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새로운 조치에 착수하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는 또 있다. 2007년 북 미와 유럽 각국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국회 결의가 속속 이루어졌다. 이는 지원단체 측이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를 대상으로 벌인 활동의 결과로 성사된 한국, 네덜란드, 필리핀 ‘위안부’들의 증언이 ‘효력을 발휘한’ 결과였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인신매매의 하나’ 로인정한 앰네스티의 의견을 유럽 의회의 결의가 받아들인 것이큰효과가 있었다(하바구미코).
그 결의에는 같은 해 봄에, 당시의 아베 신조 수상이 ‘위안부’ 문제에 관 해 “강제성은 없었다”고 한 발언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수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아베 수상은 미국에 ‘사죄’했지만, 일본의 일부 의원들이 미국 신문에 「THE FACTS」라는 제목으로 광고를 내서 아 베 수상의 ‘사죄’를 부정한 것이(『워싱턴 포스트』, 2007. 6. 14.) 오히려 역효과 를 내서 국회 결의를 이끌었음이 분명하다. 아베 수상이 “넓은 의미의 강제 성은 있었지만 좁은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한 것은 ‘강제로 끌어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본군이 직 접 ‘강제연행’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는 증언에서도 많지 않으니, 아베 수상의 항의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베 수상은 피해자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실제로 아베 수상은 “20세기는 인권이 세계 각지에서 침해당한 세기 였는데,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산케이 신문』, 2007. 4. 27.)라면서 잘못은 일 본만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다른 나라의 ‘책임’까지 환기 시키려는 말은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책임 회피로 간주될 수밖에없 다. 무엇보다그일본과 전쟁을 벌였던 연합국들이 그런 문제제기를 곧바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일본은 자신들 기준에서의 ‘팩트’(사실) 주장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던 2007년의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의 결의를 구속력이 없다고 해서 무시해온 결과가 오늘의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기도 하다. 2007년 “일본의 변호를 자처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아베 수상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는 쪽으로 선회”(기타오카 신이치) 했는데도, 2013년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 장의 발언은 2007년의 아베 사태에서 배운 것이 없어 보인다. 물론 이번에 는 미국의 위안소 이용을 직접 거론했으니 사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군의 위안소 이용’이라는 틀은 같아도 일본의 전쟁은 길었고 전쟁터도 넓었다.
미 하원의 결의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적인 군대매춘 제도 ‘위안부’는 그 잔혹성과 규모에서 전례를 볼 수 없는 것으로, 집단강 간, 강제중절, 굴종, 신체절개, 죽음이나 결과적 자살로 이어지는 성폭력을 포함하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그 래서 “최근 일본의 공인과 개인이 위안부의 고통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진지 한 사죄와 후회를 표명했던 1993년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의 ‘위안부’ 에 대한 성명을 깎아내리려는, 혹은 철회하려는 욕구를 표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이런 식의 세계의 시각에는 물론 문제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네덜란드인 여성의 사례가 존재하는 한 ‘군에 의한 강제성’은 있 었다는 것은 진실일 수밖에 없다.
물론 군에 의한 ‘강제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예 외적인 사태였다는 이해는 필요하다. 그러나 ‘구조적인 강제성’을 묻게 되 면 일본으로서는 강제성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 에서도 1990년대의보상에 이은 추가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결의는 피해 여성 중에도 보상금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2013년 현재 일본을 제외한 세계는 미국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고 국회의원의 결의까지 내놓은 미국 이그런 결의를 금방 철회하거나 수정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기금 해산 이후에 일본 정부 가더 이상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없지 않다. 한 국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여전히 데모가 이어졌던 이상 무시로만 일관할 것 이 아니라 사태를 타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다. 물론 위안부 문제 해결 을 위해 나름대로 애써왔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실망과 함께 사태 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모순이 있다 하 더라도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외교’의역할이 아닐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의 관계만 본다면 식민지배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분쟁하의 여성에 대한 폭력의 상징’으로만 인식된 것은 ‘위안부’들 사이 의 그런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점에서 지원자들의 호 소나 유엔 결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설령 ‘식민지배’로 인한 일이었다고 인식했다 한들 미국과 유럽의 의회가그점을 근거로 일본을비 난할 만큼 정당한 입장인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는 그 사실조 차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은 사실이 아니므로 ‘세계의 인식’에 모순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지만 ‘위안부’ 문제가 ‘여성’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명확한 이상, 비판 내용을 전부 수용할수없다고 하더라도그부분에만 얽매인다면 일본 이 했던 일까지도 부정당하고 진심을 의심받게 될 뿐이다. 2007년에 많은 국가들이 국회 결의를 내놓은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에 동시대적으로 문제화되었던 전시강간 문제—‘전쟁범죄’와 결부되면서 전 세계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의 견해나 요구를 그저 부조리한 ‘외압’으로 치부하고 부정 해버리는 것은 일본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킬 뿐이다.
지금 일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세계의 관심을 역으로 이용 해서 일본의 생각과 가치관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통해 과거의 국가나 제국이 거기에 소속된 이들에게 저지른 불행에 대해 그 후예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기 회가될수도 있다.
‘위안부’ 문제란 전시뿐 아니라 전쟁대기 상태(주둔)에서도 존재하는 문 제다. 현재의 동아시아에 주둔 중인 미군 역시 병사를 ‘위안’하는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고, 언젠가는 이 문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 그 때는 물론 미국도 비판받아야만 한다.
그에 앞서 ‘제국’ 구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 하기 위해 위안부를 필요시했던 나라로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제국’의 욕망과 지배를 다른 제국 국가에 앞서서 반성하는 의미를 갖 는다. 이미 영국과 이탈리아가 그런 사죄를 한 적이 있지만, 서양의 제국주 의를 의식하며 제국주의로 향하게 된 일본의 사죄는 아시아의 통합을 위해 서도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전후 일본’은 비로소 ‘제국후 일본’(포 스트 제국 일본)이될수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일본 정부의 ‘기금’안이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죄나 보 상의 형태를 정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는 반드시 지원단체와 ‘위안부’를 참여시켜 협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원 단체나 위안부들도 이제까지의 대표적인 주장 이외의 의견을 가진 이들 또 한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와 당사자 간의 협의를 위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양국의 관계자/지식인들도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란 당사자와 운동가들 만의 판단으로는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이20년동안의 세월이 그것을 증명한다.
만약 해결안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서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하게 된다 면, 그때는 세계를 향해 일본의 생각을 밝히는 공식적인 형태를 취하는 편이 좋다.
그때 일본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위안부’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난 ‘식민지배’ 문제임을 말하고,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그런 한일협정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한일기본조약 자체를 흔드는 어려 운사태를감수하지않고도한국과새로운관계를구축할수있다.
그때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는 기간에 희생당했던 수많은 사람 들-3•1독립만세운동, 간토 대지진, 병사로 동원되어 참가한 전쟁, 고문등 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진심을 그 ‘사죄’ 속에 담아야 한다. 그때는 ‘국민기금’도 한국인 ‘위안부’에 대한 지급 상황 등에 대한 미공개자 료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를 지원해온 이들은, 이전보다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 들이 많아진 상황에 대한 반성을 담아, 일본 정부가 ‘정부 국고금’으로 보상 에나선다면 그런 정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지원해야 한다.
한국의 ‘위안부’들이 ‘기금’을 ‘위로금’으로 받아들이고 반발한 이유는 과거에 받았던 ‘차별’ 경험과 기억 때문이다. ‘식민지’의 ‘위안부’들은 자신들 이 ‘그곳’에 있게 된 이유가 ‘가난한 여성’이기 때문이었고 그 가난이 ‘피지 배민족’이라는 계급성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다시 한번 ‘모욕’당하는 일을 경계했고, 그 결과로 ‘반발과 저항’이 강했던 것이다.
사실 ‘기금’ 성립 당시엔 지원자들 간에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한 ‘격론’이 있었다(하나후사 에미코). 그렇다면 ‘격론’ 끝에 묻혀진 사고를이시점에서 돌이켜볼 필요도 있다.
현대 일본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의식을 갖는 일본인들이 그렇지 않 은 이들보다 훨씬 많다. 그렇다면, 그런 ‘일본의 목소리’가 외부에도 들리도 록해야한다. 기나긴세월동안‘위안부문제해결’을위해노력하고동참한 이들이 더 많은데도, 바깥에 들리는 ‘일본’은 여전히 ‘사죄하지 않는 일본’ 이다. 그렇게 만든 것은 ‘일본의 우파’가 목소리가 커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의 ‘사죄의 목소리’를 죽여온 ‘일본의 좌파’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더욱 철저한 정의 의식에서였건 현실 정치를 위한 것이었건, 그 부분에 대 한반성도 필요하다.
이제 일본은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내부에서의 대립은 건 강한 대립으로 이어가더라도, 때로 외부를 향해 ‘일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 ‘하나의 목소리’를 아직 보상받지 못한 ‘위안부’들이 들을 수 있 도록 해주는 일, 그것만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