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에 나온 정대협의 심포지엄 자료집에는 북한에서 온 ‘축하의 글’이 실려 있다.
지난 기간 귀 협의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지난 세기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헤아릴 수 없는 특대형 반인륜적 범죄와 강도적인 침략 력사에 대 해 폭로 규탄하고 응분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앞장서서 벌려왔습니다. 이것은 해•내외 온 겨레와 국제사회의 커다란 지지와 찬양을 받고 있으며 우리 겨레를 민족의 자주권 수호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로힘있게 추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감행한 과거 죄악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덮어버릴 수 없으며 이를 반드시 결산하는 것은 민족 공동의 과제입니다.
특히 오늘날 일본이 저들의 천인공노할 범죄적 만행과 과거 침략 력사를 외곡 [왜곡]하고 독도 강탈 기도와 재침 야망을 더욱 로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 은온겨레의 커다란 격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의 ‘을사5조약’ 날조 105년이 되는 올해에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력사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를 만천하에 낱낱이 폭로하며 민족의 운명과 리익 을 해치는 친일사대매국행위들을 반대하는 다양한 대중활동들을 보다 힘차게 전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민족화해협의회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녀성분과 위원회의 「축하의 글」, 『정대협 창립 2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 2010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말한다』, 2010. 11. 18.)
위안부 문제에 관한 북한의 인식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과거 침략력사를 왜곡’, ‘독도 강탈 기도’, ‘재침 야망’을 읽어내려는 점에서 표현은더 거칠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인식과 같다. 북한이 그렇게까지 강한 어조 로 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을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적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것은 비약일 뿐이다. 일본 의 국방예산은 금액 자체는 많지만,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미국이나 중국(2.1퍼센트)은 물론 한국(2.7퍼센트)보다도 낮다(스톡홀름 국제 평화연구소, http//10rank.blog.fc2.com/blog-entry-95.html). 패전 후 60년 이 상, 미국과 한국은 징병제를 유지했고 타국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지만, 일 본은 그런 적이 없다. 물론 그건 일본이 이른바 ‘평화헌법’을 지켜왔기 때 문이다. 지금은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한국이나 북한은 오 래전부터 늘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사실화하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군국 주의를 비난한다면 북한부터 비판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한국의 진보가 북한의 군사주의를 큰 목소리로 비난하는 일은 없다.
정대협은 1990년대에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 간주하고 북한과도 연대해왔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부터 정대협의 운동은 ‘여성의 인권 문제’를 기치로 하고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문 제제기는 없었다.
한국의 운동은 냉전 종식 이후 위안부 문제를 매개로 일본의 진보세력 과도 연대했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이후의 정대협의 운동은 냉전 종식 후 에도 이어진 진보좌파의 국제연대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의 연대에 일본의 우파가 반응하고 이어서 본격적인 역사논쟁으로 확대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대협 대표가 일본에 ‘우익’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없다면서 ‘일본을 바 꾸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윤미향 대표의 도쿄 YMCA 강연, 2012. 6. 9.). 그것은 일본의 진보가 꿈꾸었던 ‘일본 사회의 개혁’ 과 통하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정대협의 운동도 ‘위안부 문제 해결’보다 ‘진 보’가 세상을 바꾸는(‘우익’을 물리쳐 세계를 이끄는) 정치적인 문제에 더 중 점이 두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무조건 ‘우익’으로 몰고 비난해온 진보의 운동 방식은 일본의 반발을 심화시켰을 뿐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 싼 20여 년의 세월은 그런 20년이었다. 그러면서 기지 문제에서처럼 “주연 은 여성운동가이고 현장 여성은 조연, 엑스트라”(김연자, 255쪽)가 되는 상 황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구조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은 위안부 문 제 운동이 늘 ‘민족’과 ‘여성’을 앞세웠고 ‘위안부’라는 존재가 그두 이미지 를 상징하면서 그것이 한국에서는 절대적인 정의 담론으로 존재할 수 있었 기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는 명제는 그 모든 모순을 덮으면서 강경파 들이 중심이 되어 좌우대립을 격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민족/국가 간의 대 립을 만들고 유지시켰다. 90년대 초반, 일본의 우파들이 결코 다수도 아니 고 목소리가 큰 것이 아니었는데도, 운동이 그들을 ‘일본’을 대표하는 것처 럼 간주하고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로 취급하고 심지어는 우익과는 상관없 는 이들까지 ‘우익’으로 딱지를 붙이며 적대시했던 것은 그런 냉전적 사고 가 시킨 일이다. 정대협의 북한과의 연대는 ‘민족’으로서의 연대라기보다 는 실은 ‘좌파’로서의 연대였다. 그 자체야 문제시될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결속에 중점이 두어지면서 좌파와 우파의 합작품이었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거부한 것이 그런 구조 속의 일이라는 데에 있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에 북한을 배제하고 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하고 쌓아온 신뢰를 근 간부터 뒤흔든 문제이기도 했다. 의식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민족’이 라는 이름의 연대는 실제로는 일본에 저항해온 세력의 연대라는 점에서 언 제까지고 일본을 비난하기 쉬웠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본 정부가 주도한 ‘사죄와 보상’에 참여했던 대다수 일본 국민들을 보 는것이 아니라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우파의 말과 행동에만 주목해온 것도, 그런 구조 속의 일로 볼수 있다.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의 일 본 비난은 ‘한국’으로서의 비난이라기보다는 과거에 ‘제국’에 저항했고 여 전히 일본 제국과 미국 제국에 저항하고 있는 ‘좌파’로서의 비난이기도 했 다. 그러나 문제는 ‘위안부 문제’가 ‘국가’ 간 문제이니만큼 우파든 좌파든 ‘함께’ 내놓는 해결안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대사관 앞 소녀상이, 일본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려는 강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구조 속의 일이다. 원한에 찬 응시는 단순히 ‘민족’이라기 보다는 제국주의에 ‘저항’했고 이후에도 투쟁을 계속해온 ‘민족좌파’를 대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녀상은 좌파운동이 싹트기 전에 ‘민족’으로 저항한 유관순일 수는 없다. 따라서 대사관을 향한 ‘소녀상’의 그 응시에는 그들의 자긍심도, 운명으로 체념하는 식의 일본에 대한 용서 도, 자신을 그런 곳으로 가게 한 이들—업자나 부모에 대한 원한도 존재할 수가 없다. 기금과 화해하고 일본을 용서한 위안부가 배제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바로 그런 사고가, ‘자민당’은 ‘사죄’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기도 하다. 진보좌파는 그렇게 ‘정의’를 ‘독점’했고, 나아가 왜곡해 사 용했다. 한국 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남겨두지 않고 받아버린 건 북한의 청구권까지 받아버리려는(장박진) 자세를 만들었던 냉전체제 속의 사고였다는 사 실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북한과의 연대의 모순을 보여준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는 천황제 파시즘에 반대하는 많은 저항세력이 고 문을 받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그런 탄압을 받은 이 들이 천황제 자체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당시의 천황제는 ‘국체’라는 이름 아래 일본만의 고유한 시스템으로 칭송되었고, 모든 일본 국민이 그것을 우러러 받들고, 꽃다운 젊은이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했으니까.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국’은 ‘국가체제’를 절대권력으로 하여 그 권력 에 대한 국민의 ‘태도’를 검증했다. 그 결과로 제국 내부의 사람들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정치체제를 둘러싼 분열, 그 분열이 제국과 냉전의 붕괴 후에도 이어져 현대의 내부냉전에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본만의 일이 아니다. 한반도 역시 같은 이유로 ‘해방 후’에 도 심각한 정신적•심리적 분열을 경험해왔다. 한국전쟁과 분단은 좌우대 립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시대에 협력이나 저항중 어느한쪽의 태도를 취할 것을 강요당하도록 만들었던 일본 통치의 결과이 기도 했다. 일제 시대 때 ‘저항’한 이들은 대부분 출신 민족과 상관없이 좌 파 계열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의 좌우분열은 단순한 이념대립이 기 이전에 민족/반민족 분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진보/보수의 심각한 분열과 대립의 근원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있다.
패전 직후 북한에서는, 좌익 쪽 사람들이 ‘부르주아’로 지목한 사람들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호철의 소설 『남과 북』은 그때 부르주아〓‘친일’이라는 사고방식이 그들의 몰수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남한으로 도피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하면서 ‘심정적 우익’으로 변해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일은 일본인 사이에서도, 일본 본토와 피식민자 사이뿐 아니라 식 민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패전 후 600만 명 이상의 병사 및 식민자들의 귀환이라는 전무후무의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잃게 되는 쓰라린 경 험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돌아간 ‘내지’에서도 ‘식민자’라고 손가락질당했 고 스스로를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해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중에는 식민지에 남겨두고 온 재산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 서 ‘심정적 우익’(아사노 도요미)이 된 이들도 많다는 점이다. 한일기본조약 은그런 이들의 청구권도 포기시킨 조약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이란, 미국이 주도했던 냉전구조에 정치적으로 편입되어 결 과적으로 ‘제국’을 둘러싼 논의를 충분히 하지 않아도 되게 된 시대였다. 그 동안 정치는 보수 자민당이 집권해 보수 정치가들이 주도했지만, 사상적으 로는 ‘제국’을 비판하는 좌파진보가 학계를 주도하면서 진보적이고 평화주 의적인 시민을 만들어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균형이 전후 일본을 지탱 해온 것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외부에서 보기보다는, 보수정치가도 ‘전쟁과 제국주의’를 반 성했고 진보시민도 미국이 주도한 ‘자유민주주의’의 혜택을 향유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고도 경제성장 시대를 향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달려 온 듯 보였던 시대가 끝나자 잠재되어 있던 대립이 표면화된 시대가 바로 1990년대였다. 이른바 ‘냉전’이 끝나자 냉전구도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군 소민족들의 목소리가 대두되었고, 국가 간 경계를 허무는 ‘세계화’가 급속 히 진전되면서 그에 반발하는 형태로 그동안의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시대가 ‘불황’과 연결되면서, 위안부 문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격하 게대립한 것도 그런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커다란 냉전이 끝나면 서 진보도 보수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재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저마다 위안부 문제를 통해 일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려한시기였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식의 역사인식 논쟁이 되어버린 위안부 문제가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접점을못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의 진보가 일본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도 자신과 다른 사고를 무조건 ‘우경화’의 증거로 보려 했던 냉전적 사고가 시 킨 일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도 한국도 일관되게 ‘일본의 우경화’를 외쳤지 만, 이후 일본에는 오히려 패전 후 처음으로 진보정권이 들어서 그런 비판 이 올바른 비판만은 아니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 에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선 데에는, 2011년 8월의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비 롯한 한국과의 갈등이 영향을 끼친 면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한일 간의 연 대는 정치에서도 효과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진보좌파의 연대 운동은 결과적으로 20년 전보다도 더 많이 위안부 문제에 반발하는 이들을 만들어놓았다.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을 통해 ‘일본 사회를 개혁’하겠다던 좌파 운동 방식이 결코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증명한 셈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좌절했지만, 지원운동은 문제 해결을 담당하는 주체 인 일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운동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운동이 ‘위안부 문제’ 자체보다도 정치적 싸움으로 변질된 데에 있었다. 말 하자면 위안부 당사자나 동아시아 평화를 우선한 윤리적이고도 합리적인 지점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과 아이덴티티 확인을 위안부 운동보다 우선시했던 것이다.
위안부를 지원해온 한국의한운동가는 “한국이 이제 인권국가로 인정받 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이 문제를 우리의 요구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 한다(외교부 주관 위안부문제대책회의, 2012. 11.). 또 같은 장소에 있었던 대표 적 진보신문의 기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회입법 요구 등의 기존 방식 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생각은 더 이상 합리적이지 도윤리적이지도 못하다.
지금 필요한 일은, 그들을 ‘올바른 조선인 투사’로 존재하게 하면서 ‘국가 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아니다. 그저 그들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중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일본의 적국 여성들의 ○○○ ○○○ ○○○ ○○○ ○○○○, ○○ ○○○○ ○○○ ○○○ ○○○ 소녀상을 통해 그들을 ‘민족의 딸’로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와 국가의 희 생자였던 ‘위안부’를또다시 국가를 위해 희생시키는 일일 뿐이다.
2012년, 미 하원 결의 5주년을 맞아 미국의 한인단체가 위안부 문제 해결 을 위해 흑인단체를 동참시킨 것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보편적 인권 운 동’으로 연계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이지만, ‘여성인권’으로 연대해온 그동 안의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왜 위안부로 ‘식민지배 치하 가부장제하의 가 난한 여성’이동원되었는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
위안부 문제는 국가가 자국의 세력(경제력)을확장하기 위해 동원한 가난 한 여성들의 문제다. 그녀들은 ‘이동’에 의해 경제력을 갖춘 주체로 재주체 화했다. 실질적으로는 보수를 받지 못하거나 열악한 보수밖에 받지 못한경 우가 많아 보이지만, 자본주의적 경제가 “개인을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 시키고, 제국-코스모폴리스의 인민으로 삼”(가라타니 고진, 207쪽)는 과정 에서 생긴 존재이기도 했다.
일본의 지원자들이 그 점을 보지 못한 것은 ‘천황제 파시즘’ 비판에 대한 집착이 컸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기금’이 단순한 ‘위로금’으로 인식된 것도 ‘천황제 파시즘’이 ‘전후’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진보의 ‘전후 이해’에 있다. 천황제에 저항하면서 현실정치를 바꾸려 했던 염원과 무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원자들이 업자의 존재를 무시한 것도 그런 문맥에서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가장 비판적인 이들이 ‘위안부’ 라는 존재가 국가의 자본축적을 위해 동원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간과 한 셈이다. 진보좌파는 이윤을 낳는 자본주의에 민감하면서도 노동의 대가 의반이상을 축적했던 업자와 이들의 존재가 만든 상권에 기생한 상인들의 존재를 잊거나 은폐했다.
실제로 ‘왕언니’가 ‘원정’간 마을 사람들이 이들의 출현을 받아들이고 마 을경제를 부흥시켰듯이, ‘위안부’의 출현은 단순히 풍속(윤락)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았고 경제적인 의미 또한 작지 않았다. “낭자군에 기생하는 형 태로 일본인의 상업활동이 형성되고/되어, 발전을 이루었”고 그중에서도 “기모노집, 일상잡화집, 여관업, 의사, 그리고 사진업, 세탁소 등, 모두 낭자 군의 번영에 ‘기생’하는 형태로 발생한”(야노 도루, 43쪽) 일이 있었던 것처 럼, 그런 식의 상권이 머지않아 타국의 토지와 제도에 관한 권리를 획득하 게 되는 것이 제국주의였다는 점에서, 낭자군들은 무의식적인 제국주의자 들이기도 했다.
일본 우익의 어떤 이는 “자민당은 좌익정당이다”라면서 “이걸로 자민당 이 전후 좌파의 하수인이라는 걸 알았다”, “점점 더 왼쪽으로, 즉 차분히 역 사의 진실을 재검증하는 게 아니라 과도하게 속죄의식만 강해졌다”, “이런 역사관 편향이 쇼와 60년 이후 자민당 정권 안에서 급속하게 강해졌기 때문에, 그 10년 후에 드디어 무라야마 담화 따위가 나오게 되었다”(나카니시 데루마사)고 말한다. 그럼에도 진보는 자민당 정부의 다양성을 감안하기보 다는 불신해왔던 것이다. 몇년 전에 문제발언을 한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항공막료장을 정부가 해임한 사건을 두고 한 우파학자는 “자민당의 국적國賊행위”(와타나베 쇼이치)라고 비난하기도 했을 만큼 일본의 우파는 폭이 넓다. 그럼에도 ‘자민당’에게는 ‘사죄의식’이 없는 것으로 치부한 ‘정 의의 독점’이 결과적으로 일반 시민의 혐한과 우경화를 가속화시키기도 했 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식의 경직된 사고가 미국이 만든 해방 후 냉전체제 속에서 굳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제국은 붕괴했지만, 냉전체제는 그렇게여 전히 동아시아를 분열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