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쟁터의 포주들

종군하는 업자들

앞에서 본 것처럼, 위안부가 될 이들을 위안소까지 데려간 주체는 대부분의 경우 중개업자나 포주들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위안부들은 명확하게 증언한다.

주인은 한국 사람이었어. 주인 남자는 아주 일본 사람같이 생겼는데 군복 입고 일본말을 아주 잘했어. 처음엔 한국 사람인 줄도 몰랐어. 거기 여자들이 주인보고 “저게 아주 악질이야 저놈을 잘 구슬러야 돼. 안 그러면 돈 한푼도 안 주고 부려먹기만 해” 그러더라고. 주인 그게 사람이요? 한국 사람인데 헌병대에 있던 사람이래요. 높은 사람이라던데. 계급장은 없지만 주인은 부대에 들어가요, 거기는 일본 부대하고 같이 하는 거예요. 주인은 당꼬즈봉(단고바지)에 어떨 적엔 칼을 착 차고 모자를 탁 쓰고 들어온다고. 위협 주는 거지. 일본 사람하고 똑같아요. 걸음걸이가 장교하고 똑같아요. 세력이 당당해. 졸병들은 그 앞에 꼼짝하지 못하고 장교들은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놀더라고요. ‘헌병아가리’(퇴역헌병)라고 했어요.(『강제3』, 176쪽)

소개쟁이들이 여자들을 계속 팔아넘기는데 처음 만주의 주인 조 서방이 여자 스무나믄 명을 사서 여기저기 넘겼다. 마누라는 현지에서 장사하고, 남편은 돌아다니며 여자를 사고 팔아댔다. 조 서방이 만주에서 오면 성환의 소개쟁이가 여자 여럿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스물두 살 때쯤, 상해와 싱가포르에서도 잠시 있다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까지 갔다.(『강제3』, 269쪽)

아마도 여성들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매매했던 이들이 오지에까지 위안부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센다의 책에서도 한 군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깜짝 놀란 건 지난濟南에 들어간 지 이틀 후에 어느새 작부가 들어온 일이었습니 다. 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진하는 부대 뒤를 땀을 흘리며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숫자는 세 명인가 네 명이었는데, 거의 모두가 조선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약삭빠른 매춘업자가 전쟁수당을 받고 있는 군인들의 수당을 노리고 여자들을 모아 돈 벌러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들은 각기 일본식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옷도 입고 오비를 둘렀는데, 정신이 번쩍들 만큼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약삭빠른 업자의 지혜였겠지요. 군이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요구하거나 바란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업자였겠지요. 남자는 주둔지 한쪽 구석에 판자를 박고 돗자리를 둘러쳤는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엉성하나마 집을 지어냈습니다. 거지들의 오두막집 같은 거지요. 밖에서 돗자리를 들추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엉성한 집이었습니다. 부대에 영업허가를 받지도 않았겠지요. 형태로 봐서는 민간인이 마음대로 와서 제멋대로 장사를 하는 식이었을 겁니다.(184쪽)

대부분의 위안소는 군의 직간접적인 관리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식의 업자가 있었다는 것은 ‘종군위안부’란 인솔자인 ‘종군업자’가 만든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민간인이 멋대로’ 영업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바로 이런 기억이 남아 있기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종군’의 주체는 ‘위안부’라기보다 ‘업자’였다.

사진 4

사진 4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4년 10월 27일자(위)와 『경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아래)에 실린 ‘위안부’ 모집 광고. ‘18세 이상 30세 이내의 신체 강건한 자’ ‘수십 명’을 ‘허 씨’가, 그리고 ‘17세 이상 23세까지’ ‘이마이 소개소’가 급히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양쪽 다 가는 곳이 군부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조선에서의 모집이 시작된 것은 1942년 5월 초, 업자들은 전방의 병원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붕대를 감아주고 사기를 북돋아주자는 등의 말로 여성 한 사람 당 200~300엔의 돈을 건네주고 데려갔다. 이런 방식으로 300명 가까운 여성이 1942년 8월 20일, 랑군에 도착, 그곳에서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전방으로 보내졌다. 포로가 된 여성은 중국 국경에 가까운 미트키나에 있었던 ‘마루야마 클럽’ 이라고 불렸던 위안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세. 자신들의 직업이 싫다고 말했고, 일이나 자신의 가족에 관해서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96쪽 에서 재인용)

‘20명의 조선인 위안부와 민간인 일본인 부부’를 심문한 내용이라는 이 보고서도 ‘업자’들의 개입과 사기 사실을 보여준다. 위안부들을 전쟁터로 데리고 다니며 군에 제공했던 주체는 업자들이었다. 군이 위안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 업자들이 기존에 해오던 인신매매 과정에서의 속임수로 ‘부상당한 병사의 붕대를 감아주고 사기를 북돋아주자는 등의 말’로 꾀어 그들을 ‘종군’시켰던 것이다.

강제노동과 착취

뿐만 아니라 포주들은 위안부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말하자면 이들을 강제노동에 가깝게 혹사시킨 것은 군인뿐 아니라 업자들이기도 했다. 아직 어린나이에 위안소에 가게 되었던 한 위안부는 말한다.

거기 가니 색시들이 댓 명 있었다. 스무 살에서 스물세 살인 언니들은 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다. 주인은 나보고도 언니들처럼 손님을 받으라고 했는데 그러면 울면서 구석으로 가서 엎드려 있었다.(『강제2』, 149쪽)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서 분노하는 건 ‘소녀’들이 당했다는 인식 때문이지만, 어린 소녀들에게 성노동을 직접 강요한 것은 이렇게 포주들이었다.

저녁이 되면 주인은 그날 여자들이 상대한 군인의 수를 점검하고 군인을 적게 상대한 여자나 그날 잘못을 저지른 여자들에게 벌을 주었다. (중략) 집안 치우는 일로도 꼬투리를 잡히면 맞았고, 특히 상대하는 군인한테 반항하면 맞았다.(『강제 2』, 126쪽)

말일경이 되면 주인은 여자를 다 불러 일층 큰 방에 모아놓고 그러는 거야. 아무 개는 일등했다, 이등했다, 삼등했다, 너희는 뭐 했냐, 매상 표시를 했어. (중략) 일등한 여자, 손님 많이 받은 여자는 말일경에 상금을 주는 거야. (중략) 무조건 손님을 많이 받으라는 거겠지. (중략) 난 뺑이질을 잘 쳤어. 왜 그런지 거부하면 주인이 때린다고 으름장 놓고 꾀가 나니까.(『강제 3』, 105~106쪽)

(병에 걸려) 그 여자에게 애걸을 하는데도 계속 군인을 받게 하데요…. 그러다가 그냥 까무라쳐버렸어요. 그제야 하루를 쉬게 해주었는데 나한테 얼마나 심하게 욕을 하던지…. (중략) 내가 너무 아파서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했더니 ‘이년이 엄살떤다’며 야단도 아니야, 같은 조선 사람인데도 그 여자는 인정사정도 안 봐주고 참 독했어요.(『강제3』, 130쪽)

한 사람의 위안부가 군인을 몇십 명씩 받게 된 배경에는 단순히 일본군의 강제와 숫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업자들이 과도한 노동을 강요했던 것이고, 그런 식의 요구가 일종의 강제노동인 것은 분명하다.

앞서의 미군 보고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사업은 군이 관리하고 있었고, 세세한 규칙을 정해두고 있었다. (중략) 장교는 매일 밤이라도 올수 있게 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줄을 지어 순번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성들에게는 손님을 받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주어져 있었다. 사감은 여성들의 빚의 정도에 따라 그녀들의 벌이 중 50~60퍼센트를 가로챘다. 그녀들의 한 달 벌이는 평균 1500엔이었는데, 대부분의 사감이 식비를 비싸게 받아 생활은 겨우 먹고살 정도였다.(후나바시요이치, 297쪽에서 재인용)

위안부들 중에는 돈을 벌었다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돈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중에는 갑작스러운 패전 때문에 저금이나 패물 등을 몸에 지니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던 이들도 있지만, 이들이 언제까지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은 대부분 그런 구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혹은 빚을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가야 할 돈을 반 이상 가로챈 이들—여기서는 ‘사감’으로 표현되는 포주들이 있었다. “돈 주고가면 주인들이 다 받지. 한 달에 얼마씩… 돈을 줬”(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41쪽)거나, “보수는 받지 못했고 군인이 가끔 씩 용돈을 줄 때가” 있었거나, 오히려 “술 먹는 애들은 오바상(아줌마-인용자)에게 빚을 지고 있었”(『강제1』, 173쪽)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감시•폭행•중절

포주들은 어린 소녀에게 강제로 성노동을 시키고 노동의 대가를 착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대부분 가혹한 폭행으로 이들을 다스렸다.

도망했으니까 맞지. 맞을 짓을 하니까. 밤늦게 청진으로.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서) 도망해두 뭐 당장 붙들렸을 끼여. 그러는디 그걸 몰르구 도망을 해니께, 패구, (정강이를 가리키며) 이눔을 묶어서 꿰 달아매. (중략) 안 그렇게 하면 돈을 안 주고 굶어죽어. 그 사람네서 [군인을] 안 받을 수가 없지. 그러카고 철문으로 안쪽으로 척척가둬두고.(『강제4』, 157쪽)

조선인 남자는 우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쇠꼬챙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고문을 하는 등 우리를 몹시 학대했다. (중략) 배에서 내리자 우리를 인솔하던 그자가 우리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조목조목 따지면서 쇠막대기로 우리를 후려갈겼다.(『강제1』, 63쪽)

주인은 군인을 안 받는다고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했다. (중략) 밥을 지어놓고 밥상에 앉았는데 주인이 밥을 먹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앉아서 먹으니 주인은 도망쳤던 년이라고 하면서 나를 마구마구 때렸다. 맞은 상처가 아물 무렵 군인들이 자꾸 나를 찾는데 내가 안 받는다고 하니까 주인이 곤봉으로 내 머리를 때렸다. 머리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서 나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중략) 나를 상대하던 야마모도라는 육군 소위는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는 나를 불러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해줬다. 일본인 군인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군인과 아카시마赤島에서 왔다는 군인은 좋은 사람이었다. 나이가 서른쯤 되는 인정이 많은 그 소위는 키도 크고 건장했다. 병원에 두어 달 다니니까 상처가 아물고 부기도 가라앉았다. 지금도 내 머리에 15센티쯤 되는 흉터가 남아 있다.(같은 책, 78~81쪽)

그 집에서는 한 명이 잘못하면 군대식으로 전부 맞았다. 무릎을 꿇어 앉으라 했고 주인과 우리를 관리하는 일본 여자가 허벅지 위를 몽둥이로 때렸다. 손님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그 부위를 때린 것이다. (중략) 내가 잘못해서 맞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 중에 한 명이라도 술을 많이 먹고 장사를 못 하겠다고 하면 열이고 스물이고 모두 때렸다.(『강제2』, 37쪽)

포주에게 입은 상처를 군인이 치료해주었다는 것은, 속아서 온 소녀들을 해방시켰던 군인의 이야기와 부합하는 이야기다.

위안부들은 “주인과 관리인에게 하도 머리를 많이 맞아서 머리가 이렇게 나빠”(『강제 2』, 41쪽)졌다거나 “주인 남자나 여자는 대문간 방에 딱 앉아서 지키고 살림을 거기서 했다. 우리가 도망갈까봐 지킨다고 문 가까이에 있었던 것”(104쪽)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위안부들을 폭행하여 그녀들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는 군인들뿐 아니라 포주들이기도 했다.

진송 시절부터 위안부 여자들에게도 계급제도가 생겼다. 이 제도는 위안부 관리인이 시켜서 하였고 여자들이 스스로 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 나는 빨간 바탕에 금줄 세 개, 별이 세개 있는 계급장을 달았다. 이 계급은 상당히 높았다. (중략) 나는 여자 중에서도 계급이 제일 높았다. 계급이 높았던 이유는 경력이 제일 오래되어 군인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매일 오후 4, 5시가 되면 점호를 하였다. (중략) 이때 위안부 여자들 중 말 안 듣는 여자들을 때리기도 하였다. 계급이 높았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직접 때리기도 하고 내 밑의 계급을 단 위안부에게 때리도록 시키기도 하였다. (중략) 하루하루의 생활이 악에 받쳐 있었다.(『강제 2』, 178쪽)

위안부들에게 경쟁을 시키고 자주 폭행으로 다스렸던 주체는 이렇게 ‘관리인’이거나 포주들이었다. 고작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출을 허용하면서 “도망가지 못하게 조를 짜서 보”(『강제3』, 179쪽)내고, “임신했지. 많이 뗐어. 주인이 나를 민간병원에 데리고 가서 떼내. 눈치 안 나게 떼내. 낳으면 자기 손해잖아. 니 애 낳아갖고 어떻게 살 낀데 그래. 여자 중에 임신 안 한 사람 아무도 없어”(102~103쪽)라는 식으로 위안부들에게 임신중절을 시킨 것도, 군인뿐 아니라 포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미움은 포주에게도 향한다.

부산에서 데리고 간 아줌마는 해방되고 못 만났어요. 해방되고는 막 해방됐다고 난린디 도망가고 없더라구요. 그 집 식구들 다요. (중략) 있었으면은 누구 손에 죽어도 맞아 죽었을 거인디. 우리는 오도가도 못 하고 잇는디 어쩔 것이여? 그런디 도망가부려. 그것들이 있었으면 여자들한테 맞아 죽었을 것인디. 근디 내가 지금 나이 먹어 생각하면은 그 한국 사람들이 더 나뻤어요. 우리를 팔아묵었으니께. (중략) 여자들 데려다 못할 짓 시키고 그 죄를 다 어디다 받을라나 몰라. 나만 데려간 것이 아니고 그 수천을 데려다 그 염병할 짓을 시키고 그 죄를 어따가 받을 것이여. 기가 맥힐 일이지, 기가 깍 맥힐 일이야. 어떻게 똑같은 한국 사람이 그런 짓을 시켜.(『강제5』, 199쪽)

포주가 도망가지 않았으면 “맞아 죽었을” 거라는 말이 그들의 미움의 크기를 웅변한다. 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감시와 폭행과 중절의 주체는 일본군 뿐아니라 포주이기도 했는데, 이런 목소리들은 묻혀왔던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

그렇게 포주를 미워한 이들이 때로는 스스로 포주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강제 3』, 287쪽). 증언집에 따르면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중에는 예외도 있었다.

밥해먹는 사람은 중국 사람이야, 부부와 애. 그 사람들이 물 다 들어올리고, 청소 다 하고, 목욕물 데워주고, 빨래는 별도로 해주는 여자가 있어. 마마상이라 불렀는데 해온 대로 우리가 각자 돈을 주었지. 씹보이라는 죠바 심부름꾼도 있었어. 이 사람이 장부정리를 했어. 중국 아이였는데 우리가 놀렸어.(『강제3』, 101쪽)

수마트라에서는 김치도 담가먹을 수 있었고 중국인 요리사를 두고 잘 해먹었었다. 거기서는 여자들이 개별적으로 빨래해주는 여자, 청소해주는 남자를 각각 10원씩 주고 고용할 만큼 생활에 여유가 생겼고 더욱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싼 임금에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본 사람이 오라고 하면 감히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국적은 일본인이었고, 일본군의 적극적인 관리통제하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같은책, 286쪽)

그곳은 큰 유전지로, 위안소는 유전 바로 옆에 있었다. 정말 말하기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곳에서는 돈을 많이 벌었다.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군인들을 잘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일본인의 권리가 너무나 당당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그랬던 때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적극적인 협조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일본군이 나와 집안 소독도 해주었다.(같은책, 288쪽)

이들이 중국인이나 인도네시아인을 부리고 심지어는 인도네시아인을 지휘해 위안소를 운영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조선의 위안부들이 식민지인이 되어 ‘본토 일본’의 하위 위치에 있게 되기는 했지만 그건 동시에 다른 아시아인들의 상위 위치에 서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은 ‘제국’의 임금체계를 설명해준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분명 피해자였지만, 그러면서도 ‘일본 제국’ 안에서 ‘두 번째 일본인’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식민지인의 모순이었다. 그리고 후에 말하는 ‘아시아의 조선 인식’이 좋지만은 않은 것은 그런 과거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에서는 기억되고 있는 이런 사실들이 우리 안에서는 ‘공적 기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식민지의 현실’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한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이른바 ‘역사왜곡’ 욕망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욕망은 우리 자신의 피해자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과 연동되지만, 이런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 꼭 위안부의 비참성을 희석시키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이 설사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진 생활을 할수 있었다 해도, 그녀들은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이며, 그런 한, 그녀들을 만든 것이 식민지지배 구조라는 것만은 분명하 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