이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는 일이었다. 2012년 3월에는, 최근몇년동안위안부문제를둘러싼지원자들간의갈등에관해의견을나 누어왔던 시미즈 기요코志水紀代子 선생과 한국의 정대협에서 오랫동안 함 께해왔지만 후에 정대협을 비판하게 되었던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선생이 함께 주최한 도시샤 대학에서의 심포지엄에 와다 선생과 함께 참석해 기금 을 반대해온 이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니 그 연구년은 ‘위안부 문제’와 함께한 연구년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변함없이 국회입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만나의 견을 나누고 접점을 찾으려 했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국회입법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일본 정부의 국고금 에 의한 추가조치가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7월 1일에 도쿄 대 학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그 자리에는 일찍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온 시미즈 스미코清水澄子 전 참의원 의원도 참석해 왜 국회에서 입 법이 불가능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그리고 2012년 12월, 시 미즈 의원은 그렇게 바라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작고하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진심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성과 열정을 다해 생각하려는 이들이었다. 말하자면그자리는 글자 그대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 ‘현대일본의 양심’이모인 자리였다.

그들 중 일부는 앞에서 말한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2006년 말에 일본에서 번역되면서 이어준 인연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 책이 나오면서 내 주위에 있던 일본의 진보 측 학자들은 의견 이 갈렸는데(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위안부 문제였고, 그중에서도 지원운동에 대 한 비판이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이들은 자신에 대한 비판일 수 있음에도 내의견에귀기울여주고 공감해준 이들이었다.

『 화해를위해서 』 는반은위안부문제나식민지배에대한, 이른바‘우익’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비판적으로쓴책이었다. 그러나그책을 비판한 이들은 아무도 내 책 안의 우익 비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저 진보 진영의위안부문제해결운동방식에대한비판만을들어격하게비난했다. 비판자들은 일본에서 내 책이 높이 평가된 것(아사히 신문사가 주최하는 ‘오사라기 지로 논단상’ 수상)을 두고 일본이 우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 고, 내가 마치 일본의 우익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처럼 취급했다. 그들의 영 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진보매체의 한 기자는 내가 일본의 보상 방식에 대한 의견을 말하게 된 자리에 와서 몰래 녹화해 앞뒤를 생략하고 한국 텔레비전에 내보내기도 했다. 그 결과로 나는 이른바 ‘네티즌’들에게 마녀사냥식의 공격을 당했고, 한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내가 했던 발언 내용을 그대로 번역해 『프레시안』에 실었고, 문제의 방송국에 항의하여 사과를 받았다. 그런데 지 원단체의 어떤 이는 그 글을 일본의 지원단체가 공유하는 메일에 전달하면서 『프레시안』이 나에 대해 사용한 ‘지일파’라는 단어를 ‘친일파’로 번역해 서 전달하기도 했다. 그건 분명 ‘진보(운동)의 타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였다.

한국에서 명망 높은 어느 재일교포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화해라는 이 름의 폭력」이라는 칼럼을 대표적인 진보신문에 쓰기도 했고, 또 다른 재일 교포 학자가 쓴 책을 번역한 같은 신문의 기자는 그 학자의 책을 소개하는 불과 대여섯 줄의 글에서 “일본 우익의 찬사를 받은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 서』를 비판한 책”이라고 소개하기까지 했다. 물론 우익의 찬사를 받았다는 것은 거짓이었고(내 책을 높이 평가해준 건 대표적인 진보매체 『아사히 신문』과 진보적인 학자들, 그리고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의식을 가진 선량한 시민들이었다), 내가 항의하자 그 기자는 실은 위의 두 재일교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말 했고, 공식적인 사과와 수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후에 이 기사는 인 터넷상에서만 ‘우익’이라는 단어가 ‘보수’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는 것은 이제 와서 그들을 새삼스럽게 비난하기위 해서가 아니다. 진보 측의 이런 대응은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자기확신이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식의 자기확신이 때로는 경직된 자세와 무책임한 폭력을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본문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런 식의 사고에 바탕한 비난이 일본 정부와 국민 전체를 대 상으로 행해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20년의 세월이 일본 안의 혐한파들을 늘려놓았다.

2013년 봄, 일본에서 이른바 도를 넘어선 혐한 데모가 일어나는 것을 보 면서 착잡했던 것은 이런 경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우익이나 차별주 의자들을 제외하면, 혐한파들은 일본을 향해 한국이 퍼부었던 언어폭력에 상처를 입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이전에는 한국의 비난을 그저묵 묵히 감수하고 있었던 이들이 더 이상 참는 일을 그만둔 것이기도 하다. 그 중에는 한국을 좋아했다는 이도 적지 않다.

아무튼 이 사태에 충격을 받고 2013년 4월 초, 나는 약두 달간, 일본어 트위터를 통해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때 염두에 둔 것은 아직 식민지 배를 정당화하는 수준에 가지 않았어도 그런 이들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을 수있는 이들이었다. 혐한파가 전체적으로 보면 소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 만, 그들의 영향력이 더 커지기 전에, 그들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을 막아보려 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양 극단에서 목소리를 높여온 이 들이 아니라 가운데에서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좀더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사고하려 하는 이들, 그런 이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혐한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두달의 집중적인 대화 끝에, 나는 그들과 가느다랗지만 어쩌면 튼튼할 수 도 있을 대화의 끈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우파도 좌파도 있었다.

이 책이 한국에서도 그런 역할을 할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는 소수의 ‘관 계자’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더 많은 이들이 한일 문 제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제는 ‘함께’ 아시아의 분열을 치유하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 나서주기를.

정대협은 소녀상 건립운동에 이어 ‘1억 명 서명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하 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지원(하지만 위안부들은 정부의 ‘인정급’과 생활지원을 받고 있어서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한다), 박물관 건립 등 그동안 이어져 온‘모금’과 ‘기부’ 운동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기부’는 정대협이 비난했던 기금의 ‘동정 금’과어떻게 다른 것일까.

무엇보다도, 최근 들어 수요시위를 비롯한 정대협의 활동에 어린 학생들 이 대거 동원되는 상황은 극히 우려스럽다. 그들에게 새롭게 심어진 ‘반일’ 적적개심을 넘어서 같은 또래의 일본 청소년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대립과 감정소모의 시간이 필요할까.

정대협의 ‘운동’을 거대한 ‘국가적 소모’라고까지 느끼는 내 감성을 그저 ‘친일파’로 간주하려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빨갱이’나 ‘친 일파’라는 명칭이 그저 개인에 대한 공격 자체를 목표로 하는 세월이 이어 지는한제국과 냉전으로부터의 ‘해방’은오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분야의 이야기를 혼자서 하고 말았지만, 사실 위안부 문제는 공동연 구가 필요한 문제다. ‘위안부’ 자체에 대한 연구도 물론이지만, 그 이상으 로90년대 이후의 경과에 대한 여성학, 외교학, NGO학, 미디어학 등등의연 구가 언젠가 이루어져서 여기서 생각한 문제들이 더 소상히 밝혀지거나 오 류가 지적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결’에의 모색이 앞서야 할 것이다. 그 해결을 위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가 지혜를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일본의 인터넷매체 『WEBRONZA』에 연재했던 일본어 원고를 초벌번역해준 이승준 군, 위원회에서 나온 보고서 등을 아낌없이 제공해주신 강제동원피해진상 규명위원회의 정혜경 선생님, 그리고 음으로 양으로내생각을 들어주고읽 어주고 응원해주고 함께해준그밖의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들의 응원과 지지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이책을쓸수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도 문제적일수있을뿐아니라 거칠기까지한원고를 기꺼이 책으로 만들어주신 정종주 사장님께 오래된 인연과 신뢰에 감사하 면서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