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4일에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하여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세워진 일은 일본의 부정파들의 반발을 한층 더 가속화 시켰다.
예를 들면 일본의 보수잡지 『세이론正論』2011년 12월호는 ‘한국이여, 적당히 해두라’라는 제목의 특집을 기획하고, 2011년 가을 이후 ‘위안부’ 문 제에 관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면서 한국을 격하게 비판했고(니시오카 쓰 토무,「위험수위를 넘어선 ‘위안부’ 대일 모략」; 구레 도모후사, 「도덕이라는 도구와 역사의 진실」),특히 여성들이 한국의 지원단체에 호응하는 시위를 비판하면 서 “12. 14 수요데모 1000회에 대한 항의 행동 및 집회 ‘위안부의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데시코 액션 2011’”(http://sakura.a.la9.jp/japan/)을 연 것은 전에 없었던 움직임이었다. 동시적으로 일본의 트위터에 “위안부는 거짓말쟁이”, “강제연행이 아니다”라는 등등의 의견이 급속히 늘어난 것도 위안부 소녀상이 가져온 현상이었다. 그건 2000년대 이후 등장한 ‘혐한 류’주장과 통하는 감정이 일본사회에서 표면화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는 이후의 한일 갈등의 촉매제는 다름아닌 위안부 소녀상이었다.
당시 『산케이 신문』이 2007년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발언으로 세계적 인 주목을 끌었던 아베 신조安部晋三 전 수상(2012년 12월에 두 번째로 수상이 되었다)을 다시 인터뷰하여, 아베 전 수상이 사죄하고 끝난 것처럼 보였던 당시 상황에 관해, 실은 “사죄한 적은 없었다”는 답변을 끌어냈던 것도 그 런 경과 중의 하나다. 아베 전 수상은 그 당시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논 의되지 않았는데도 미국 쪽이 마음대로 마치 사죄한 것처럼 발언했다고 말 했다(2011.11. 23.).
‘위안부’ 문제는 사실 한일 간의 문제이기 이전에 일본 내부의 문제이기 도 하다.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단순히 ‘한일 간의 대립’이 아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또 하나의 이 유는 이 문제가 냉전 종식기에 대두되어 역사인식 논쟁화되면서 위안부 문 제를 현재의 정치 문제와 결부시켰던 일본 좌우 진영의 대립에 있다. 다시 말해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는 식민지지배가 야기한 문제였지만, 위안 부문제를 장기화하고 미해결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냉전적 사고였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일본은 처음에는 ‘민간 업자가 군대를 따 라다니며 데리고 다녔다’면서 군의 관여를 부정했다. 그러자 한국의 여성 단체가 일본 정부에 항의서한을 발송하면서 발족된 것이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다. 이후 앞에서 본 것처럼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운 동과 발언에서 가장 영향력이큰단체가 된다. 이듬해인 1991년, 최초로 김학순 씨가 나타나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밝혔고, 12월에는 다른 이들도 함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소하게 된다. 1992년에 군의 관여 사실이 확인되는 자료가 발견되자 당시의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 내각은 92년과 93년 2회에 걸쳐 실시된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그리고 1993년에는 당시의 관방장관 고노요헤이河野洋平가 이른바 ‘고노 담화’를 통해 공식적으로 사죄를 표명하게된다. 이후 필리핀에서도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는 사람이 등장해, ‘위 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를 넘어선 국제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른바 ‘고노 담화’가 한국에서 회자되게 된 것은 당시보다도 일 본에서 ‘고노 담화의 수정’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지게 된 이후다. 그리고 앞 으로 말하게될고노 담화 이후의 일본의 대응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한국에서 ‘사죄도 보상도 안 하는 일본’이라는 이미 지가 굳어진 배경에는 그런 식의 정보 부족의 영향도 크다.
1994년에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一 수상은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 의 참여를 얻겠다는 구상을 발표했고, 여당 삼당(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 이 함께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이 프로젝트의 소위원회 는 문제 해결을 위한 검토에 착수, 국민의 참가를 얻어 문제에 대처하고 여 성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활동 등을 지원하라고 제언한다. 그리고 1995년에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역사를 교훈 삼아 새로이 평화를 위한 결의決意를 다지는 결의決議」가 채택되게 된다. 이어서 당시의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広三 관방장관이 ‘여성을 위한 평화우호기금’의 사업 내용과 발기인 을 발표, 같은 해 7월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하 기금)이 발 족된다(이때의 이사장은 하라 분베에原文兵衛 전 참의원 의장이었다). 8월에는 모금을 호소하는 호소문이 발표되었는데, 무라야마 수상은 여기에 인사말 을 싣기도 했다. ‘기금’의 활동에 필요한 협력은 정부가 한다는 각의양해가이루어졌고, 이후 ‘기금’은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동시적으로 반대운동에 나섰 다. 기금을 ‘민간’기금으로 간주한 것이 반대 이유였고, 그들은 국회입법에 의한 ‘국가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반대운동은 이후 미국 이나 유엔을 상대로 국제화하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커가게 된다. 1996년 에 스리랑카의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 씨가 지원자들의 목 소리를 반영하는 형태로 이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유엔 인권위원장에게 제 출하게된것은 운동의 최초의 성과였다.
하지만 같은 해에 기금은 ‘위안부’ 한 사람당 200만 엔의 ‘보상금’과 ‘총 리의 편지’, 그리고 한 사람당 300만 엔까지 7억 엔 규모의 의료복지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고, 8월부터 ‘보상사업償い事業’에들어갔다.
1997년에는 한국에서도 보상이 실시되었지만 격렬한 반대운동이 벌어 졌고, 그런 가운데 보상금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힌 7명의 전前 ‘위안부’들 이 일본 수상의 사죄편지와 보상금을 받게 된다. 인도네시아는 ‘고령자 사 회복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지급하기로 했는데, 그런 식으로, 피해국에 따라 구체적인 보상 형태는 조금씩 달랐다.
1998년에는 다시 유엔의 ‘차별 방지, 소수자 보호 위원회’에 맥두걸Gay McDougall 씨가 역시 ‘입법해결’을 주장하는 단체의 목소리를 반영한 보고 서를 제출한다. 2000년에는 무라야마 전 수상이 기금의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는데, 같은해12월, 기금에 반대해온 일본과 한국, 그밖의 지역의지 원자/관련자들은 도쿄에서 ‘여성국제전범법정’을 열고 쇼와 천황이 ‘유죄’ 라는 판결을 내린다.
같은 기간 동안 기금은 한국 이외의 나라들과는 합의를 이루었고 2002년 말까지 필리핀, 대만, 한국의 285명에게 보상금 지급을 완료하고 2007년봄에 사업을 종료하고 기금을 해산한다. 그동안 ‘한국인 위안부’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진행했는데,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개인보상 의무는 끝났다는 이유로 대부분 패소하게 된다(야마구치山口 지방재판소에서 이끌어낸간푸関釜 판결은 유일한 승소 케이스였다).
그런데2007년3월,아베당시수상이“위안부문제에서좁은의미에서의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세계 적인 관심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일 본의 사죄와 추가보상이 필요하다는 결의를 내놓은 것을 필두로, 캐나다와 오스트리아, 유럽 등 다른 지역들의 의회도 이 문제에 대해 결의를 내놓게 된다. 그런데 유엔 보고서의 경우는, 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일본이 한 사 죄와 보상을 인정하여더이상 발언하지 않겠다는 내용까지, 시간이 지남에 띠라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이후 몇년 동안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거나 다루 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 동안 한국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를 공 개하고,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개인에 대한 보상을 정부가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위안부’들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게 일본의 보상금 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기도 했다(자세히는 『화해를 위해서』 참조). 이들 은정부나 자치단체의 생활보조금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국인 ‘위안부’들과 지원단체는 그 후에도 일본 정부와 세계 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사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다른 나라는 사죄를 받아들였으므로, 현재의 ‘위안부 문제’란 실은 이 몇십 명의 위안부와 지원단체가 주체가된‘한국인위안부’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위안부’들과 지원단체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배상청구권”이 있는데도 한국 정부가 일본 측에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이라면서 2006년에는 한국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 을 청구한다. 1965년의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 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양국 간에 ‘해석상의 분쟁’이 있을 경우에는 제3국과 함께 협의하도록 정한 조항을 근거로 한 소송이었는데,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한동안 잠잠했던 위안부 문제가 2011년 가을부터 다시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피해자들을 대상으로한보상금 지급사업을끝 낸 상태였던 정부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지만, 위헌 판 결 이후 어쩔 수 없이 협의를 위한 대화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게 된다. 그리 고 2011년 말의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이 문제의 해결을 강하 게촉구했던 것은 말하자면 정부가 위안부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은위 헌이라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2년 5월에 일본은 추가조치 를할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한국은 거부했고, 대통령은 2012년 8월에 독도에 가는 방식으로 일본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동안, 정대협 등의 지원자와 단체들은 미국을 주무대로 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호소해왔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에는 미국과 유럽까지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위안부 문제’는 세계가 관심을 갖는 문제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 문제’란 더 이상 단순히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세계가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이제 ‘위 안부’에 대한 이해와 해결방식에서 일본의 부정자들과 지원자들이 양분되 고 한국의 지원자들이 일본의 지원자들과 연대해 세계를 상대로 일본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면서 관계국의 ‘역사인식 전반을 묻는 문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위안부들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보상 차원을 넘 어서서 각국이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묻게 된 것이 지금의 ‘위 안부 문제’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와는 해결이 되어 실질적으로는 한일 문 제이면서도 그 한편으로 세계가 관심을 갖고 발언하는 문제가 된 것은, 지 금이문제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자국의 역사인식을 묻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