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고노담화’와 강제성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위안부 문제를 밝혀낸 것으로 알려진 윤정옥 교수가『아사히 신문』기자에게 전달했다는 테이프의 내용으로 소개된 ‘위안부’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위안부의 아픔 절절히」이 여성은 중국 동북부에서 태어나 17살 때 2, 3백 명의 부대가 있는 중국 남부의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5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고, 매일 3, 4명을 상대해야 했다.(『아사히신문』1991. 8. 12.)

이와 함께 신문은 그녀가 “감금당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는 말도 전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를 ‘감금’한 것은 군인이 아니라 직접적 으로는 포주였을 가능성이 높다.그리고 “매일3,4명”이라는 숫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수십명’과는 많이 다르다. 위안부에 관한 초기의 발표는 실은 현재의 ‘상식’과는 그렇게 많이 달랐다.

아무튼 그런 식의 문제제기에 따라 일본 정부는 조사에 나섰고, 1993년 8월 4일 당시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명의로 발표한 것이 이른바 ‘고노 담화’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또한 광범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 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하에서 의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큰비중 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조선반도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하여졌다.

결국, 본건은 당시 군의 관여하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 를준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금 그 출신지의 여하를 묻지 않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 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또한, 그런 마음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식자의 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 게검토해야할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해가고 싶다. 우리는,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기 억에 남기며,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명한다.(한국위키피디아의 번역문)

일본 정부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한 것을 알면서도, 다시 말해 “감언, 강압”을 한 것은 업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들의 의사 에 반하여” 모집된 것을 중시하여 일본군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것을 이 문 면은 보여준다.

말하자면 고노 담화가 인정한 것은 우리의 이미지—총칼로 무장한 “군 인이강제로끌어갔다”는‘강제성’은아니다. 요청은군이했지만모집은업 자가 했고 그 과정에서 업자들이 한 감언이나 강압이라는 제3의 ‘강제성’만 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하 에 있”었고 요청을 한 주체가 ‘군’이니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의 간접적 강 제성에 대해서도 총체적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이 고노 담화다.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사례는 앞에서 본 것처럼 정신대 모집의 경우를 착각한 것이거나 개인적인 예외행동으로 보아야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여 성들이 일본군의 성욕을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된 것이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던 결과, 즉 식민지배라는 정신적 강제체제하의 일 이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군의 관여하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로 인정했고,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 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훗날 논란이 된 ‘아시아여성기금’은 바로, 여기서 말한 “그런 마음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식자 의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한 결과였다.

일본인 위안부가 아닌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다는 것은 ‘조선’에 상대적으로 가난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민지의 상황은 식민지배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한다면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성차별과 계급 차별 이상으로 ‘식민지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었고, 고노 담화는 그부 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응답한 담화였다. 다시 말해 ‘고노 담화’란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응답한, 위안부 문제 를 ‘식민지배’의 결과로 받아들여 사죄한 담화였다. 이후 다른 나라들이 목 소리를 내면서 문제가 복잡해지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고노 담화에서 인정 된 ‘강제성’은 네덜란드나 중국에 대한 강제성과는 다른 차원의 강제성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