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자들은 여성들의 유괴와 착취에서 결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근대 초기부터, 어린 소녀들을 유괴하다시피 데려가 외국으로 팔아넘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가난한 소녀들이었는데, 대륙에 가까운 규슈 지방에서 그런 일이 많았다. 그들은 팔려가면서도 오로지 부모와 집을 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심성 고운 딸들이기도 했는데, 그런 소녀/여성들을 고향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까지 담아 가라유키상(‘가라’는 ‘唐’이라 쓰지만 중국에 한정하지 않고 외국을 통칭하는 말. ‘유키상’은 ‘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외국에 돈 벌러가 는 여성을 가리킨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현해탄을 넘어 한국과 중국 각지에 만들어진 공창—국가의 허가를 받은 매춘시설—으로 팔려나갔고, 동남아시아와 인도로까지 떠돌았다(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 1976. 이하 이 대목의 논의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한 이 책에서의 인용이다. 저자 모리사키 가즈에는 실제 ‘가라유키상’과 가라유키상의 양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 결과로, 1920년대엔 이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가난한 처녀들이 하녀로 일하거나 매춘시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원래는 ‘해외로 돈 벌러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던 ‘가라유키상’은, 나중에는 바다 건너로 팔려간 여자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또 팔려간 여자들이 유곽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처럼 성을 제공해야했던 전쟁터의 위안부도 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같은책, 19쪽).
일본은 근대 이전부터 유곽을 공창, 즉 국가가 공인하는 시설로 만들었고 근대 국가가 된 이후에도 공창을 존속시켰는데, 너무 어린 소녀들이 해외로 팔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15세 이하는 공창이 될 수 없도록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규정한 “이민보호법은 조선과 청국(중국) 양국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116쪽). 그 이유를 모리사키는 (창기들이, 조선이나 중국으로 앞서 건너간) “내지인(일본인)의 발을 (그곳에) 묶어두는 방편”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해외취업녀를 계속 묵인하면서 조선/청국에 이민법을 적용하지 않았고, 신영토에 공창제를 필요시한 것”(117쪽)이라고 설명 한다.
유괴범들에게 이끌려 어린 소녀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일본이 묵인했던 것은, 조선이나 중국으로 단신으로 건너가 경제적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일본 남성들의 향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향수에 젖거나 일상의 불편함을 겪어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아 확대된 국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흐름이 었고, 그런 욕망에 동원된 것이 ‘가라유키상’이었다.
그 때문에 러일전쟁 전후엔 “가라유키상의 유괴•밀항이 눈에 띄게 늘어 났”고 “누구나가 점령지를 목표로 남몰래 나라를 떠나갔”다. 그리고 “이윤에 밝은 업자들은 점령지로 물밀듯 소녀들을 보냈”(126쪽)다. 모리사키는 당시의 신문을 이렇게 인용한다.
싱가포르의 인구 약 25만 명. 거주 일본인 약 1800명. 그런데 그 과반은 추업부醜業婦라고 한다. 또 이곳에 거주하는 모 씨의 말로는, 그들 중 단신으로 나라를 떠나 밀항을 기도한 여자들이 3분의 2. 그렇지 않고 나쁜 사람의 손에 걸려 감언에 속아 이곳에 와서 몸을 팔게된 여자들이 3분의 1.(『후쿠오카니치니치 신문福岡日日新聞』, 1909.5.6.)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인 부녀매매조직은 활발”(180쪽)했다. 한국이 합병된 1910년의 신문도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8월 30일경부터, 갑자기 여객이 엄청나게 늘어나, 매번 여객들을 다 싣지 못하는 연락선도 많았다. 그들은 병합 발표와 함께 재빨리 ‘젖은 손에 좁쌀 묻히는 식’ 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인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젊은 여성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2, 30엔을 벌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가 작부가 될 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포주가 하는 대로 맡기겠다는 증서—부모의 수락서를 갖고 있다.(132쪽, 같은 신문, 1910. 9. 6.)
당시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 및 만주朝鮮及び満州』에는 그렇게 해서 건너온 일본인 여성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실려 있다. 그건 “한국에 체재했던 경성 거류 일본인 총수 4만3253인 가운데 직업을 가지고 있는 1만7281인의 직업별 순위를 보면, 하녀가 961인으로 제4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소위 서비스업으로 간주할 수 있는 2종예기가 347인으로 제12위에 랭크되어 있”(허석, 56쪽)는 상황 속의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발간된 일본어신문도 “식민지의 발전에는 그 이면에 부녀자가 잠재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朝鮮新聞』, 1911. 2. 23. 허석, 62쪽에서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사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 전부터 한국에 많이 건너와 살았다. 그중에는 속아 팔려온 소녀들이나 살길이 막막했던 가난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의 ‘이동’을 조장하고 묵인한 건 국가권력과 민간업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훗날의 ‘조선인 위안부’의 전신은 ‘가라유키상’, 즉 일본인 여성들이었다. 그들 역시 가난한 시골처녀들이었고, 감언이설에 속거나 부모의 뜻에 따라 팔려간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인 위안부’ 역시 가부 장제와 국가의, ‘가난한 여성’—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만들어낸 존재 였다.
이들이 러일전쟁 때 이미 일본군을 ‘위안’했다는 것은, 일본군이 1930년 대에 처음 만든 것처럼 알려진 위안소들이 실은 일찍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시발점에는 일본인 여성들이 있었고, 민간인이 경영하는 시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처음엔 국가가 아닌 ‘가족’을 위한 희생에 나선 것이었고 따라서 ‘고향’의식만 강했던 이들은 전쟁이 터지자 “일본인의식이 강해지면서 남자들을 뒤에서 돌보기도”(182쪽)하게 된다.
지사志士들은 천황의 국가에 환상을 가졌고, 가라유키상은 고향의 행복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차원을 달리하는 이 두 가라유키가 그래도 문득 서로 접점이 생 기는 때가 있었다. 바다를 건넌 지사들은 가라유키상이 일하는 유곽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도 “앞장서서 돌보았다”고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亜先覚志士記伝』에 나온다. 그들은 가라유키상을 낭자군이라고 불렀다.(226쪽)
‘낭자군’이란 娘子軍. 사회 최하계층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던 여성들을 ‘군인’에 빗대어 부른 말이다. 국가의 욕망 실현을 위해 동원되었던 이들이 어느샌가 국가의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는 존재로, ‘국가를 위한’ 역할을 하는 이들로 인정받게 되면서(물론 동원을 위한 국가의 수사일 뿐이다) 생긴 말이었다. 훗날의 위안부들 역시 ‘낭자군’이라고 불리었고(『마이니치 클럽』별책 『일본의 전력』의 위안부 사진 설명문과 사진, <사진 2> 참조), ‘위안부’들은 그렇게 국가와 남성에 의한 피해자이면서 국가에 의해 ‘애국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화해를 위해서』).
그것은 분명 국가의 부조리한 책략이었지만, 외국에서 서러운 음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는 그 역할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수 있다. “싱가포르 근처에는 거의 6000명의 가라유키상이 있었고 1년에 1000달러를 벌었는데, 그 돈을 일본인들이 빌려 상업을 했”(232쪽)다는 이야기는 해외의 가라유키상들이 일본 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 ○○○○ ○○○ ○○ ○○ ○○○ ○○. 국가간 ‘이동’이 더 쉬워진 근대에, 경제•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타국으로 떠났던 남성들(군대도 그 하나다)을 현지에 묶어두기 위해 동원되었던 이들이 ‘가라유키상’이었던 것이다(가라유키상의 첫 상대가 일본 항구에 정박한 러시아 군인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은 ‘성적 위무’를 포함한 ‘고향’의 역할이었다.
일본의 가난한 지역의 가난한 소녀들이 해외로 멀리 보내져 신산한 삶을 보냈던 상황은 야마자키 도모코山崎朋子의 『산다칸 8번 창기집サンダカン八番娼館』에도 잘 그려져 있다. 야마자키가 취재한 나가사키長崎의 ‘가라유키’상은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에 의해 업자에게 팔려 멀리 영국의 식민지였던 보르네오의 항구 산다칸까지 가게 된 여성이었다.
그중에서 조선반도에 와서 몸을 팔던 여성들이 임신해 낳은 아이들은 ‘조선인의 양녀’(136쪽)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가라유키상의 양녀는 그렇게 조선인의 집에서 “소학교를 다”니며 자란 여성이다.
이들은 주로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을 상대했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을 상대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철도 부설을 위해 동원된 이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때 철도 연변에서 유곽을 운영하던 사람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모리사키는 “일본인 출자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적는데, 그는 “공사와 밀접하게 연계하면서 유곽을 공사장이 이동하는 지역으로 옮겨갔다” (140쪽). 사실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업자, 곧 소녀들을 일본에서 데려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녀들이 죽으면 보충하기 위해 이경춘은 일본으로 갔다”(143쪽).
사진 2 『일본의 전력』에 실린 위안부 사진. 1938년 6월 18일 황허 연안 류위안柳園에서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 페이지의 군인들 사진과 함께 ‘도하’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다. “일본군 또한 낭자군을 데리고 다녔다. 위안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조선 여성이 많았던 그녀들은 언제나 진격하는 부대를 따라 최전선으로 향했는데, 사진을 찍으려 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망향의 염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에는 근대 초기부터 조선인들도 깊이 관여했다. 여성을 위안부로 만들어 상품화한 업자에도, 위안부를 성매매한 이용자—군인이나 군속 중에도 조선인들은 적지 않았다. 말하자면 위안부를 ‘강제로 끌어간’ 직접적인 주체는 업자들이었다.
‘위안부’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 ○○○○ ○○○ ○○○ ○○○ ○○○ ○○○○○○ ○○○ ○○○ ○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차별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가 생기게 된 것은 이들의 위치를 조선인 여성들이 대체한 결과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한국의 식민지화와 식민지로 이식된 공창제도가 있었고, 중간 매개자들은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존재였다.
여자들은 야전우편국에서 매일 고향으로 송금을 했다. 송금되는 돈은 (중략) 머지않아 국내 창기와 마찬가지로 적어졌다. 여자들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유곽을 이용하지 못하는 병사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창굴도 늘어났다.(155쪽)
‘머지않아 국내 창기와 마찬가지로 적어졌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라유키’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까지 온 것은 유괴당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본국보다 벌이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익숙한 고향을 떠나 이동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거나 임금이 국내보다 낫기 때문 이었다. 후에 다시 보겠지만 그런 식의 이동과 경제의 관계는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
만주가는 곳곳마다 우리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마굴이 없는 곳이 없다. 금년(1907) 5월의 조사에 따르면, 다롄大連에는 예기(기생)가 167명, 작부가 282명,창기가 113명, 중국 창기가 76명, 즉 700여 명의 매춘부가 있다. 그들 이외에 영업 신청을 하지 않은 무허가 매춘부가 얼마나 있을는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157쪽, 『후쿠오카니치니치 신문』, 1907.12.17.)
모리사키는 이들의 숫자를 나열하면서 모두 ‘매춘부’라고 말한다. ‘매춘’의 경로는 다르지만 노래와 춤을 제공하는 ‘예기’도, 술을 따르는 ‘작부’도, 남자들에게는 노래나 웃음뿐 아니라 몸도 살 수 있는 이들이었다. 실제로 우리 앞에 나타난 위안부들도 일부는 ‘성적 위안’뿐 아니라 술을 따르거나 노래와 춤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위안부’로서 증언한 이들 중에는 군인이 중심이 된 곳에서 단순히 ‘성적 위안’만 제공한 이들 이외에도 매춘을 겸하는 요릿집 등에서 당시의 표현으로 하자면 ‘작부’나 ‘예기’로 일한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 신문을 인용하며 모리사키는 다시 말한다.
가라유키상은 이렇게 국가의 공창제에 그대로 흡수되어갔다. 그것은 조차지뿐 아니라 일본의 지배세력이 가닿는 지역이라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풍경이었 다. 구 만주 지역은 물론이고 청국의 북쪽이나 남쪽 주요 도시에서는 가라유키상을 공창과 사창으로 나누어 일본의 경찰권으로 관리했다.(157쪽)
북쪽 대륙 방면으로 건너간 가라유키상은 그곳에 일본의 주권이 미치기 시작하자 곧 공창제에 의해 관리되었다.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정부 방침에 따라 헌병대가 곧잘 창기의 매독 검사를 강화시켰다.(233쪽)
이런 과정을 거쳐 1921년에는 이미 “조선, 사할린, 구 만주에서 창기 노릇을 한 이들은 3000명이 넘었”(233쪽)다.
그중에는 국가의 영업허가를 받은 매춘시설인 ‘공창’뿐 아니라 허가를 받지 못한 ‘사창’도 존재했다. 공창이란 말하자면 경찰이라는 국가권력으로 ‘관리’했던 곳을 말한다.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군대가 관리하기 전에 경찰이 관리했고, 경찰이 없는 전쟁터에서는 ‘위안부’를 일본군이 관리하게 된 것이다.
90년대 이후 ‘위안소’로 알려진 곳들은, 그렇게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곽까지 포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군인들이 그 존재는 파악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이용하지 않았던 사창까지 포함된 것일 수도 있다.
한 한국인 위안부는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도 이용하는 위안소에 있었다면서, 그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끌려간 곳은 대만 사람의 집이었는데 큰 단층집이었다. 창문에 창살이 있었다. 그 집에는 간판이 있었다. 간판을 받을 때는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략) 대문 입구에는 주인과 관리인이 앉아 있는 사무실이 있었고 그 앞으로 복도가 있었다. 그리고 복도 양쪽에는 색시방이 죽 늘어져 있었다. (중략) 대문 옆에는 꽃이랑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우리는 방을 한 개씩 차지했고 그리 크지 않은 방에는 이불과 옷이 있었다. 집안은 깨끗하지 않았다. 화장실도 하나뿐이었다.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여자들은 사무실의 오른쪽 방에 나와 앉아 있었다.(『강제2』, 34쪽)
군인들은 들어오자마자 마음에 드는 여자를 한 명씩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문 밖에서는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민간인 손님은 대부분 일본인과 대만 사람이었다. 민간인이라도 한 시간씩 자고 가는 뜨내기도 있었고 하룻밤 자고 가는 사람도 한 달에 몇 명씩 있었다. 나한테 오는 민간인들은 주로 대만 사람이었다. 일본말이 아닌 다른 말을 하고 피부가 일본 사람보다 검고 냄새도 나니까 대만 사람인 줄 알았다. 옷은 보통 민간인 옷이었다. 추잡했다.(35쪽)
‘허가’를 받아야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민간인도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시설이 군인이 직접 경영한 곳이 아니라 민간인이 경영하고 관리한 곳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군이 이곳을 ‘허가’했다는 것은 군인이 가도 되는 곳(지정업소)로 지정했다는 의미이다. 위안부들은, 일본군은 기본적으로는 ‘지정업소’에만 가도록 종용했고 그 이외의 곳에 가는 것은 금지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들은, 군인이 가도 될 만하다고 판단해 지정받은 업소가 아닌 일반 유곽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곳들 중에는 이전부터 있었던 곳도, 수요가 많아져 매춘사업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안 민간인들이 새로 만든 곳도 있었을 것이다.
상관들은 시내의 좋은 곳에 가지만(대개 노래와 춤, 술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부대안 시설 같은 그보다 못한 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화해를 위해서』)도 그런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렇게 대륙 각지에 공창제가 시행되자 남방에서도 여자들이 이동해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을까 말까 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남방에 일본군이 공격해 들어가게 되자, 동남아시아 각지에 공창제가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일본이 관리하고 현지 처녀들이 공창에 합류했다. 또 군 관계의 위안대가 보내졌다. 쇼와 초기(1920년대 후반)에 상해로 건너간 가라유키상 중에는, 이때 일본군 위안부의 감독이 된 이도 있었다.(233쪽)
말하자면 아시아 각지에 존재했던 매춘시설이 모두 ‘일본군 위안소’였던 것은 아니다. 여러 종류의 ‘공창’과 ‘사창’이 존재했고, ‘일본군’이 관리하고 공식적으로 병사들이 이용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군이 허가한 ‘공창’뿐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 중국 등 전쟁을 한 점령지에는 여성에 대한 ‘강간’도 많았지만, 이런 식의 ‘공창’에 있던 여성들도 있었다. 그렇게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던 여성들을 똑같이 ‘위안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본군은, 기존의 공창과 사창만으로는 모자라 ‘위안부’를 더 모집하기로 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업자에게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 ○○○○ ○○○○ ○○○○○ ○○ ○○○○ ○○ ○○○ ○○○ ○○. 300만 명을 넘는 군대가 아시아와 남태평양 지역에까지 머무르면서 전쟁을 하게 되는 바람에 수많은 여성들이 필요시된 데에 따라 가혹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위안부’였다. 하지만 ‘현지 처녀들이 공창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모든 위안부가 똑같이 일본군에게 ‘유괴’나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말해준다.
‘일본군 위안소’는 하나가 아니다. 다시 말해 군인이 어느 날 독자적으로 고안해서 위안소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일찍부터 국가의 확장과 함께 존재했던 매춘시설을 이용하다가 주둔병력이 많아지자 군이 장소를 늘리고 관리하기 위해 지정했던 곳이 이른바 ‘위안소’였다. 말하자면 일본군이 이용했다고 해서 아시아 전역에 있었던 그런 유의 시설들을 전부 ‘일본군 위안소’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군인이나 헌병에 의해 끌려간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개별적으로 강간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 ○○○○ ○○○○○ ○○ ○○○ ○○ ○○○○, ○○○ ○○○○○ ○○○○ ○○○○. 말하자면 수요를 만든 것이 곧 강제연행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