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의 센다의 책에는 어느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1970년대 초반, ‘충청북도 출신의 쉰네 살’인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 갔지만, 1940년 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농촌이었던 우리 고향에 키가 작은 일본인 남자가 와서 “돈 되는 일이 있다. 일은 편하고 식사도 제공 된다”면서 여러 집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마을마다 일본인 경찰의 주재소가 있었는데, 그런 경찰이나 면장(원문에는 괄호 안에 ‘촌장村長’이라고 쓰여 있다-인용자)을 대동하고 다녔으니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생활이 여의치 않은 농가에서 몇 사람 응모했습니다. 응모는 미혼인 젊은 여성만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내지의 방적공장이나 군의 피복공장 등에 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일로 생각하고 응모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101쪽)
‘키 작은 일본인 남자’가 중간업자나 포주였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이 다름 아닌 ‘면장(촌장)’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협조한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마을의 어느 집에 대상이 될 만한 ‘가난한 처녀’가 있는 지를 알고 부모나 본인을 설득할 수 있는 이들은 순사나 중간업자가 아닌 마을 내부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센다는 인터뷰한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에 의하면, 1937년 말부터 1939, 40년 이전까지는 경찰이나 촌장을 대동하고 오기는 했어도 강제는 아니었고, 동반한 것은 속이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쇼와 시대 초기에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도쿄의 업자들이 농민을 속여 처녀들을 데리고 갔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따라서 농촌에 주재하는 순사들은 주역이 아니고, 군의 어용매춘업자들의 압력기관으로서 칼소리를 내며 따라갔을 뿐이었던 것같다.(102쪽)
센다의 설명은 모집을 둘러싼 순사-경찰과 마을의 장-행정기관의 관계를 가장 사실에 가깝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금의 ‘위안부’ 증언집에도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알려주었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한 위안부는 “지금 생각하니 나보고 배급을 타가라던 이장 아들이 계집애가 있는 집을 다 가르쳐준 것이 아닌가 싶다”(『강제2』, 47쪽)고 말한다.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38년에 우리 동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광목공장에 취직할 사람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 사람은 동네 구장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자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의 묵인 아래 동네일을 보는 구장을 따라 광목공장에 취직하러 나서게 되었다. 우리 집은 술장사, 밥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 지서 주임, 면장, 구장, 반장까지도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서 주임이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한 것 같고 동네의 구장, 반장이 나서서 나를 끌어냈다.(『강제2』, 169쪽)
센다는 일본군이 “조선 총독부에 모집을 의뢰했고 총독부가 각 도•군•면에 내려보내 최종적으로는 면장의 책임으로 모았다”(103쪽)는 전쟁 당시 군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면장의 아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도 쓴다.
그는, “1941년경 5월이나 6월” 주재소 순사가 다녀간 직후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일본 내지에 좋은 일자리가 있소. 어떻소, 딸을 보내지 않겠소? 딸한테 송금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라고 권유하면서 돌아다닌”(104쪽)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데, 면장이 돌아다닌 집은 “가난한 집, 그리고 아이가 많아서 생활이 어려운 집”이었다. 그리고 그가 권유한 처녀는 “우리 고향에서는 네 명이나 다섯 명”이었고, “모인 건 두 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이 떠날 때의 모습은 “울면서 보내는 광경은 분명 있었지만, 취직하러 고향을 떠나는 사람을 배웅할 때의 모습이었고, 심각한 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105쪽)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모집 대상은 위안부가 아니라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정신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동네 사람들이 그런 모집에 가담한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이들은 당시의 ‘국가’의 여성 동원에 협조했을 뿐이고, 그런 한 그들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신대건 위안부건, 그들이 그렇게 동원되는 과정에 조선인이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묵과한 것이 ‘위안부문제’를 혼란에 빠뜨린 원인이기도 했다.
참혹하고 슬픈 시대였습니다. 아버지는 약했다면 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조선 사람이 달리 뭘 할 수 있었을까요? 해방 후에는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저는 아버지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면장을 맡게된 게 불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106쪽)
“면장을 맡게 된게 불운”이라기보다는 한국이 병합된 것이 불운이었다. 20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면장’이건 ‘읍장’이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제에 대한 영합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그 지위를 얻었다 해도 누군가는 구조적으로 국가정책에 대한 ‘협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센다가 “말하면서 그는 울었다”면서 협력자의 아픔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협력하도록 만든 나라의 후예로서 그런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위안부들 중에는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들이 더 밉다”(『강제 1』, 57쪽),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자기 살려고 남을 죽을 곳에 넣었으니 마찬가지로 나쁘다”(같은 책, 71쪽)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죄라는 것이 ‘미움’을 풀기 위한 응답이라면,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 그런 사태야말로 ‘식민지’의 모순이자 ‘조선인 위안부’의 모순이다. 식민지화란 그렇게, 국가에 대한 협력을 놓고 구성원 사이에 치명적인 분열을 만든 사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