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아이러니

1.

참담한 심경으로 이 책을 낸다.

2014년 6월 16일, 이 책은 나눔의집 고문변호사와 소장 등에 의해 위안부 할머니 아홉 분의 이름으로 고소를 당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 했다는 형사고소, 2억 7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 그리고 판매 금지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접근 금지를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이었다. 그 첫 고소장에서 원고 측은 이 책의 109곳을 지적하며 ‘허위’라고 주장 했다.

초판 서문에 썼듯이 책을 내면서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고소는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더구나 책이 나오고 10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출간 후 이 책의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준 서평과 인터뷰가 적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이 책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상을 보내오는 독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8개월 후인 2015년 2월 17일, 서울동부지방법원 민사21부는 가처분신청을 ‘일부 인용’하여 원고 측에서 수정 신청한 53곳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해서는 아니 된다”는 결정을 내놓았다. 다만 나머지 19곳과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은 기각했다.(사태의 경위와 상세한 자료는 인터넷사이트 https://www.facebook.com/parkyuha, https://www.facebook.com/radicalthird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책은 그 결정에 따라 초판본에서 34곳을 ○○○○으로 처리한 삭제판이다.

재판부는 기각한 19곳에 대해 “헌법상 보장되는 학문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의 보호영역 내에 있다고 보이고, 이러한 견해에 대해 법원이 사전적으로 그 표현을 금지하기보다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들을 통하여 시민 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건전하게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은 충분히 이러한 해결이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마땅히 책 전체에 대해 그런 결정이 내려졌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나와 출판사는 ‘일부 인용’ 결정에 승복할 수 없었고 이의신청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재판부도 말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있는 공론 의장을 위해, 삭제판이나마 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삭제판의 모습은, 실은 체제와 국가에 반하는 사상은 검열하여 출간하던 일제강점기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식민지 체험과 그 체험이 만든 갈등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던 이 책은 뜻밖에도 우리가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살고 있음을 드러내게 된, 지극히 아이러니한 책이 되고 말 았다.

2.

고소장에는 이 책의 후기에 적었던, 2008년에 한국에 유입된 재일교포 학자의 인식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또 내가 예전에 『화해를 위해 서』를 썼고 『제국의 위안부』를 썼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심포지움(2014년 4월, 그 발제문을 부록으로 실었다)을 열었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니 “(박유하가) 앞으로도 이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것”, “『제국의 위안부』의 출판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새로운 도서를 출판”할 것이므로 “박유하의 활동을 방치한다면 왜곡되고 오염된 일본군 피해자의 상이 한국과 일본 사회에 각인될 것”이라고까지 쓰여 있었다. “결국 한국 사회 내에서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는 동시에,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해결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그런 “사회적 해악”을 끼치게 될 “잠재된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고소장의 요지였다.

말하자면 이 고소는 이 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의 사회적 활동 자체를 억압하려 한 고소였다. 원고 측은 내가 책에서 마치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난한 것처럼 언론에 흘렸고 이에 분노한 군중은 나에게 돌을 던졌다. 특히 나눔의집 소장이 이를 선도하며 나를 ‘일제의 창녀’라고 쓴 트윗을 리트윗한 사실은, 이 고소의 구조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가처분신청 결정 직전에 성남시장이 나를 친일파로 지목해 다시 한번 수천 명 시민들의 비난을 받도록 한 일은 이 책에서 지적한 진보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일이기도 했다.

3.

고소장에는 내가 위안부 할머니를 ‘자발적인 매춘부’라 말했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는 그렇게 쓴 적이 없다. 지적된 내용은 대부분 기초적인 독해력 부족이나 의도적인 왜곡이 만든 것들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부분도 삭제해야 할 곳으로 인정했다.

원고 측은 특히 ‘매춘’이라는 단어를 문제시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말하려 했던 건, ‘소녀’ 이미지를 놓지 않으려 했던 이들과, ‘매춘부’라고만 주장해온 이들이 똑같이 성이 관련된 문제에 대한 금기와 차별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래도록 당사자들이 어두운 곳에서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고소는 그런 의미에서도 내가 이 책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극명하게 드러내보인 사태였다.

원고 측은 또 ‘동지적 관계’를 문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물론 그것은 남성과 국가의 여성 착취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했”다고 분명히 썼다. 무엇보다 ‘동지적 관계’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동원되었다는 의미였다.

또 원고 측은 이 책이 “매춘을 근거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정했다, 일본 정부를 면책했다”고 했지만, 나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의 책임을 묻는 논지가 기존 연구자나 지원단체와는 달랐을 뿐이다.

내 입장은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일본에도 제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는 것이다. 이 책과 기존 지원단체나 연구자들의 차이는 단지 ‘책임을 묻는 방식’과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기까지의 ‘논지’에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해결 방식’과 다른 해결 방식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힘을 빌려 나를 억압하는 일에 나섰다. 서글픈 건 그들이 오래전부터 그 누구보다도 국가의 억압에 민감했고 때로는 직접 고통을 당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일본을 향해, 그들이 끝났다고 말하는 ‘1965년의 한일협 정의 한계’와 ‘1990년대의 사죄, 보상의 한계’를 논거를 들어 말했다. 또 위안부들이 “제국의 유지를 위해 동원한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배의 희생자다”,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후처리였을 뿐 식민지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일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고 보완하는 것은 다른 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앞장서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는 것이 될수 있다”, “그에 앞서, 제국 구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위안부를 필요로 했던 나라로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제국의 욕망과 지배를 다른 제국 국가에 앞서서 반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제국주의로 향하게 된 일본의 사죄는 아시아의 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했던 기간 동안 희생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진심을 사죄 속에 담아야 한다”고 썼다.

그럼에도 원고 측은 오로지 전쟁의 문제로만 다루면서 ‘법적’ 책임에 구애해온 기존 주장에 회의적이라는 것만으로 이 책이 ‘일본의 주장을 대변’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의 극우세력과 아베 수상’과 관계가 있다는 식의 인식을 퍼뜨려 국민들의 반감을 유도했다.

그러나 2015년 4월, 지원단체들은 그동안 주장해온 ‘법적 책임’을 요구 사항에서 내렸다. 그동안 주장해온 국회입법이 아니라, 몇 가지 요구를 받아들이면 그것을 법적 책임을 진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20년 이상에 걸친 주장을 바꾼 셈이다.

2015년 5월에는, 역사학자를 포함한 세계의 저명한 일본전문가 187명이 일본 정부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이후 500명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성명의 내용은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도 비판하고 있고, 운동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성매매,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원단체는 그동안 ‘세계’가 우리 편인 것처럼 말해왔지만, 이제 그들도 지원단체의 인식에만 갇혀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명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한국 비판은 생략된 채 전달되었고, 이 역시도 한국 편만 든 것처럼 환영받는 일이 일어났다. 이 책의 부록으로 그 성명을 넣기로 한 것은 그래서다.

4.

2014년 7월 가처분신청 심리가 시작되었고, 나는 7월과 9월 두 번에 걸쳐 책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까지 첨부한 A4 10매, 150매 분량의 답변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원고 측은 심리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10월에 원고 측은 ‘청구취지’를 변경하여 처음에 지적한 109곳을 절반 이하로 줄이고, ‘허위’라던 처음 지적을 이 책이 전쟁범죄를 찬양하고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논지를 펴고 있다는 주장으로 바꾸었다.

늦가을에는 형사고소에 관한 조사도 시작되었다. 동부지검에 다섯 번을 불려가 ‘범죄리스트’라는 제목이 달린 53개 항목의 지적사항에 대해 대답해야 했다. 그때의 담당 검사는 내내 나를 범인 취급했다.

그러나 가처분신청과 고소에 대한 시민사회/학계=공론장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고소 직후에 일부 학자와 시민들이 법정으로 가는 데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했을 뿐, 관계자들과 관련 학계 대부분은 침묵했다. 오히려 재판부의 결정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나를 비판한 이들은 대부분 이 책이 ‘일본을 면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본을 면죄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지를 고찰했을 뿐이다.

주로 남성 학자들이 비판에 나선 이유를 나는 ‘책임의 탈젠더화’ 현상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쓰겠지만, 여러 책임 요소 중에서 ‘일본’의 책임 만 묻는 것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민족문제일 뿐 아니라 성과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물론 이 책에도 쓴 것처럼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은 전쟁을 일으키고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한(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를 만든) 일본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러한 국가동원에 협력한 이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국가가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일본’에 대한 책임 추궁은 말할 것도 없이 필요하지만, ‘일본’이라는 고유명에 대한 집착은 국가와 남성과 지배층과 일반인의 책임을 묻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물론 그 모두를 실질적 처벌의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 그런 책임 추궁이 물타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중적인 책임을 보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는 사태를 단순화시켜 오히려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지 못한다. 실제로, 제국이 붕괴하고 제국주의가 끝났어도 여전히 소녀 인신매매가 만연하고 국경을 넘어 여성들이 가혹한 상황에 처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과거를 생각하는 이유가 반복을 막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책임을 다층적으로 물을 필요가 있다.

5.

한국어판 발간 직후부터 준비했던 일본어판이 2014년 11월에 출간되었는데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이른바 ‘양심세력’에 속하는 지식인과 매체들은 예상밖의 관심과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중 하나는 “이제 물음은 일본을 향하고 있다”는 말로 맺고 있었다. 또 “나는 이 책을 읽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아픈 마음이 한층 깊어졌을 뿐이다”(2014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 「와카미야의 東京小考」), “일본에서 평가가 높은 것은 결코 우익이 기뻐해서가 아니라 해결을 바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 (2015년 3월 19일자 같은 칼럼)이라는 평을 보고, 나는 내가 던진 공을 그들이 제대로 받아주었다고 느꼈다. 나는 일본어판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담은 일본의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추가했었다.

그러나 그런 호평에 반발하는 일본의 연구자/지원단체의 비판도 2015년들어 시작되었다. 그 대부분이, 2008년 한국에 전달된 재일교포의 시각을 잇는 내용들이다. 조만간 이에 대한 반론을 쓸 생각인데, 언젠가는 그들 중에서도 내 진의를 이해해주는 이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일본에서 이 문제를 부정해오던 이들이 위안부의 정황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공감을 표해주었던 것처럼.

이 문제에 관여해오지 않은 이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객관적인 판단도 기대한다. 한일 양국을 잘 알면서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이들도 논의의 주역이 되어주면 좋겠다.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묻는 폭력적인 질문에는 ‘내 친구 편’이라고 대답하면서.

힘든 나날이었지만, 소신껏 발언하고 옹호해주는 빛나는 지성의 시민들과 지식인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일본. 다른 공간에 있는 수많은 ‘마음’들이 나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었다. 그들이 있어서 이 1년 동안의 적의와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의 힘이, 산소를 가득 품은 강물이 되어, 동아시아에 우애와 평화의 바다를 만들어주리라고 믿는다. 함께해준 모든 분께 이 책을 바친다.

2015년 6월 피소 1년을 맞아

박유하