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해결을 위해

정대협은 2000년대 이후 세계를 상대로 한 운동에서 미국 하원에 이어 캐 나다와 유럽연합 등의 결의까지 이끌어냈다. 최근엔 미국에까지 위안부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2013년 3월부터는 다시 전 세계를 상대로 한 ‘1억 명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 서는 기림비들은 모두 ‘강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조선인 소녀’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들이다. 최근 들어 그중에는 전부가 조선인은 아니었다는 인식도 내놓고 있지만, 정대협이 인식의 변화를 공식적으로 말 하고 수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2013년 1월에 이루어진 뉴욕 주 상원 결의 는 한국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 그건 일본의 사죄를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정대협은 ‘아시아와 연대’해서 아시아 전역에 위안부상을 세울 계획까지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싱가포르 정부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평화 비 ‘소녀상’을 과거 싱가포르 위안소 자리에 세우자는 한국 정신대문제대책협의 회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했다.

30일 AFP통신에 따르면 싱가포르 문화부는 소녀상 설립계획을 싱가포르 당 국과 협의하고 있다는 한국 정대협의 주장을 사실상 부인했다. 싱가포르 문화부 는 AFP에 이메일 성명을 보내 “(소녀상 설립을 협의 중이라는 주장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싱가포르 정부와 한국 정대협 사이 (소녀상 설립) 이슈와 관련해 진행 중인 회담이나 논의는 없다”며 “싱가포르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도 허용하 지 않을 것(Nor will we allow such a statue to be erected in Singapore)”이 라고 강조했다. 앞서 정대협의 한 관계자는 “3월 중 장소를 확정해 평화비를 세 울수있도록 싱가포르 당국과 협의 중”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라 일본군 위안소가 설치됐 던 아시아 곳곳에 평화비를 세우는 ‘나비 프로젝트’를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 다.(『뉴스1』, 2013. 1. 30.)

정대협은이프로젝트의첫번째 장소로 설정한 곳에서 제안이 거부된것 을 두고 “프로젝트를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겨 허탈하지만 세계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노력은 계속할 것”(『경향신문』, 2013. 2. 1.)이라 고말한다.

싱가포르가 왜 거부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소녀 상의 건립—정대협의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노력’을 싱가포르는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정대협은 ‘아시아’의 ‘위안소’가 똑같이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간’ 곳으 로 생각해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겠지만, 당시에 싱가포르에 가 있 었던 조선인 여성은 ‘일본 제국’의 일원이었다. 다시 말해 싱가포르인과조 선인은 일본군과의 관계가 다르다. 그들에게 태평양전쟁 때의 조선인이란 ‘일본인’이고자국을침략한적국의여성일뿐이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한국 인사들이 아시아나 영국 등의 유럽을 여행하면서 적의에 찬 눈길을 받거나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해야 했던 것도 그런 과거 가 남긴 결과다. 그들은 조선을 일본의 앞잡이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영국 병사를 가혹하게 다룬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기억하 고 있었고, 말레이시아인들은 “조선 사람이 일병의 부하가 되어서 잔혹한 행동을 많이 했”고 “조선 사람에게 무지한 고문을 당하였다”(장세진, 71쪽) 고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가혹한 포로감시원에게 당한 일을 그림으로 남겨 놓은 연합군 포로들도 있다(박유하, 2009).

위안부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인 위안부들 에게 차별을 당했지만, 냄새난다는 이유로 대만인을 싫어했던 조선인 위안 부들이 ‘현지’ 여성들을 차별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조선인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아직 그들에게 공적인 집단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여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거부는 적어도 그들의 ‘위안 부’에대한 기억이 한국의 기억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안부’의 피해는 보상되어야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한국이 바라는 방식으로 ‘기림’을 받기에는 모순이 없지 않은 존재다. 그들을 기억해야 한 다면, 있는 그대로, 식민지의 모순적인 존재로서, 가난한 부모를 봉양하고 오빠를 위해 희생한 가부장제하의 가난한 누이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자국의 남성들이 지키지 못해 타국의 남성들에게 가혹한 환경에서 성을 제공해야 했던 존재들로 기억되어야 한다.

한국의 욕망이 투영된 ‘피해자이자 투사’로서의 ‘민족의 딸’을 보는 일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적의 여자’이기도 했던 일을 잊는 일이기도 하다. 아시 아의 다른 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는 그런 일을 기억하고 마주하는 일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조선인 위안부’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압박 이아니라 대화로써 일본과 다시 마주해야 한다. 운동이 주력해온 외부로부 터의 압박이 일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2000년에 도쿄에서 열렸던 여성 국제전범재판에서 내려진 판결, 즉 ‘천황 히로히토裕仁 및 일본국을, 강간 및 성노예 제도에 관해 인도에 대한 죄로서 유죄’라고 했던 것 이상의 압박 은 없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후,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 이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던 2007년의 각국의 국회 결의만으로도 일본은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도쿄 여성국제전범재판 이후 12년, 그리고 유럽과 미 국의 국회 결의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일본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 다. 그건 ‘운동’이 지향한 밖에서부터의 ‘압박’ 방식이 효과가 없었다는 것 을말해준다. 아시아여성기금 해산 이후 일본이 그나마 움직이기 시작한것 은 2011년 겨울, 이명박 대통령이 한일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 을 촉구한 뒤부터였다. 결국 결실을 맺기 전에 시들고 말았지만, 직접담판 이일본을 움직이는 데에는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일본이 ‘외부’보다 오히려 ‘한국’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준일 이었다.

정대협은 제3국을 포함한 ‘중재위원회’를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중재위원회’가 하는 일은 실질적으로는 양측이 진실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본격적인 싸움이다. 그런 싸움에서 승리할 가능성도 적어 보이지만,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그런 식의 해결이 한일관계 회복에 도움이될리도 없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필요하지만, 입법해결은 불가능하다. 정말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원한다면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사죄했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인 위안부도 많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사죄하지 않는 자와 용서하지 않는 자의 대립만이 큰 목소리가 되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들, 좌우의 정치적인 입장을 넘어서 이 문제를 윤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풀려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2년 후인 2015년은 한국에는 해방 70년, 일본에는 ‘전후 70년’, 한일 양국 에는 국교 수립 50년의 해이다. 식민지배의 피해를 입은 ‘위안부’들뿐만 아 니라 한때 ‘식민자’의 입장으로 조선이나 ‘만주’에 있었던 일본인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양국의 ‘식민지배—피지배’ 당사자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양쪽 당사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과거의 지배가 남긴 문제를 해 결해야 한다.

전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가치관을 지 켜왔다. 대다수의 국민이 ‘반전’의식을 가질수 있는 교육을 실시해온 점은 인정받고평가되어야한다.

하지만 ‘제국’으로서 존재했던—식민지를 만들어 지배했던—점에 대 한 반성의식은 ‘반전’에 대한 반성의식만큼 일본 국민의 공통인식으로 형 성되어 있지는 않다. 일본이 ‘당사자’들의 마음에 와닿을수 있는 형태로단지 ‘반전’만이 아니라 ‘반지배’, ‘반제국’의 사상을 새롭게 표명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 및 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의의가 깊다.

2001년 인종주의와 차별 문제를 논의했던 더반 세계회의에서는 노예제 와 식민지배가 논의되었고, 식민지배에 대해 ‘어디서든 언제든 비난받아 마땅하며, 재발은 방지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이 채택되었다. 일본의 일부 정치가들이 주장하듯이, 과거에 제국주의적 침략을 저지른 것은 일본 만이 아니다. 그러나 서양이 시작한 제국주의에 참가해버린 일본이 내놓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서양에 의해 지배받고 상처받았던 아시아가 처음으로 서양을 극복하는 의미를 갖는다.

2013년 1월 29일 뉴욕 주 상원이 통과시킨 결의는 다른 결의들과 마찬가 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20만 명의 여성이 위안부로 강제동원됐다”(『한 겨레』, 2012.1 30.)고 생각하고 있다. 결의안을 발의한 의원도 “위안부 할머니 들을 만나고 나서 위안부가 인신매매이고 범죄행위”(같은 기사)라고 말한 다. 일본은 그에 대한 해명을 하려 하지만, 그보다는 과거에 무라야마 담화 등을 통해 아시아에 대해 표명했던 사죄의식을 이제 위안부 문제를 통해세 계를 향해 표명하는 편이 문제 해결의 의미도 커진다.

이제 지원자들은 그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의 불행을 내 일 처럼 아파했던 이들이라면, 정의의 독점이 아니라 그들의 ‘지금, 이곳’을 안 온하게 해주는 일이야말로 지원자의 더욱더 중요한 역할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때는 할머니들에게 미움과 분노가 자라도록 하는 정보만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투사 할머니’ 나‘성노예소녀’가아닌한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인식이 한국 교과서에 실리고또일본과 화해 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모든 위안부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한일 간의 화해는 아마도 영원히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우리가 그저 ‘일본군의 만행’만 기억하며 분노를 되새기는 국민으로서, 식민지화된 국 민, 고난에 처했던 국민으로서 그 수난을 딛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 제까지고 우리가 입은 상처를 들이대며 그들을 상처 입히는 일에 탐닉하는 일이기도 하다.

불화는 보수를 우경화 시키고, 냉전적 사고는 기지를 존속시킨다. ‘위안부’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기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화해는 필요하다. 진정한 ‘아시아의 연대’는 그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에 앞서 시작된 서양의 제국주의와 그들이 남긴 냉전적 사고를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청산 문제를 다음 세대에게까지 물려주는 것은 ‘적대’를 물려주는 일이다. 적대를 물려주는 일은 우리의 트라우마를 아직 어린 그들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역사를 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 로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 제국주의와 냉전으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식민지의 ‘복잡성’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만든 타자에 대한 적대를 넘어설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지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현실의 것으로 꿈 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