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위안부/지원단체의 분열과 당사자주의의 모순

한국에서는 국민기금의 사업 실시 첫해였던 1997년에 7명이, 그리고 현재 까지 총 61명이 보상을 받았지만, 지원단체는 기금을 반대했기 때문에 기 금과 위안부를 연결하는 공식 창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초기에 받은 이들은 지원단체의 격한 비난을 받았고, 한국 정부의 보상금 지급에서 제외되었다. 기금을 받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껏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런 비난이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대사 관앞에서 벌이는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도 기금을 받은 이가 있다 고기금 관계자는 말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원단체와 격하게 대립하는 위안부들도 있었다. 그 들은, 지원단체가 자신들을 이용해서 권력을 얻었고(실제로 지원단체 관계자중에는 상을 받거나 장관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된 이가 많다), 자신들을 ‘앵벌이’시키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자신들의 재판을 지원하고 헌신적으로 돌봐 준 이들은 한국의 지원단체가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인터넷신문 『시 티뉴스』에 실린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

그러나 살아생전에도 사회를 향해 한껏 목소리 높여 외쳤고 죽음을 앞 에 두고 그 외침을 CD에 담아 공증해 인터넷 언론매체에 남기기까지 한그 녀의 한 맺힌 ‘유서’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 상황 은이 할머니의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지원단체가 보호하는 위안부 이외의 위안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금’의 보상금을 받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인 ‘위안부’가 61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도 일본의 지방신문이 었다.

정대협은, 기금을 부정하고 일본에 ‘입법’을 요구하는 이유는 위안부들 자신이 ‘입법’을 원하고 기금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저 ‘당사자’ 의뜻을 존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원단체가 말하는 ‘당사자’들이란 어디까지나 지원단체의 생각 에 따르는 이들에 한정될 뿐이다. 말하자면 ‘당사자’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 나 지원단체와 의견을 달리하는 위안부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 지지 않는다.

또 사실은 ‘정대협’ 역시 하나가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정대협만 주 목을 받고 있지만, 위안부를 지원하는 단체는 서울에서 정대협이 발족한이 후에도 생겼고 그중에서도 부산의 정대협은 서울 정대협의 발족 당시부터 함께 활동한 김문숙 관장이 사재를 털어 위안부의 일본에서의 재판을 지원 하고 자료를 풍부하게 갖춘 전시관(‘민족과 여성 역사관’)까지 지었다. 서울 정대협은 국가 전체의 주목과 지원을 받아왔지만, 부산 정대협은 언론의관심이 서울에만 쏠렸던 탓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12년 가을에는 재 정난에 처해 전시관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여성신문』, 2012. 10. 19.).

김문숙 관장은, 과거에 기금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금을 여전히 비판하는 서울 정대협 의주장을 비판한다(2013년4월 1일, 필자의 인터뷰).

말하자면 위안부도 하나가 아닌 것처럼 지원단체도 하나가 아니다. 위안 부들이 기금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 금을 수용한 위안부가 있다는 사실이나 기금에 대해더이상 비판적이 아닌 지원단체도 있다는 사실은 알려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설사 모든 위안부와 지원단체가 기금을 부정한다고 해도, 그 부정이 앞에서 본 오해에 연유한 것이었다면, 모두가 함께 이 문제를 다시 합리적으로 풀 방도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위안부 문제가 전 국민 의관심사가된이상, 해결방식에서도더이상‘그들만의문제’로남겨둘수 는 없는 일이다. 물론 그 방도가 당사자의 의사를 부정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당사자들에게 더욱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이해 받고 그들이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지원단체와 위안부의 ‘해결운동’이 길어지면서, 또 운동이 대외 적으로 성공하면서, 수요시위를 비롯한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은 어느새 해결 자체보다도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한국의 힘’을 확인하는 싸움이 되 고있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운동’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면서 병들 고 나이든 위안부들에게 ‘한국의 자존심’을 대표하게 하는 것은 과연 ‘당사자’의 뜻을 존중한 일이었을까. 그녀들을 노구에 채찍질하며 길거리에 나서는 ‘투사’로 만든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미 한번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원치 않는 길을 가야만 했던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올바른’ 민족의 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민족’의 억압이 아니었을까.

한 개인으로서의 ‘위안부’의 또 다른 기억이 억압되고 봉쇄되어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위안부’들에게 개인으로서의 기억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 다. 그녀들은 마치 해방 이후의 삶을 건너뛰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까지고 ‘15살의소녀 피해자’이거나 ‘싸우는투사 할머니’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피해자임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우리 사회의 그런 욕망은, 일본 군인에대 한 사랑도, 자신을 판 부모나 조선인 업자나 ‘주인’에 대한 미움도, 그리고 해방 후에도 50년 동안 이어진 차가운 ‘한국인’의 시선도 잊고, 소거시킬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원한만을 되살리기를 그녀들에 게 요구하는 것이다. 20여 년간 이어진 ‘위안부 문제’란, 지원단체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그런 욕망과 기대가 우선시되면서 ‘당사자’들의 ‘지금, 이곳’에 서의 고통은 잊혀진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금의 수령 여부를 둘러싸고 당사자들은 심각한 분열과 후유증 을 겪었고, 건강을 해친 한 할머니는 본인이 다른 이에게 수령을 거부하도 록 강하게 촉구한 일이 건강 악화의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하나 후사 에미코).그것은 분명 국가의또다른 억압이었다.

기금을 반대했던 이들은 위안부 안의 분열과 지원자와 위안부의 분열이 ‘기금’ 탓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기금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기금을 만든 정부에 대한 지원자들의 이해 부족이 위안부들을 분열시켰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원인은 식민지배와 국가와 남성중심주의와 근대자본주의가 빚은 가난과 차별에 있다. 나아가 그들을 그런 장소로 내몬 가부장제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 으로그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그런 시스템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그러나 국가가 군대를 위한 성노동을 당연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았던 이상 그것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 은 어려운 일이다. 또 ○○○○○ ○○○○ ○○○ ○○○ ○○ ○○○○○○ ○○(일본군의 공식 규율이 강간이나 무상노동, 폭행을 제어하는 입장이었 던 이상) 강제연행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일본 국가에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 운 일이다. 다시 말해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폭행이나 강제적인 무상노동에 관한 피해는 1차적으로는 업자와 군인 개인의 문제로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개인이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찾기 어려워진 이상 ‘범죄’로서 책임을 물을 대상은 이미 없다고 해야 한다. 대신, 구조적 강제 성을 만든 책임 주체로서, 일본 국가가 그런 개인들의 ‘범죄’에 대한 책임과 함께 위안부들의 불행을 만든 구조적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있다.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의무적인 배상으로 질수 있다면, 죄에 대해, 의무가 아 니라도 책임을 지는 일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 로 표현된 것이 90년대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었다. 그러나 90년대의 보상은 그렇게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