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본 것처럼, 한국의 정대협만 일본의 ‘사죄와 보상’ 방식을 비판해온 건 아니다. 일본의 지원자들 역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일본 정부를 격하게 비판해왔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는 진보좌파세력을 중심으로 한 ‘전후 일본’의 교 육을 받은 선량한 시민들이 ‘제국 일본’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제국 일본’의 국민동원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이상, 운동이 ‘제국 일본’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흐른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했 다. 하지만 ‘위안부’를 지원했던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위안부’ 문제가 전 후 5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문제화된 것을 ‘전후 일본’의 문제로 생각했 고, 운동은 그런 일본을 존속시킨 것으로 간주된 ‘현대 일본’ 비판으로 향했 다. ‘전후 일본’과 ‘현대 일본’을 살아온 일본 국민 전체의 가치관을 다시 묻고 확인하는 운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어려웠던 것은 바로 그런 식으로, 운동이 ‘현재’를 묻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부정은 1991년 ‘위안부’ 문제가 ‘문제’로서 세 상에 제기되었을 때 곧바로 시작되었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의 「위안부 문제란 무엇이었는가」(『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92. 4.), 이타구라 요시아키板倉由明의 「검증 위안부 사냥 참회 진상: 아사히 신문에 공개 질문, 아비규환 의 강제연행은 정말 있었는가」(『쇼쿤諸君!』, 1992. 7.), 우에스기 지토시上杉千年의 「총괄 위안부 노예사냥의 ‘꾸며낸 이야기’」(『지유自由』, 1992. 9.), 고노 담화 후의 가토 마사오加藤正夫의 「고노 관방장관 담화에 이의 있다, 위안 부 강제연행은 사실무근」(『겐다이 코리아現代コリア』, 1993. 10.) 등은 그런 반발 중의 일부이다. 이런 반발의 대부분은 ‘위안부’를 그저 ‘자발적’인 매춘부로 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비판은 ‘사냥’이라는 표현이 나 ‘군이 강제로 끌어’갔다는 주장에 대한 이의제기, 즉 ‘강제연행’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에 나섰던 이들은 그런 의문들을 곧바로 ‘제국 일본’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으 로 치부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그대로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현대 일 본’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이후 일본의 지원운동이 ‘강제’나 ‘사냥’의 주체 였던 ‘업자’나 포주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본군’과 ‘제국 일본’ 비판 과, 그들의 흐름을 이어받는 ‘현대의 우익’ 비판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들 지원자들이,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과 일본 정 부를 똑같이 취급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발표하긴 했어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해) “국가와 국가 간의 전후보상은 처리되었”(『아사히 신문』, 1994. 6. 17.)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개인보상 은 실시하지 않는다고 해왔지만 민간단체의 기금을 통해 전前 위안부를 지 원하는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보상에 가까운 형태의 해결을 지향한다”(『아사히 신문』, 1994. 8. 13.)면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발족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지원자들은 “어디까지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구상”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민간단체의 거죽옷을 씌”(스즈키 유코, 1997, 237쪽)운것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 비판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수반 정권은 미일안보 반대에서 유지, 자위대 반대에서 용인이라는 자민당의 정 책•노선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서 사회당의 주체성을 포기”한 것으로 받아 들이면서 “이러한 무라야마 내각에서 사회당의 전후배상 정책도 급변하여 ‘개인보상•국가배상’에서 ‘위문금’ 구상으로 전환, 여당 내에 전후 50년 프 로젝트, 동 프로젝트•종군위안부문제소위원회가 만들어져서 95년 5월 ‘국 민기금’을 발족”(스즈키 유코)시키게 되었다고 이해하면서 행해진 비판이 었다. 말하자면, 당시 정권의 안보정책 전환에 대한 비판이 그대로 전후배 상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표명된 셈이다. 말하자면 이 비판은 ‘전후 일본’의 안보정책을 담당해온 ‘자민당’ 정권에 대한 불신과 (사회당 정권이긴 하지만) 그 정책을 이어받았다는 것으로 인한 당시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만든 것이 었다.
당시의 일본 정부가 나름대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건“자민당과 관료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국가자금으로 개인보상을 실시하는 것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도의적 책임은 인정했고, 사죄하고 보상사 업을 실시한다는 것에는 찬성했습니다. 사회당은 법률적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보상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민당과 관료가 합의하는 범위에서 보상사업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와다 하루 키, 미출간원고)라는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의 신문은 「‘개인배상’으로 대립, 여당 삼당」이라는 제목으로 “여당 삼당 수뇌회의에 동석한 이가라시 관방장관이 갑자기 제3의 기관을 통해 전 위안부에게 돈을 지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을 꺼냈다”며, 이발 언이 “전 위안부를 위한 복지시설 건설이나 의료 부담 등 간접적인 보상을 국비로 충당하는 착상을 정부 내에서 검토하도록 한” 결과였다고 전한다 (『아사히 신문』, 1995. 6. 15.). 자민당과 사키가케가 “국가 간의 배상은 완료되 었다”고 반발하며 “마음대로 할 거면 예산은 인정 못 한다”고 했고, 자민당 간부가 “수상 관저가 주도하는 진행 방식에 불신감을 숨길수없다”(같은기 사)면서 반발하는 가운데, 정부가 보상을 하기로 결정하고 간접적인 보상 이나마 “국비로 충당하는” 정책을 강행했다는 상황이 명확히 보이는 것이 다. 심지어 당시의 한국 정부(외무부)는 ‘기금’에 대해 “지금까지의 당사자 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성의 있는 조치”(『아사히 신문』, 같은 날짜의 다 른기사)로받아들였다.
‘기금’은, ‘자민당과 관료의 합의’를 바탕으로, 전후배상에 관한 조약 때 문에 직접적인 국가보상이 불가능했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말 그대로 “민간기금의 거죽옷을” 입혀서, “간접보상”을 하려 했던 일본 정부의 궁여 지책이었다. 그건 ‘기금’이 “내각의 결정에 의해 설립”되어 “법인의 결정과 행동은 내각부와 외무성의 대표자가 항상 감독하고 있었고 모든 문서는 이 들 관청의 검토를 거쳐 작성, 인쇄되었으며”, “기금의 사무국장 이하 유급 직원의 인건비, 활동비, 사업비는 모두 정부 예산이 부담”하는, “정부의 정 책을 실시하기 위한 재단법인”(와다하루키, 2012, 63~64쪽)이었다는 점을 봐도 분명하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에 제기한 주역이었던 『아사히 신문』은 “민간모금에 의한 ‘위로금’으로 국가의 ‘사죄’가 될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드러내면서도 “이런 방식을 취할 생각이라면,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고 있 다는 것이 그녀들의 가슴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해 야 한다”(사설, 1994. 9. 2.)고 말했다. 다른 진보신문 역시 “백보 양보해서 민 간기금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로서 보상 정신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이니치 신문』사설, 1994. 9. 2.)는 등 정부가 사업을 잘 해 낼 수 있도록 주문을 달았다. 이들은 ‘기금’이 ‘국가보상’의 마음을 담은 것 임을 제대로 이해했던 것이고, 이러한 의견들이야말로 당시의 ‘일본 국민’ 의다수의 생각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원자들은 변함없이 기금을 반대했다. 이들은 기금을 “또 다른 형태의 폭력’, ‘국가의 전쟁범죄를 재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단정하고, 정 부가 말하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표현은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스 즈키 유코, 239쪽)것으로만 생각했다.
이들은 “‘국민기금’은 겨우 싹트기 시작한 일본인의 주체적 전쟁책임 을 더 자라기 전에 뽑아버리기 위해 구상된 것이나 마찬가지”(스즈키 유코, 238쪽)라거나, 정부의 ‘기금’ 정책은 “사회의식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경 시”(니시노 루미코, 140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금’ 창설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자세를 바로잡을 기회가 도래했을 때그 싸움을 포기하는”(같 은글, 141쪽)것이라고 말한다.
지원자들은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의 개혁’과 결부지어 생각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원자/단체들이 일본 정부의 인식과 부정파들의 인식을 똑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기금’에 반대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반영한 ‘일본 사회’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현실 정치를 바꾸는 수단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비판이단 지 ‘과거’나 ‘제국’ 비판에 그치지 않고 ‘현재’와 ‘우익’을 그런 과거를 이어 받는 것으로 간주하고 비판하는 식으로 전개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 측의 이해가 “일본의 정치•사회적 현실이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기금안을 점점 주저한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과 거의 비인도적 범죄를 은폐하고 호도•옹호하려 한다”(이효재 외, 「역시 기금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한일 간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를 바라보며」, 『세카이世界』, 1995. 11.)는 식이었던 것도 일본의 지원자/단체들의 영향을 받은 것 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저 일본 정부의 정책을 “얼마간의 돈이나 물질적 이 익으로 모든 현안을 결말지으려 한다”(같은글)고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국이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을 구별하지 않 고 ‘기금’을 불신하게 된 데에는 일본 쪽 지원자/단체들의 인식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금’을 “천황•천황제의 전쟁범죄•전쟁책임 을 다시 면책•봉인시켰다”(스즈키 유코)고 판단하고 ‘위안부’ 문제를 위한 ‘운동’을천황제 비판으로 연결시켰다.
위안부들을 지원해왔던 이들이, ‘기금’이 ‘자민당과 관료의 합의’로 만들 어졌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기금’을 비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위 안부’ 문제를 당시 진행된 ‘교육법’이나 <기미가요> 문제와 결부시켜 ‘전후 일본’ 및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도, 그런 현실정치를 바꾸 려는 열망 때문이었다고 볼수 있다. 그건 냉전 종식 후 본격화된 일본 좌우 세력의 ‘내부 냉전’의 시작이었다. 말하자면 진보는 세계 냉전이 종식된 데 에따라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역사인식 논쟁으로 커져간 것은그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좌우세력의 대립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묻는 일이기도 한 역사 인식 논쟁에 이르게 되면 쉽사리 ‘일본 국민’으로서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이명박 정부 이후 표면화된 한국의 좌우대립이 보여 주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처음에는 ‘강제연행’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했던 이들을 본 격적으로 반발/결집시켜 1997년에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을 만들었고 2000년 이후에는 ‘혐한류’에 호응하는 혐한파들이 늘어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어서 ‘자이니치在日의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모임’ 과같은 본격적인 증오에 가까운 혐한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반 시민이 늘어 나게된것이다.
위안부를 지원해온 이들이 ‘제국 일본’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그것을 바 탕으로 한 ‘일본’의 ‘사회개혁’을 지향한 것이 문제될 리는 없다. 하지만 부 정자들의 의문을 역사인식과 연계하여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의 개혁과 결부시켜 다루는 ‘운동’ 방식이 성공할 가능성은 작았다.
‘위안부’들에게 실제로 필요했던 것은 ‘일본’이나 ‘지원자 측’을 위한 ‘사회개혁’이 아니라 ‘위안부’들 자신을 위한 ‘사죄와 보상’이었다. 그런 의도 는 없었다 해도, ‘위안부’는 결과적으로 ‘일본 사회의 개혁’을 위한 ‘도구’로 쓰였던 셈이다. 물론 대다수의 지원자들은 거기까지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 이다. 그러나 운동을 이끄는 이들의 방향 설정이 천황제 비판과 ‘일본 사회 의개혁’에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기금’이 정부 나름의 ‘수단’으로서, 당시 국민의 ‘총의’를 모은 것이었는 데도 부정당한 것도 그런 맥락 속에서의 일이었다. ‘기금’은 ‘사죄와 보상’ 을 했지만 지원자들의 일부가 바랐던 ‘천황 비판’의 자세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운동 측으로서는 반성이 불철저한 것으로 보였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천황에 대한 입장과는 상관없이 식민지배와 전쟁을 반성하는 ‘일본 국민’들 다수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기금이야말로 ‘전후 일본’이 지향 한 가치가 사회에 널리 정착되었다는 것(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을 보여 주는 기구였다. 결국, 지원자들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 지원운동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 ‘일본 사회의 개혁’이라는 좌파 이념을 중 시한 셈이 되었다. 그곳에서도 ‘위안부’는더이상 ‘당사자’일수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